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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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2021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지되고, 300년이 지나 후손이 조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면 필시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었거나, 여전히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불이익이 생겨 침묵을 강요당한 것이 아닐까?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지된 사람은 조선 유학자 윤휴이다. 그의 후손은 300여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조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해도 어떤 후손은 조상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윤휴의 일생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300여 년 전에 사형당한 한 선비의 궤적을 추적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윤휴를 다시 보려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의 힘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윤휴의 일생을 추적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사로 연결된다.(14)

아무리 다른 당파라도 공작 정치로 무고한 남인들을 죽음으로 몬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서인들이 소론이 되고, 정치 공작을 옹호한 서인 중진들이 노론이 되었다. 이후에도 노론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 공작을 자행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 등이 주장한 것으로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노론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다. 그렇게 지금도 국사 교과서는 북벌의 자리에 윤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송시열의 이름을 올려놓았다.(396)


조선 시대 막강한 권력을 거머쥔 서인들에 맞선 유학자 윤휴. 서인은 주희의 해석이 절대적이라는 믿음으로 주희와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다. 반면 윤휴는 주희와의 다른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주희가 정리한 중용과 대학도 얼마든지 다르게 분류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목숨을 끊기에 이른다.


군주, 사대부, 백성으로 이어지는 신분제 사회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서인들과 군주와 백성만 있기에 사대부의 특권을 없애려는 청남의 대립은 서인들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일제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다.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우선했던 결과가 나라를 잃게 한 단초가 된 것 같아 씁쓸하다.


옛날 스승과 제자들도 묻고 대답하는 도리가 있었다. 옛날에 물은 것은 행하려고 묻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묻는 것은 단지 알려고만 하는 것이다.() 묻고 대답하는 데 있어 옛날과 지금이 다른 것이니, 스승과 제자들은 각자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73)


예론은 흔들리는 사회 질서를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이해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김장생, 송시열 등이 주희를 절대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희 성리학에는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절대시 할 수 있는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75~76)


<중용><대학>, <논어>, <맹자>와 더불어 사서라고 높여지지만 <논어>, <맹자>와 달리 고대부터 유학의 경전은 아니었다. <중용><대학>은 원래 <예기> 49편 중의 한 편씩이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따로 떼어내어 독립된 책으로 만들어 <논어>, <맹자>와 같은 사서의 반열에 올린 것이었다.(76)


서인들은 이율배반적이었다. 왕실에는 사가의 예법을 적용하면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은 더욱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서인들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심 이론으로 예론을 가져간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93)


윤휴는 선대 왕인 효종과 현종의 유지이기도 한 북벌을 주장한다. 당론으로 북벌을 주장하면서도 실제 실행에 옮기지 않는 서인들과 달리 윤휴는 제도를 정비하고 실력있는 무인을 뽑아 청을 선제 공격하자고 주장한다. 청의 남쪽에서 반란(삼번의 난)이 일어나고 있으니 삼번과 대만()과 협력하면 청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윤휴의 상소를 <대의소>라고 부르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대의는 북벌을 뜻했다. 윤휴의 대의소는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였다. 그것도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북벌하자는 상소였다. 지금까지 북벌은 서인의 당론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북벌을 주장하는 서인 실세는 아무도 없었다. 서인에게 북벌은 당의 선명성을 과시하는 구호에 불과했다. () 말로만 북벌을 내세워 조선국왕을 압박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군림하는 것이 서인의 당략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북벌 대의소를 올리자 자신들의 이중성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26)

때가 왔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도리어 어지러움을 당하게 되고 하늘이 주는데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時至不斷, 反受其亂, 天與不取, 反受其殃)”(54)(시지불단, 반수기란, 천여불취, 반수기앙)


윤휴는 조선 후기 사회의 병폐를 목도하며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지패법, 오가통법, 호포법을 정비해 민심을 바로잡아 북벌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지패법은 당시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을 달리 사용한 것을 모두 종이로 대체하자는 것이고, 오가통법은 행정단위를 정하는 것으로 신분의 구분 없이 주변의 다섯 가구를 묶어 한 통()으로 정하고, 다섯 개 통이 리(), 여러 개의 리는 면()으로, 여러 개의 면은 군현(郡縣)이 된다. 호포법은 지패법과 오가통법으로 확인된 16~60세 남성 모두에게 군납을 부과하자는 것이다. 당시 양반 사대부는 군포가 면제되고, 일반 백성은 죽은 사람과 아이에게도 군포를 물리고, 도망간 자의 군포를 이웃들에게 물리는 등 군포의 폐단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했다. 전체주의적 억압이 판치는 사회에서 고립된 윤휴에게 유일한 피안의 언덕은 학문이었다.(109)


