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를 우회하는 그리기>>展

2005.02.26 ~ 2005.05.08 부산시립미술관 2층 대전시실

참여작가: 김수영, 류재웅, 박정렬, 심점환, 신학철, 정재호, 이인철, 황순일 등 8명

기획의도:
그림 그리기란 언어적 재현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은 언제나 언어적인 것들이다. 이 중단과 재현으로서 언어라는 양의성을 가진 그림, 그 중에서도 특히 사실적 기법을 보이는 그림들에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름의 시선, 혹은 차이에 대한 섬세한 반응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잔 손택이 “스타일을 예술작품 안의 결정 원칙이요, 예술가가 자필로 서명한 의지다”고 했듯이 스타일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질 것이다.

회화에서 리얼과 리얼리티는 무엇인가, 리얼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가. 그리고 리얼리티라는 말의 외연과 내포는 어디까지 일까. 리얼리즘으로서 태도와 현실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과연 온당한 의미로 엮어지는가.

문제는 여전히 현실인가, 아니면 현실해석으로서 그림의 위상인가 하는 물음이다.
사실로서 사믈의 제시는 과연 사실적인가 하는 질문과 사실적 기법으로 사물을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려는 작품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현실로서 사실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으며, 현실을 보아내는 것으로서 한국의 사실화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고자 하낟.

현실과 사실적 그리기라는 어법에서 생기는 재현과 차이의 문제/현실구현이라는 의지와 현실왜곡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초점을 놓아본다. 다름아니라 사실적인 접근과 해석은 실재에 대한 우회적 어법이지 사실 그대로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재현기능과 의미에 대해 의심하면서 우리 사실화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한국 사실화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들 작업들에서 그들의 세계와 현실로서의 우리의 세계가 과연 리얼이라는 의미의 내포나 외연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점검해보고 리얼로서 현실과 리얼한 그리기로서의 현실, 그리고 현실 일탈로서 사실적 그리기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묘사와 현실 사이에서 작가의 갈등과 현실과 그림 사이에서 보는 이의 이해와 갈등, 사회적 이념과 미술의 역할 등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실재에 대한 우회적 어법으로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시내용:
대상을 대상처럼 그리고 그 닮음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사실화는 일상적이고 구체적 형상 때문에 쉽게 보는 이에게 다가가는 이점이 있다면 그 닮음이 놓인 맥락이나 문맥을 놓치고 마는 어려움도 있다. 너무 쉽게 상투적 형상을 수용하고 만 탓이다. 실은 사실적인 그림의 대상이란 하나의 서사적 문맥 속에 놓여서 그 서사를 현시화 하는 요인으로서 역할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닮음이란 다름 아니라 대상의 물성뿐 아니라 타자를 인용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객관적 대상을 닮게 옮겨놓는 것은 옮겨 놓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맥락에 놓여지는 것으로 마치 타인의 언술을 인용해서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수법에 다르지 않다. 모사가 아니라 언술의 특징적 기법이며 타자를 옮겨놓는(인용) 것으로 다른 요인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화도 그 맥락에 대한 감성이 없으면 언제나 상투적인 형상을 확인하거나 자신의 이해 정도를 확인 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만다. 작품의 맥락을 놓치는 것은 문학적 수사가 주는 풍부한 표현의 감칠맛을 느끼지 못하고 설명문을 읽는 건조한 읽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실화는 대상을 인용하고 그 인용은 다른 문맥으로 의미를 확장함으로 해석의 하나가 되는 데, 그 해석은 결국 실재를 우회해서 표현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사실화는 실재를 우회해서 그리는 인용의 어법이다. 나는 그렇게 사실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 우회에서 우리는 대상과 현실과 그리기라는 삼자 사이에서 긴장을 가지게 되고, 때로는 상투적인 확인을, 때로는 상투적인 형상 사이에 잠복된 의미를 들여다봄으로 범속한 삶의 의미를 다시 가다듬는 것이다. “형식은 하나의 세계관이고, 하나의 입장이다. 또 형식은 그것이 생겨나는 바의 삶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 표명이다. 그리고 형식은 삶 자체를 다시 만들어내는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기란 바로 그런 세계관을 표명하는 것이고 자기 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몇 가지 스타일, 혹은 형식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입장을 사실화에서 실재와 실제, 현실 혹은 일상이라는 관계로 살펴보려 하는 데 이 전시의 주안점이 있다.

