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장르소설이 대중화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인터넷의 보편화와 대중매체인 영화의 힘으로 장르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마음이 열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오래 전이라고는 할 수 없는 2000년에 출판된 이 책은 극소수의 독자만 남긴 채 결국 사장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과 <요괴 렉스(피의 책2)>(이하 <피의 책>으로 통일).
예전에 어디서 읽었고, 나 역시 거기에 동의하는 바, 클라이브 바커에 대한 소개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피의 책>이 먼저 알려지는 게 우선 순위이다. 영화 <헬레이저>로 클라이브 바커라는 이름에 익숙한 호러 팬들에게 <아라바트>나 <시간의 도둑>은 영 어색한 작품들일뿐더러 이 둘은 클라이브 바커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결정적인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출판된 순서를 따져보면, 클라이브 바커가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된 것이 맞다. <피의 책>⇒<시간의 도둑>⇒<아라바트>의 순서로 출판되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피의 책>이 출판될 당시에는 아직 사람들이 장르소설 또는 호러 소설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차라리 이 시기는 장르소설이 젊은 층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성장 과정 중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이영도를 필두로 한 판타지가 말이다(종국에는 많은 문제를 안고 하락해버렸지만...).
여하튼 불온(?)한 시기에 한국에 착륙해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떠나버린 <피의 책>이 현재 헐리우드의 관심을 받으며 영화화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한밤의 식육열차>.
일본 감독이 맡았는데, 듣기로는 첫 헐리우드 진출작이라고 한다.
공포 영화를 거부하지도 않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는 사람으로서(그냥 기회가 닿으면 보는 식이다.), 이 영화가 개봉할 경우 과연 관람하게 될 지 잘 모르겠지만, 포스터를 봤을 때는 분위기 조성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관심이 조금 생겨났다. 관심을 부추긴 또다른 요인은 단편소설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한밤의 식육열차>를 읽으면서 미국 공포문학의 거장(?)인 H.P. 러브크래프트가 연상되었다. 사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 있는 일부 팬의 사이트를 방문하면서 주워듣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내재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작품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형성된 이미지가 아니라서 단순한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불찰일지 모르는 이런 연상작용 덕분에 <한밤의 식육열차>가 더 인상깊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이미 번역되어 나왔고, 또 번역 중이라고 말하는 출판사가 있고, 또다른 공포소설 작가인 스티븐 킹의 작품도 계속해서 번역되고 있건만, 어찌하여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은 듯도 하고, 스티븐 킹의 아낌없는 칭찬을 받았던 클라이브 바커의 대표작은 절판된 이후 재출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오죽하면 나도 한글판을 구하지 못하여 영문판을 읽고 앉아있었겠는가.
이번 기회에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이 재출간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예전에 나왔던 씨앤씨미디어의 번역이 괜찮았다고 하니, 그 번역자분께 부탁하여 재출간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단지 영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사람들에게 클라이브 바커를 소개할 시기적절한 때라는 느낌이 들기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총 3권이었어야 할 책이 과거에 두 권만 출판되고 끝났으니 이 참에 세 권을 모두 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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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책> 영문판. 1-3권 합본. 클라이브 바커는 이 책의 서문에서, <피의 책>을 쓸 당시의 자신은 죽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와같은 공포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는 얘기로 이해했는데, 어째서인지 호러 게임 제작에는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 <클라이브 바커의 제리코>(순간 현재 방영중인 미국 드라마 '제리코'인지 알고 당황했다.)라는 게임을 만들었고, 내가 본 게 맞다면, 공포 영화도 하나 준비중이라고 한다. 더 이상 그 때와 같은 단편을 쓰지 못한다는 얘기인 걸까? 그러고보니 그의 요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언제 기회되면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