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이긴 한국인
장훈 지음, 성일만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10년쯤 전인가, 한일레전드매치 혹은 그와 비슷한 명칭의 이벤트 경기가 잠실구장에서 치뤄진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그걸 생방으로 봤는지 다시보기로 봤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어찌 됐든 국민의례부터 풀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레전드측 인솔단장(?)이 바로 장훈이었는데, 기미가요가 나오는 동안 눈 감고 따라부르는 왜인들과 달리 장훈은 그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다음으로 애국가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대표 인솔단장인 장훈이 태극기를 향해 서서 잘 알려진 그 조막손을 왼가슴 위에 얹는 게 아닌가! 난 성씨도 같고 재일교포로서 NPB 레전드에 오른 그를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 날 이후로 장훈을 충무공 급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23시즌/2,752경기/타율 0.3191/출루율 0.399/OPS 0.933/안타 3,085개/홈런 504개/타점 1,676개/도루 319개/사사구 1,274개/WAR 116.4(테드 윌리엄스(123.1)보다 조금 낮고 루 게릭(112 정도)보다 높다)/타격왕 7회/19시즌 연속 올스타/500-300클럽(NPB 유일)... 통산기록만 봐도 빤스 갈아입고 와야할 정돈데 이걸 재일교포로서, 장애인으로서 해냈다. 게다가 기록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의 멘탈까지 생각해본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존경하고 우상으로 삼기 딱 좋은 대상이다.

 

 이 책은 장훈이 일본에서 출간한 자서전을 일간스포츠에서 발췌 및 번역하여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93년도에 초판이 나왔고 이건 07년도 개정판이다.
 장훈은 40년생인데, 히로시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창녕 출신이었다. 어릴 적에 화상으로 인해 오른손이 굽어 왼손잡이로 바꾸고, 핵 맞아서 누나 한 명 먼저 보내고 부친도 고향 갔다가 요절하고 하여간 영화 같은 스토리로 인생을 시작한다. 당시에는 뭐 민단이니 조총련이니 없었을 거고 한국인학교 따위도 없었을 테다. 왜인들과 똑같이 정규교육을 이수하고 자란 장훈이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데엔 모친 덕이 크다.

 

「오가와 구단주는 언젠가 나에게 양자 입양을 제의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어린 나는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양자 입양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달리 민족의식이 강한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 몰래 양자 수속을 밟을 수 없어 상의를 드렸더니 단번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따위 짓을 하려거든 당장 야구를 그만두고 히로시마로 돌아오너라."」

 

 장훈은 시쳇말로 '인자강'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유전자의 힘 말고는 온통 악조건 - 장애, 가난, 자이니치 - 뿐이었다. 이걸 이겨낸 데엔 강직한 모친의 가정교육과 더불어 야구선수로 성공하여 가난을 이겨내고자 하는 동기가 큰 역할을 한 듯 싶다. 본인도 처음에는 돈 많이 벌어서 가난을 벗어나 모친께 효도하고 싶었다고 쓰고 있다.
 장훈은 신인 시절부터 연습벌레에다가 선진 훈련법도 적용했다고 한다. 당시 야구선수는 웨이트가 금기시됐다고 하는데, 장훈은 몰래 역도산네 체육관에 가서 훈련을 하곤 했다고 한다. 같이 운동하던 가네다는 도중에 힘들다고 그만 뒀다는데 장훈은 웨이트를 계속 했다고 하며 톡톡히 효과를 본 것 같다. 여기 나온 가네다가 김경홍인지는 잘모르겠는데 - 작중에 '대투수'라고 하는 거 보니 맞는 것 같다. 김경홍은 귀화한 재일교포인데, 통산 5526.2이닝, 400승, 4,490탈삼진, 14년 연속 20승을 한 양반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사이 영이라고 보면 되는데, 반강제로 귀화 당했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 별명이 '덴노'다. 그런 사람도 힘들다고 포기한 것을 묵묵히 해낸 장훈이니 진작부터 대성할 그릇이었던 셈이다.
 데뷔 시즌부터 신인왕에 2년차 때는 일본 올스타에 뽑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랑 친선경기에도 나갔다는데, 당연히 펄펄 날아다녔다고 한다. 이때 무려 윌리 메이스랑 경기를 뛰었다는데 Say Hey Kid의 아름다운 플레이를 보고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장훈이 싸움을 정말 잘했고 야쿠자가 될 뻔 했다느니 성격이 불같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게 과연 허명이 아니라 장훈은 감독에게 항명하는 스케일도 남달랐다.

 

「난카이전에선가 경기 종반 수비 위치로 들어가 있는데 벤치에서 교대 신호를 보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그 길로 우리팀이 아닌 상대팀 더그아웃을 거쳐 합숙소로 달려갔다. 상대팀 선수들은 성난 표정으로 씩씩대며 자기네 더그아웃으로 뛰어든 나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합숙소로 돌아가 배트로 유리창문을 모조리 박살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장훈이 돌글러브 이미지가 있어서 이기고 있는 경기 때 대수비로 교체가 되곤 했다는데 그걸 감독이 미리 좀 바꾸든가 자꾸 수비 들어가고 나면 바꾸니까 성이 난 거다. 이 사건 있고 나서 감독이랑 금방 화해했다고 한다.

 그밖에 온갖 에피소드들 - 슬럼프 탈출기, 각종 선수 및 감독들과의 일화 등등 - 이 많이 실려 있었다. 특히 장훈이 선수 겸 수석코치를 하고 있을 때 스스로 번트 사인을 내서 성공했던 일화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워낙 강타자라 프로 1,885경기만에 처음으로 댄 번트라고 한다.
 장훈은 "23년간 내 야구 인생에 결코 후회는 없다"고 했다. 알렉산드로스나 칭기즈칸을 보면 위화감이 들지만, 장훈을 보면 그 삶의 자세를 귀감으로 여기게 된다.

 

 마무리는 국내 야구인들의 헌사로 꾸며져 있었고 현재 파이낸셜뉴스로 가 있는 성일만 기자가 옮긴이의 말을 써놓고 있다. 야구팬이면, 아니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봐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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