황순일/ 그의 정물은 무섭다. 털이 벗겨진 채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닭 한 마리는 식욕의 풍성함을 안겨주기보다 심각하고 처연하게 한다. 고기살은 이미 푸르게 변색되었고, 부러진 다리의 근육들은 해체되어 벗겨져 있다. 닭의 고기살점들에서 거친 인간의 피부를 연상하게 되고 주름진 인간의 손등을 읽을 수 있는 고기살의 표정은 벌거벗겨진 육식성의 실재를 드러내는 듯 하다.
소의 하악골이 고기 덩이 위에 걸쳐져 있고, 이미 생명의 온기를 잃은 눈알은 유리구슬처럼 빛난다. 그리고 그 아래로 고깃덩이가 지방과 근육질이 잘 어울려 있는 듬직한 육질로 잘려진 살점들과 함께 놓여 있다. 조명이 잘된 바닥에 놓여 있는 고기살의 선명한 음영과 색상과 형태감은 분명 의도된 제시이자 소격 효과를 노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상의 어떤 메시지도 보이지 않는다.
같은 맥락이지만 고깃덩이와 이빨이 선명한 아래턱 뼈와 그 이빨 사이로 자신의 살점을 물고 있는 작품이 있다. 그 고깃덩이가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살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행해화 된 대가리로 살점을 물고 있는 엽기적인 이 정물은 일상적인 정육점의 보여주기이지만 손에 묻어날 것 같은 고기살의 촉감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살의 두께와 무게감, 번들거리는 기름기는 마치 조작된 장면처럼 도리어 현실감이 없다 너무 진짜 같아 일상에서 일탈되어진 것이다. 그대신 고기가 아니라 몸이라는 것에 대해 섬뜩한 이해를 요구한다.
털이 벗겨지고 대가리가 없는 도축된 닭은 일상적으로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그러나 그가 내놓는 닭고기의 살덩어리는 이미 살이 뜯겨진 다리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고깃덩어리이다. 잘 비추이는 조명 아래 배경은 어둡고 고기의 지방과 근육은 빛난다. 그런데 이들 작품 대부분의 화면 위 한쪽에는 어울리지 않게 스피커의 일부분이 보인다. 그 육체에 내재된 소리를 듣게 하려는 것일까? 고깃덩이 위에 병치된 스피커라! 배경은 어둡고 그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아니 선명하게 자신의 일부를 보여주는 스피커는 이 작품 전체의 이미지를 분열시키고 그 대신 독특한 병치의 의미를 던져준다. “표현된 것과 표현 될 수 없는 것 간의 갈등을 감지하는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이 늘 있음을 보여준다.

심점환/ 심점환은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 같은데 훨씬 더 의도적이라는 냄새를 풍긴다. 반복에 의한 강조가 도리어 현실성보다 구성된 것으로, 현장감보다 상황이 강조됨으로 개와 생선이라는 구체적 형상이 비현실화, 추상화 되어버리는 데서 오는 인상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세세한 디테일을 제시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익숙한 것들이고, 통념적으로 인지되는 것들이다. 생선대가리와 내장, 개고기란 흔한 만남의 하나이다. <무의식>, <저 바다에 누워> <과정> 등의 형상에서 금방 알 수 있듯이 바다, 생선, 그리고 그 생선의 내장, 개 대가리와 개 내장과 사지의 숨막히는 과잉 이미지는 배경도 정황도 없이 사물 그 자체로 던져진다.
피 터진 흔적도, 고기를 둘러싸고 있는 체액이나 피, 내장의 끈적거림도, 생선부위들의 난자당한 모습, 껍질과 내장의 각별한 표현이나 왜곡도 없다. 그저 열심히 그려진 시각이미지의 과잉이 화면에 넘쳐난다. 실제인데도 실제성이 없고, 실재를 그려놓고 있지만 정밀하지 않아 실재성에 충실하지도 않다. 보는 이는 이 과잉의 언어에 숨 막혀 서 있을 뿐이다. 언어가 끊어져야 한다면 이런 순간일 것이다. 황순일이 단순하지만 이야기를 깔고, 그런 서사를 읽을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면 심점환의 경우는 아예 그런 서사가 설 자리마저 없애버리고 있다. 이야기를 없앤 자리에 과잉된 이미지를 대신 놓아둔다.

