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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전호태 지음 / 풀빛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현대 한반도 거주민이라면 대부분 고구려의 방역과 국력에 대한 환상 내지는 미련이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만주 벌판이 얼마나 광활한 지에 대해서는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 넓은 땅을 통치하고 - 무려 중국 통일왕조와 정면대결을 펼쳤던 고구려에 대한 그리움은 발해와 고려의 건국으로 이어졌으며 우리의 대외적인 이름 또한 Korea, 즉 고구려이다. 고구려에 대한 한민족의 집착과 애정은 1,000년 이상을 반도 안에만 갖혀 지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자격지심, 또는 恨의 투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에게 고구려는 한족의 요순시절과 같이 여겨지고 있으며 - 안타깝지만 -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고구려의 반의 반토막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나도 어쩔 수 없는 한민족이다. 때문에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고구려는 지나치게 북쪽에 있었다. 물론 지금의 못난 후손 입장에서 말이다. 신라는 당장 대국이 북에서 짓누르고 있어 견디기 힘들었고, 당 또한 변방의 골칫거리를 제거하고 싶었다. 수양제, 그리고 당태종의 끔찍한 전례가 있었지만, 이번엔 우군이 적국의 뒤에서 호응하는 형세이니 도박을 걸어봤다. 그렇게 당고종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했고 고구려의 사료와 각종 유물들이 무수히 남아있던 평양과 국내성, 졸본 등은 이후 수백 년 혹은 아직까지도 한민족의 영토로 편입되지 않았다. 이는 발해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현재 고구려에 대해 극히 제한적인 사료와 유물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도 한줄기 빛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고분벽화인 것이다. 고구려인들 사이에선 유난히도 무덤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 유행했으며, 이는 고고학자 및 역사학자들에게는 크나큰 축복이었다. 그 양반들이 벽화를 안 그렸더라면 우리가 아는 고구려의 모습은 발해의 그것보다 덜하면 덜했지 결코 명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이 고분벽화를 토대로 고구려에 대한 썰을 풀어놓고 있다.
사실 아주 특별할 건 없었다. 이미 고구려에 대해선 학교에서나 공무원학원에서 질리도록 배워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확실히 그런 건 있었다.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무용총이나 강서대묘 벽화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작품들이 워낙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고분벽화들의 상태나 수준이 썩 좋지는 않아보이더라.
와중에도 몇몇 이야기는 내 눈길을 끄는 면이 있었다. 저자는 『일본서기』의 기록도 종종 가져오고 있는데 거기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가 싸웠을 때 적장끼리 서로 1대1로 겨뤄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한다.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일기토가 있었다는 얘긴데, 현대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다. 또한 고구려인들이 세계 최초로 온돌을 발명했으며 실내에서는 신발을 벗고 생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나오는데 이런 거 보면 중공 놈들의 동북공정은 미친 소리다.
이밖에도 고구려인들의 무기, 종교, 복식 등등에 대하여 고분벽화는 정말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해의 상징은 삼족오, 달의 상징은 두꺼비와 토끼, 그리고 계수나무였다는 사실과 불교 공인 후 벽화 양태의 변천, 그리고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득세하면서 불교와 도교의 세계관이 혼재된 그림들 등등... 그리고 복식에 있어서 남자는 검정색 건을 쓰고 여자는 흰색 건을 썼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재밌게 읽었다. 특히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언제 봐도 걸작이다. 고구려인의 생활상에 대해 다룬 책들 중에 이보다 알찬 책은 많지 않을 듯 하다.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