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수잔 벅 모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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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글과 생각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영화나 문학을 공부하자면 으레 한번쯤 벤야민의 생각과 마주치게 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나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프', 그리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등등의 모노그래프를 읽지 않은 이는 거의 없으리라. 번역된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벤야민의 글쓰기는 미묘한 구석이 적지 않다. 하나의 테마 안에 이질적인 사상들이 무수히 배태되어 있다. 그래서 한 편의 글로 통하는 입구도 그만큼 다양하다. '현대성' 논의에서 벤야민이 차지하는 특출한 위상은 그의 비극적인 생을 두고 볼 때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생전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으되 안정감 있게 사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벤야민. (벤야민의 개인적 삶이 어떠했는가를 보고싶다면 <한 우정의 역사>(한길사)라는 서간집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의 대학교수 지원은 그 논문(<독일 비극의 원천>)의 난해성으로 철회되었다. 생전에 직접 단행본으로 묶은 책도 많지 않다. 그는 오히려 라디오방송대본, 잡지기사,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관지 '사회연구소' 등에 발표한 단평, 잡문을 통해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다듬어갔다. 알레고리에 대한 천착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독일 비극의 원천>, <일반통행로> 등의 저작들은 지금 국내 출판사들이 번역중이다.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핵심저작으로 알려진 <파사주>에 관한 해설서다. 엄밀히 말해 <파사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본은 벤야민 자신이 세운 야심적인 프로젝트(그래서 "아케이트 프로젝트"라 부르기도 하는 것)을 위한 메모뭉치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미완성 유고(遺稿)의 치밀한 연구로, 벅모스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 <파사주>가 만일 벤야민의 손에서 태어났다면 어떠한 모습이었을지 그 밑그림을 그려준다. 이 해설서 또한 야심적이라 할 수 있다. <파사주>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은 롤프 티데만이란 벤야민 연구자의 공적이었고, 또한 그것은 독일 주어캄프란 출판사의 기획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공저작권(public domain)이 성립되지 않고 <파사주>의 저작권은 주어캄프에 귀속되어 있다. 

<파사주>의 국내 번역은 파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되긴 했지만. 저작권 확인과 번역자 선정 등의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주어캄프 출판사에서도 아주 애매한 태도를 보여 국내 출판사들 사이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편히 책을 읽지만 하나의 책을 두고 벌어지는 일은 가위 첩보전 양상을 띤다. 대승적인 관점에서 이런 치졸한 문제점을 잊고 싶다. 다만 책임있는 번역자, 국내 벤야민 연구의 권위자가 <파사주>의 번역에서 배제되는 불상사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분명히 인맥과 명성, 보신주의나 업적주의에 이 흥미로운 책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벤야민을 번역 중인 출판사들이 이 책을 상업적인 소득원으로 이용할 리는 만무할 테니 책임 있는 처사를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럼 잠깐 이 책에 관해 말하도록 하자. 해설서를 굳이 해설하고픈 마음은 없으니 짧게 쓰자. '읽을 만하다!' 풍부한 도판과 벤야민의 <파사주>에 관한 서지학적 정보가 매우 충실히 담겨 있고, 번역의 상태도 아주 좋다. 책값도 싸다. 다른 출판사에서라면 이 정도의 분량에 이 정도의 값을 매기지 않는다. 김정아라는 번역자의 능력이 만만해보이지 않는다. 벤야민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책이다. 문화사적인 테마에 몰두했던 벤야민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요 정도만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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