김수영/ 아파트나 대형고층 건물을 그리는 김수영 작업에는 도시의 건조한 선들이 가진 미세한 다름에 대해 주목하고, 한 건물이 다른 건물을 거울처럼 되비추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서로를 비추이면서 서로의 형태와 형태적 특성을 증식시키고 있는 이런 정황은 다름 아니라 실체 없는 증식의 일면이자 현대도시의 특징을 그렇게 보고 있다. 실체 없는 증식으로 구성된 도시의 초상이다. 그것은 창이라는 구조를 통해 바깥 건물을 내다보는 것에서부터 건물에 비친 타자의 건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조되어 나타난다. 실제로 창이나 베란다 색상이 그렇데 요란하고 울긋불긋하게 칠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육중한 건물의 선과 위용에 어울리지 않게 알록달록한 창과 베란다의 색상은 문의 구조이자 아파트의 건축적 특징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수없이 작은 문들로 이루어진 건축물이지만 막상 인간이 들 수 있는 곳은 보이지 않는 구조이다. 차량이 드나드는 지표면의 작은 공간을 제외하고는 거대한 유리창으로 뒤덮인 건물 앞에서 가로수와 인물과 차량들은 겨우 그 한구석에서 장식처럼 있다. 곧게 선 직선의 구조 앞에서 때로는 작은 빛살처럼 사람들이 어른거리고 맞은 편 건축물의 되비침이 마치 이 건물의 또 다른 장식처럼 자신을 치장해 보이고 있다. 타인의 얼굴이 자신의 장식이 되는 건물구조들은 서로를 서로에게 보여주면서 건조하고 무심한, 냉혹한 직선들을 증식하고 있다. 건물로 가득 찬 공간은 그 자체가 공간을 막아서 있으면서도 유리라는 매체에 의해 또 다른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각적인 착각에 의한 것이지 구체적 공간은 아니다. 마치 자신의 몸에 비친 타자의 건물이 자신의 얼굴이나 표정처럼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울에 비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의 무한증식에 다르지 않다. 그의 도시는 그렇게 닮은꼴들로 무한히 이어진다.

정재호/ 그의 아파트는 구질구질하고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고, 낡고 고단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의 창살, 베란다의 망가진 보호망, 부옇게 매연에 눌러져 있는 도시의 모습을 잡아내고 있다. 옆으로 펼쳐진 그의 아파트들은 겉이 속으로 드러나는 시선을 보여준다. 속이란 그 아파트 안의 정경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남루함의 표현이다. 망가진 가구, 덧붙여진 베란다 지붕, 계단참에 놓여 있는 잡다한 가구나 가전제품의 나부랭이들이 고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곳에는 냉점함보다 끈적거리는 일상과 직선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직선이 무너져 분절된 건물의 형상들이 분절된 일상의 의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빗물이 타 내린 직선은 김수영 직선과는 다른 곤고함이 베인 자국으로 드러난다.
같은 건물, 같은 아파트 구조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선을 보게 된다. 김수영이 서사를 피해가려 하고 구조적인 미와 화면내의 긴장을 의도하고 있다면 정재호의 작업은 서사가 중요한 요인이 된다. 작은 화분 하나를 놓아도 그것은 정물이거나 풍경이기보다 이야기가 된다. 곤고한 삶의 일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낡은 아파트 단지라는 소재 자체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는 그곳을 손으로 더듬고 있는 듯 하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저 보여줄 뿐인 것이 다른 말보다 더 많은 말들을 웅성거리게 하다. 창을 지나 벽 저쪽의 풍경까지 가 닿은 말들이다. 그리고 아파트 벽에 붙여 지은 구조물들은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모습으로 내부로 들어간 전신줄이 아니라 외부로 노출된 전선처럼 그렇게 노출된 황폐한 터이자 삶의 모습을 보인다.

