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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밝은 밤』
최은영 장편소설
문학동네

💬
글을 읽으면 지연이의 현재와 과거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주인공 이지연은 할머니로부터 과거 일제시대 증조모이야기를 듣고 현재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교차하며 소설은 진행된다. 결혼한 여성의 감정을 정말 잘 묘사했다.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았나 싶을 정도로 나의 일기장 속 이야기같이 감정들이 공감되었고 책 페이지를 넘겨갈 때마다 내 속안을 한바퀴 휘젓고 지나간듯 요동쳤다.
잊고 있었던 나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내가 사회에 적응하고 견디고 경쟁에 치일동안 과거를 회상하며 천천히 흘러가는 그 시간들을 체념한 듯 집에서 홀로 외롭게 있었던 나의 할머니의 기억이.
이렇게 소설 속에서 만난 할머니도 여자였고, 엄마였고 청춘을 살아왔었다는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쇠약해져가는 모습을 보며 돌아서기보다 나와 닮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살갑게 대했더라면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을텐데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움이면서도 동시에 미안했다.
눈물이 계속 났던 이유는 책속의 여자들처럼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때문인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알았기 때문인지 외로움과 평생을 싸워야했던 그들에게 서로가 있었듯 나에게도 서로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내가 밀어내고 봐주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구 명숙할머니 집에서 함께 증조모, 새비아주머니, 희자, 영옥이 이렇게 여자만 모여 살며 큰 소리로 웃던 장면과 새비아주머니가 희령으로 찾아와 증조모와 바다에 함께 가서 공놀이하는 장면은 행복해 보였다. 그 잠시밖에 누릴 수 없다는 행복을 알아서 였을까 웃음으로 서로의 기억에 행복으로 기억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가슴이 아팠다. 서로 편지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자신의 속내를 적으며 한풀이하기도 했다. 그런 과거와 현재의 엄마와 딸 사이의 감정들에 대해 생각만 했던 일들을 글을 읽고 보니 나는 그동안 엄마에 대해 많이 몰랐었구나 싶다. 당장의 변화될 수 없겠지만 엄마와 딸이기에 그냥 지나쳤던 것,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해보고 경계를 긋고 멀리하기보다 조금 더 다가가는 것부터 해보아야겠다.
삼천이와 새비아주머니, 희자와 영옥이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지연이가 회복되었던 것처럼 나도 『밝은 밤』으로 내 가슴 속의 일부가 다독여진 것 같아 너무 좋았다.
📖 책 속 밑줄긋기
희령에 도착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할머니에게 마음을 열었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아니까. 이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돌보려 하는지. P10
흰빛이 사람을 압도하고 두렵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한번은 폭설이 그친 무렵, 눈 덮인 논가 국도를 달리다가 가슴이 심하게 뛰고 숨쉬기가 어려워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워둔 적도 있었다. 마음의 보호대 같은 것이 부러진 기분이었다. 덜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가 사라진 것 같았다. P12
♥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P14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P17
이름 없는, 구체적인 형상도 없는, 엄마의 할머니로만 존재했던 사람이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와 금방이라도 내 앞에 나타날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의 증조할머니, 이정선. P49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P82
♥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내게 마음이 없는 배우자와 사는 고독에 대해서. 입을 다문 채 일을 하고, 껍데기뿐일지라도 유지되고 있었던 결혼생활을 굴려가면서,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에는 눈길을 주지 않아야 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논문이 잘 써지지 않으면 내 존재가 모두 부정되는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나를 다그치던 내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쉬듯 나를 비난하고 비웃던 내 모습이.
너는 너를 다그쳤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너에게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었다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을 거야. 아빠도 말했잖아. 넌 큰 사람이 될 수 없을 거라고. 남편도 얘기했지. 네가 이룬 모든 것은 운일 뿐이라고. 그러니 넌 더 단련되어야 해. 이런 취급에는 이미 익숙해졌잖아.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P85-86
5월의 새비에 따뜻한 바람이 불구, 내레 떨지 않구 희자 아바이 보내줬다. 땅이 녹아서 파기가 어렵지 않았더랬다. 내레 추울 때 가믄 땅이 얼어 심이 들 테 조금만 더 버텨보갔어. 기깟 걸 농이라고 하던 희자 아바이가 마음놓았을까. P127
♥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P130
♥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가 없는 사이가. P137
잘 사는 것이 복수라고, 보란듯이 잘 살면 된다고 말하는 응원의 목소리가 내 등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길에서 내 등을 후려치는 채찍이 되는 동안에. P156
♥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 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P156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은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P156
♥ ㅡ 내레 어릴 적에 소설 읽어주던 이들이 있었다이. 책방에서 『홍길동전』두 읽어주구 『사씨남정기』랑 『임진록』두 읽어주구. 내레 기걸 참 좋아했더랬어. 넋을 놓구선 이야기를 들었다이. 어마이가 이야기 좋아하믄 가난해진다고 해두 어쩔 수가 없었디. 기게 참 좋았더랬어.
그 말을 하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P186
♥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P299

어머니는 일평생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P333
♥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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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 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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