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 트렌치코트에 낭만은 없었다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 마티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간단한 이유로 이 책을 샀다. WW1에 대한 지적 호기심. 미디어 등에서 WW2보단 비교적 접하기 힘든 소재니까.


책은 흔한 전쟁사 - 위정자, 지휘관들의 이야기는 배제하고 실제 참전군인들에게 그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일단 1차대전은 가히 현대전의 개념을 정립한 전쟁이라 할 만했고, 그 정립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교본들은 온통 단발소총 쏘던 고려 시절 기준에 맞춰져 있었고 그걸 배우고 전장에 나선 장교들은 사병들에게 맥심 앞으로 돌격을 시켰다. 불과 30여 년 전에 자기들이 개틀링으로 줄루족을 몰살시켜 놓고 반면교사할 줄은 몰랐던 거다.


가공할 화력의 무기들과 심지어 독가스 공격까지 등장한 이 전쟁에서 결국 은·엄폐의 중요성을 깨달은 참전국들은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참호의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전선이 고착화되면 될수록 더욱더 복잡다단한 참호가 생겨났다.


또한 이 참호들은 대단히 끔찍한 장소였다. 수시로 폭탄이 날아와 터지고, 여기저기서 사람 조각이 날아다니는 건 전쟁통이라 그렇다 치는데, 도무지 배수가 되지 않아 365일 질척거리고 악취가 극심해 군인들의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었다고 한다. 이게 땅바닥에 풀 한 포기 날 새를 안 주고 계속 폭탄 쏘고 총 쏘고 하니까 온 전장이 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래 바닥에 널빤지도 깔아보고 이런저런 수를 써봐도 해결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심지어 포탄구멍에 물이 차고 흙과 섞여 죽처럼 돼버리면, 그게 그대로 개미지옥도 아닌 인간지옥이 되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거기 한번 빠지면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가 위에 철모만 둥둥 떠있는 시체들이 수도 없었다니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책에는 수많은 증언들이 실려 있었다. 개중 돌격을 앞둔 한 스코틀랜드 병사의 감정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돌격 15분 전, 기분이 이상하게 좋지 않다. 심장이 좀 더 크게 두근거리는 것 같다.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심장의 박동과 연동해서 계속 고동친다. 작전 행동 개시 시간이 다가온다.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는데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간다."」


군대도 다 사람사는 곳이라 비교적 후방에서는 약간의 여흥들을 즐기기도 했다. 1917년에 열린 군인들끼리 꾸민 한 연극 - 정말 끔찍하다 - 에 관한 증언 한 토막 들어보자.


「...일종의 무언극이었는데, 돌격전을 수행했거나 적어도 최전선 진지에서 근무를 해본 병사들이었다. (...) 이야기의 배경은 1967년이었는데, 정말 끔찍하리만치 독창적이었다.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병사들의 손자들이 등장했다. 휴가는 오직 21년에 한 번씩 허가되었다.」


남자들끼리 위문공연하는 것도 끔찍한데 50년째 계속 되는 전쟁 이야기라니... 게다가 휴가가 21년에 한 번씩 이라니..!! 만약 내가 1차대전 참전했는데 21년 주기 휴가를 선고 받는다면 당장 독일군 토치카에 자폭공격 가서 장렬히 산화 후 후손들 유공자 혜택이나 받으라고 할 것 같다.


특별히 새롭다 싶은 이야기들보다는 WW1에 갈아넣어진 수많은 영혼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모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군인 - 특히 병사들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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