박정렬/ 흙이나 전통 풍물적 정경에 관심이 있던 그는 어느 순간 끈끈한 정서적 일체감을 강요하는 그리기에서 훌쩍 넘어서서 마치 정밀한 지도를 대하듯 그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땅에 대해서 냉담할 정도로 거리를 가지고 그려가기 시작한다. 지도라고 했지만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객관적 실체를 보여주겠다는 태도에서 그런 인상이지 지도를 그리듯 기호화한 도면이나 조감적 그리기를 지적하는 말은 아니다.
<함양군 서상면 도천리> 풍경은 옆으로 4미터, 높이 122센티의 크기이다. 중앙에 놓인 산과 옆으로 날개를 벌린 산세, 그리고 그 앞으로 전개된 계단식 논과 밭자락, 무덤과 개량된 시멘트길, 비닐하우스와 개울가의 잡목들, 산의 청색과 논밭의 황색, 그리고 개량된 시메트길의 흰색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옆으로 길게 시선을 움직여 간다. 이런 구성이나 포착은 옆으로 넓어지는 공간감의 크기에서보다 도리어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실성이 돋보인다.
<양평군 양평읍 두물머리>, <남양주군 조안면 삼봉리>, <평창군 수항리>, <충북 음성군 소태면>의 풍경들은 화면 상단에 닿을 듯한 구성과 그 밑으로 산세를 잡고 앞으로 펼쳐진 논, 밭, 둔덕, 묘자리. 시멘트길. 작은 나뭇가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묘사에 데한 집중된 표현, 그 표현은 화면 전체를 정밀하게, 소리 없이 펼쳐져 있데 긴장된 침묵, 수없이 많은 소리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 순간 모든 것이 침묵 속에 든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 곳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시야에 든 화면은 그 때문에 원근감에도 불구하고 원근감보다 그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듯한 장소성이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의 풍경에는 그가 없고, 현실경만 있다. 그림으로 지워도 좋은 부분들을 그대로 두는 그의 관점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풍경은 특정 지역의 명칭을 가진 것들이지만 익명의 곳으로 우리에게 다가가게 한다.

류재웅/ 눈이 쌓인 풍경이 저만치 보이는데 그 풍경은 보는 이의 눈을 끄는 것이 아니라 호흡. 체취, 집까지 나 있는 작은 길로 내닫는 바쁜 걸음을 안겨다 준다. 같은 풍경을 그리는데 이렇게 다르다. 박정렬이 인간의 체취보다 있는 풍경 자체가 만들어내는 적요함에 눈을 두고 있다면 류재웅은 어떤 형태이든 인간이 그 곳에 있다는, 그 인간의 체취가 어떻게 베여있는 지를 확인하려 한다.
눈이 쌓인 산골 집들, 낡고 오래된 토벽과 지 붕들, 눈에 쌓인 시골길 풍경은 살갑다. 잔설과 자갈돌과, 척박한 토질이 드러나는 경사 급한 산골 마을 표정은 팍팍한 현장이지만 그 사이로 붉은 슬레이트 지붕과 집을 둘러싼 나무 몇 그루, 주변의 흙에 대한 촉감은 집 뒤 언덕을 따라 넘어가는 길에서 그 급함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다. <강원도 무건> 마을의 표정에서 그런 특징을 더 잘 읽을 수 있다. 이 구성적인 방법이 그의 작품에서 얻어지는 안온함 혹은 친근함의 정체일 수 있다. 말하자면 산이 전체를 안고, 길을 따라 사선의 지형이 급하게 아래로 내닿고 완만한 길이 이 경사를 견제하면서 독가촌의 드문드문한 집들을 방점으로 남겨 급한 숨을 돌리게 한다.
그는 그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드러내려 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실재를 재현하려는 사실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눈보다 타자에 대한 이력을 읽으려 한다. 그리고 그를 드러내려 한다. 새삼 "세잔느의 풍경화는 미술가와 자연간의 대화가 낳은 산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는 타자에 귀기우릴 수 있는 능력, 즉 기꺼이 타자로 하여금 그 자체이게끔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미술은 단지 타자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 따름이다." 라는 말을 새겨보게 한다.

