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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처음 읽으면, 통쾌하고 조금 있다보면, 씁쓸하고, 생각해 볼수록 꺼림직하게 된다. 비단 일본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이윽고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속담이 서양인의 관점에서 얼마나 비생산적인지 아멜리, 그녀는 자신의 일본에서의 직장경험을 예로 여실히 보여준다.
자신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에 만족하지 않으며, 여태껏 일본의 직장인이라면 그리고 으레 여직원이면 시작하는 일의 단계를 건너 뛰고 그녀의 상사 Miss Mori, 즉, 나무랄 데 없는 후부키가 우려할 정도의 고도의 승진(?)을 꿈꾸는 일을 시도한다.
아멜리의 일본여성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야마도 나데시코’라는 향수어린 전통적이고도 이상적인 일본여인상을 이해하기에 후부키와 같은 그녀들이 제도 내에서 겪는 모순된 점을 결코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규정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 기를 쓰고 일하면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되다 보면 결혼을 하지 않고 스물다섯을 넘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게 흠이 되었다. 이 제도에서 보이는 사디즘의 절정은 제도 자체의 논리적 모순에 있었다. 제도에 충실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제도에 충실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
스물아홉에 남편이 없다는 유일한 결함과 함께 잘못이라곤 자신의 모든 것을 듣고 배워온 대로 일에 남김없이 소진시킨 것 밖에 없는 후부키는 또다른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설명하면, 누군가 원해 주었다고 해서 한 남성과 결혼을 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주부로서의 희생이 당연한 행복으로 되돌아 온다는 보장 또한 있지는 않다는 것이, 이 길을 택할 수도 또한 저 길을 택하였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는 진퇴양난스런 점인 것이다.
단지, 남에게 내세울 자신에 대해 조금 덜 수치스러워진다는 것뿐… 더욱이, 회사라는 유기체의 하나의 부속으로서 밤 늦도록 열심일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오히려 이러한 시간들을 조금 더 아파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다고 아멜리는 언급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고 화해하고픈 진심을 보이지만, 응답없이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는 이 아름다운 후부키에게 결국 자신의 1년의 계약기간이 도래했을 때 아멜리는 과거 일본 황실에서 천황을 알현할 때 사무라이가 취하던 <두려움과 떨림>의 자세로, 아니,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떠는 듯한 가장으로, 그녀를 비롯한 자신의 상사들을 만족시킨다.
‘제 계약 만료일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계약을 갱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유미모토사는 제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안타깝지만, 제게 과분하게 해 주셨는데도 저는 걸맞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라고…
구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언어는 - 한국어도 그렇지만, 일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나라의 언어를 다른 피부색을 가진 또는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이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다. 예상외로 현지인처럼 멋지게 구사한다면, 뭔가를 들키는 것처럼 징그럽게 불편해질 때도 있다. 아마도 아멜리도 마찬가지의 경우를 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녀에겐 여타 외국인과 같은 짧은 시간 비즈니스 일어를 독파한 것 외에, 그곳에서 보낸 어린시절이란 남다른 기간이 있다. 일본 문화를 체험했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베이징, 뉴욕,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 유럽스럽지(?) 않은 이국적인 곳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이다.
어렸을 때의 환상으로 대한 나라에 느낀 실망스런 점이라 더욱더 그 극을 치닫는 지도 모르겠지만, 조용하고도 여실한 그녀의 말투에 귀기울이는 것이, 한국의 독자로 하여금 여전히 과거에 대한 자성의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는 작금의 일본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난 일본이란 나라가 가지는 일본 여성에 대한 시각과 함께, 권위적인 조직 체계, 비효율적인 사무처리 등에 대한 약자로서의 작가의 신랄한 비판에, 울수도 웃울수도 없는 감정을 오가며 단번에 이 책을 읽어내어 버릴때까지 손에서 내려놓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