이인철/ 마치 사이보그 전사들의 행진 같은 장면이다. 인격이 없는 것들이라 인체를 닮았지만 옷을 입히거나 전사로서 치장이 필요치 않다. 기능을 가진 물품이나 무기를 전장에 투입하듯 그들은 발가벗긴 채 총 하나를 들고 어딘가로 행진해 가게 한다. 전장의 먹구름은 짙게 깔려 있고, 전차의 포신을 옆에 하고 이열종대로 앞을 향해 간다. 회색톤의 색상은 무기의 효과를 내는데 효과적이고 사이보그 병사들의 색상과 일체화를 이루며 한껏 고조된 전장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딘가 전장 같다는 인상보다 영화의 장면이거나 만들어진 장면, 혹은 삽화 같다는 인상을 준다. 사이보그라는 이 인물들의 등장이 전장의 다급하고 시급함, 황폐함보다 전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을 가지게 한 것이다. 전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그것은 주체인 나는 전장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고, 전장의 폭력으로부터 다행스럽게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다르지 않다.
그 안도감이야말로 전쟁을 전쟁으로 읽게 한다. 전장의 한 복판에 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복판에는 나와 무관한 혹은 나를 대신하는 것들이 그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장에 대한 인류의 바램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때문에 더 많은 폭력과 황폐함과 파괴에 대해 무관하고, 무책임하고, 때로는 폭력을 조장하고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신학철/ 신학철의 화면에 등장하는 개별 요소들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여 있는 형상은 전혀 현실 논리를 가질 수 없는 콜라주 된 장면으로 기괴한 형상이다. 그러나 그 전체를 다시 보면 우리 현실에 대한 사실적 상황, 정황을 어느 작품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개별적 현실을 모아서 현실 논리를 잃고, 잃어버린 현실 논리 위에 다시 현실을 전달하는 이 논리는 우연과 잡다와 우발성의 현실에서 비현실이 논리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비현실과 비현실 같은 현실의 문제를 열어준다. "그것이 주는 감동의 근본에는 범속하고 초라한 현실의 삶을 넘어서려는 또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초월적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김우창 사유의 공간 그런 면에서 그의 현대사회의 독해와 시니컬한 어법과 전체화에 매몰되어 있는 당대의 이념적 경직성과 우민적인 계몽과 억압에 대해 우리가 가질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문학은 원초적 체험의 구체적 실감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한 사회가 추상화, 전체화 속에서 고착되는 것을 견제해준다.” 김우창 사유의 공간 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당대적 상황이나 권력 억압에 대해 대항적이기는 하지만 도리어 우리사회가 가진 천박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언술이라 본다.
그의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그 의미들이 공유되고 있다. 다급한 현실상황에 대한 격렬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우리 삶의 근저를 이루는 왜곡된 세계관에 대한 대립이다. 그의 형식은 기존 그리기 형식에 대한 반발이고, 잘 정리된 현실상에 대한 부정이다. 콜라주와 몽타주 기법은 그에게 필연적인 선택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법 채용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반영에 대한 분명한 자각의 결과이다. 그것은 실재를 표현하는 형식의 획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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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da 2005-05-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재호의 청운동기념비 I 가 인상적이었다. 한지에 혼합재료... 청와대부근의 쟁쟁했던 아파트의 이제는 낡은 모습..
신학철의 로이 리히텐슈타인 판 씨니컬한 비판은 공감과 재미를 함께~ 가장 미국적이며 한국적인 단언적 태도.. 인상적이었다.

s0da 2005-05-0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김수영 작품. 전시되어 있는 갤러리에서 시종 눈물이 남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만든지 얼마되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테잎으로 떼어낸 일괄적인 작업들이 눈에 가시가 되었다는 지인의 얘기도 들었다...
 
 전출처 : poptrash > two thumbs up!
고양이 요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커트 보네거트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물론 블랙유머, 풍자, 아이러니,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등등의 틀에박힌 수식어구를 갖다 댄다면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그 고리타분함 만큼이나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과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수만 광년쯤. 그래도 굳이 말을 해야한다면, '우주적 농담을 가장 잘 이해(구사)하는 작가' 정도가 어떨까. 물론 이런 표현도 달과 지구만큼이나 떨어져 있긴 하지만.
꼭 반년을 기다렸다. 내가 갈라파고스를 읽은게 지난 2월 4일이니까. 책 안쪽에 떡하니 근간이라고 써있는 고양이요람, 제5도살장 등을 보고 이제 곧 나오겠거니 기다린게 어느덧 반년이란 말이다. 홈페이지에 글도 썼고(답은 없었다) 이메일도 쓰고(답은 없었다) 출판사에 전화도 하면서 지내온 반년. 안그래도 역자는 책 뒤쪽에 "협박과 항의와 애원과 호소의 전화와 이메일 참 많이도 받았습니다."라고 적고 있으니, 헛 일만은 아니었지 싶다. 사실 커트 보네거트의 팬은 보이지 않을 뿐이지, 아주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커트 보네거트는 여전하다. 그는 여전히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블랙 유머를 구사하며 이 세계를 풍자한다. 특히나 이번에는 '보코논교'라는 가상의 종교까지 창조해내어 더욱 더 깊어진 '우주적 농담의 세계'를 보여준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다. 일단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의 입담에, 자칫 산만한 여러 이야기의 줄기를 기가막히게 한 곳으로 이끌어가는 그의 솜씨에 책을 덮을 수 없다. 그것을 더욱 빛내주는 것은 매끄러운 번역이다. 읽는데 전혀 거슬림이 없이 작품에 그대로 몰입하게 해주는 번역이 아주 좋다. 역자에게도 아마 '협박과 항의와 애원과 호소의 전화와 이메일'의 압박이 많이 작용한 모양이다.
사실 진짜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촌스러운 사람인 나로써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욕망과, 그것의 좌절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할 수 있을 뿐이다. 안타까움이 혈관을 훑고 지나간다. 두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지만, 인간에겐 단지 엄지 손가락이 두 개 뿐임을 원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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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mila > 훌륭한 책, 하지만 책값이 이렇게 비싼 이유는....
명화의 비밀 - 호크니가 파헤친 거장들의 비법
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남경태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알라딘에 들어와보니 인기 검색어 리스트에 '명화의 비밀'이 올라와 있다. 흠..역시 TV의 힘은 막강하군. 아마도 며칠전 KBS에서 방영된 책 프로그램에서 이 책이 다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몇편 안되는 리뷰의 숫자. 더더욱 막강한 '책값의 힘'을 느낀다. 6만원짜리 책을(알라딘에선 54000원이지만^^) 선뜻 사기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닐테니... '가격대비 만족도' 중심의 리뷰를 써야겠다는 책무를 팍팍 느낀다.

나 역시 굉장히 속이 쓰려오는 걸 느끼며 책을 구매했다. 하지만, 오직 '저자가 데이비드 호크니'이기에 경제적 제약을 감수하고 이 책을 샀다. 그림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데이비드 호크니가 젊은 시절 그렸던 '캘리포니아 수영장' 시리즈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들이기 때문이다. 그림들에서 받은 인상만으로 따지자면 (내 상상 속) 말년의 호크니는 거듭된 마약 재활치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정신 못차리고 지냈어야 했다. (에이즈로 이미 숨지지 않았으면 다행이고.^^) 그의 한창 시절 그림들이 내눈엔 지독히 감각적이고 고독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만난 시골 서점주인같은 인상의 호크니는 나의 예상을 철저히 배반하고 있었다. 노년의 그는 학구적이고, 철저하고, 집요하며 또한 용감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론에 반대하는 미술학자들의 눈엔 무모한 인물이겠지만.) 수많은 과학적 물증을 무기로, 수백년간 감춰져 왔던 이른바 '업계 기밀'을 폭로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우리들이 존경해마지 않던 역사속의 수많은 화가들이 사실은 광학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쉽게 말하자면 눈으로 보고 그린게 아니라, 렌즈에 반사된 이미지를 베껴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크니는 이 사실 만으로 대가들의 예술성이 폄하되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건 내 능력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뭐라 말하지 않겠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가 제시하는 물증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가들이 광학을 이용했다는 문헌 자료들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의아함으로 남지만 (아무리 화가들 사이의 비밀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철저히 숨겨질 수가 있는걸까?) 호크니가 수집한 방대한 그림 자료들을 보다보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다시 '가격대비' 리뷰로 돌아가 말하자면, 바로 그 '증거물'들 때문에 이 책값이 비싸진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증거 그림들은 '큰' 그림으로 보아야, 그것도 아주 좋은 화질로 보아야만 더욱 더 설득력을 지닌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수많은 명화들을 순수화집처럼 선명한 상태에서 만나게 된다. 보는 눈이야 즐거워지지만, 그만큼 금전적인 댓가는 치루게 되는 셈이다. (출판사 입장에서 보자면, 이만큼의 책값을 책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쇄상태는 아주 훌륭하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되는 것은 단순히 '명화의 비밀'을 밝히느냐 마느냐 만은 아니다. 일단은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이 재미있다. 그리고, 미술사속에서 그림이(특히 초상화,정물화) 발전해가는 과정을 좀더 환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예전에 보던 관점과는 또다른 관점을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 실려있는 명화들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기준에 따라 증거물로 채택된 작품들이다. 특정 시대나 특정 화풍을 선호하는 독자들이라면, '내 맘에 들지도 않는 그림이 너무 많이 실려있는 화집'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구매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책을 읽은 후에 데이비드 호크니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독자들에게는 이 책을 서점에서 직접 보신후 구매를 판단하시길 권한다. 그런 다음에 인터넷에서 구매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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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GonG > 아우또노미아라는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아우또노미아 -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 아우또노미아총서 1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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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지금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아우또노미아라는 유령이”’라고 시작한다면 지나칠까? 결코 지나치지 않을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혼종적인 사상이 출현하여 ‘아우또노미아’라는 이름으로 논쟁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낳고 또 사람들의 활동, 운동, 그 생기 가득한 힘들과 결합되어 등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유령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조정환의 말마따나 ‘안또니오 네그리’라고 하는 칠순이 넘은 정열적인 사상가는 어떤 이에게는 아나키스트로, 어떤 이에게는 맑스주의자로, 또 어떤 이에게는 테러리스트로 이해되고 있다. 그 어느 표현도 안또니오 네그리의 진면목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그는 지금 ‘천 개의 얼굴’로 비쳐진다. '어떤' 거울들에 말이다.

‘유령’이라 함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또니오 네그리는 제대로 이해되지도 못했다. 아우또노미아 라는 혼종적이고 복수적인 사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은 일종의 ‘선언’일까? 이 책의 제목을 단순히 ‘아우또노미아’라고 한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의 ‘선언’처럼 들린다. 1848년에 출간된 어떤 ‘선언’ Manifesto 의 출간이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이 책의 출간 역시 하나의 ‘사건’이다.

올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이화여대에서 '맑스 코뮤날레'가 열렸을 때, 누구도 한국의 구좌파 교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음에도 공공연하게 아나키즘을 공격하고, 들뢰즈를 비판하고,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비판했다. 마치 안또니오 네그리가 한국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모두가 ‘유령’에 대한 제각기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10여 년이 넘게 아우또노미아, 그리고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 조정환이 내놓은 이 책은 둘러말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전면적으로 다룬다. 거울을 치우고 그를 그로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은 네그리에 대한 연구서이기도 하면서, 아우또노미아 사상, 그리고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입문서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우또노미아’를 다룬 책이라고 한다.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아우또노미아’ Autonomia 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탈리아어로 ‘자율’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아우또노미아 운동에 대해 그 내용에 대해 가치론, 계급구성론, 사회편성론, 제국론, 국가론, 코뮤니즘론, 조직론 등의 측면에서 다룬다.

최근 들뢰즈, 가따리의 책이 한국에 많이 소개가 되면서 스피노자, 네그리, 하트 역시 함께 읽혀졌다. 그것은 스피노자-맑스-들뢰즈-가따리의 계열 속에서 '네그리'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특이성보다는 다른 사상가들과의 연속성만이 강조될 위험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 네그리는 아직 제대로 '소개', '이해'조차 되지 못했고, 따라서 '오해'의 소지는 매우 컸다. 이러한 때에 조정환의 새 책은 네그리의 사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반갑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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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chelle > 요시다 슈이치
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열림원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침대에 누워 편하게 몇 장을 넘기다 아...이거야. 이런 느낌이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야라고 절실히 느끼며 오랜만에 별 4개짜리를 찾았다.  즉시 요시다 슈이치의 모든 작품을 보관함에 옮겨담았다. 점심을 공원에서 먹는 직장인과 연상의 여자가 플롯의 핵심인데 그보다는 공원을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과 묘사가 좋다.
>> 리딩포인트 : 파크라이프를 즐기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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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뽀스 2005-04-19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크라이프를 꿈꾸는 사람 여기 또 있다! 참 기분좋게 읽었던 책
(역시 우린 취향이 비슷해 ^^)

s0da 2005-04-1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뽀스가 강추를 하니 읽어보도록 함세~

DJ뽀스 2005-04-1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나는 니가 쓴 리뷴줄 알았넹. 깔끔허니 괜찮다. 읽어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