법이나 정책이 백성들 중심으로 재정비되어야 했다. 일반 백성들이 사대부에 비해서 법적, 정책적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윤휴가 주창한 법이 지패법과 호포법이다.(197)


식구 수의 많고 적음과 재산의 빈부를 논하지 않고 다섯 집을 묶어 한 통을 만든다는 것이다. 빈자는 대부분 일반 백성이고 부자는 양반 사대부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이웃 다섯 집을 묶어서 한 통을 만든다는 방침은 획기적인 것이었다.(199)


양반 사대부들이 지배법에 반대한 이유는 반상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종이로 된 지패를 차고 다니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오가통법을 반대한 이유도 상민이 통수가 될 수 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지패법은 호포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지패법과 오가통법은 반드시 호포법과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패법과 오가통법은 시행하고 호포법은 연기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208)

호포법이란 모든 호가 군포, 즉 병역세를 납부하자는 법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까지의 남정들이 직접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 1년에 2필씩 군포를 납부했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는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209)


호포법을 시행하면 온 나라가 일어나서 원망할 것이란 말은 온 양반 사대부가 일어나서 원망할 것이라고 말하면 정확한 것이었다. 호포법을 시행하면 원망할 사람은 양반 사대부지 일반 백성들일리가 없기 때문이었다.(219)


사대부들은 윤휴가 주장한 지패법, 오가통법, 호포법을 반대했고, 숙종은 이들의 의견을 절충해 일부 시행했지만, 2~3년 후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적당히 타협한 반쪽짜리 개혁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켜 안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었다.


적당히 타협한 반쪽짜리 개혁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정치는 생물이라며 적당히 타협한 법과 제도가 시행하는 과정에서 전혀 효과가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할 때 적당히 타협한 법과 제도가 개혁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죽음의 외주화를 막자는 취지로 입법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적당히 타협하며 재해기업보호법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77786.html)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강력 처벌하기 위해 별도의 수사처를 만든다는 공수처법은 야당에 비토권을 주고 적당히 타협해 통과시켰지만, 타협의 산물인 야당 비토권으로 공식 출범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재차 법을 바꿔 공수처장을 임명했지만, ‘수사방해처란 비판을 받으며 아직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https://news.joins.com/article/24034530)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유배지로 가는 윤휴에게 피 묻은 버선을 갈아 신으라고 권하자거절하며 자손들에게 시대의 형세를 알지 못하면 우환이 닥친다는 점을 경계하도록 했다. 제 한 몸의 영화와 집안의 부귀만 힘쓰는 것이 시대의 형세이고, 백성의 등골을 뽑아 제 뱃속을 챙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북벌을 주장하고 사회적 폐단을 없애 개혁하자고 한 것이 우환이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된 오늘 날에 시대의 형세를 따라 망국의 길로 갈 것인지, 시대의 우환을 따라 사회적 병폐를 없애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 사회를 만들 것인가 묻는 것 같다.


(유배지로 가는 윤휴에게) 피 묻은 버선을 갈아 신으라고 권하자 윤휴가 거절했다. “그대로 두어라. 자손들 가운데 시대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시대의 우환을 범한 자에게 경계가 되게 하리라(可作子孫之不識世勢妄犯世患者之戒)(383)(가작자손지불식세세망범세환자지계)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집안의 부귀만 힘쓰는 것이 조선의 형세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북벌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한 것이었으며, 사대부들이 힘없는 백성들의 등골을 빼서 제 배를 채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으며, 입으로 주자학을 외우는 것으로 학문이 완성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안다는 말이냐!”라면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려고 했던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다. 주자학 절대주의 사상으로 가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다른 사상도 용인함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꾀하려 했던 것이 또한 시대의 우환이었다.(383~384)


술은 마셔야 맛을 제대로 느끼고, 말은 표현해야 뜻을 이룰 수 있다 생각했다. 말의 의도와 뜻이 분명하게 전달했어도 듣는 사람은 듣고 싶은대로 취사선택해 듣는다. 이해시키려 할수록 오해만 쌓인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가 더 맛있고, 말은 하지 않을 때가 더 뜻깊다는 윤휴의 탄식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개혁가의 후회와 좌절이 느껴지는 한편, 사고의 깊이를 더해 말과 행동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느껴진다.

술 마시는 맛이 술을 마시지 않는 맛보다 길지 못하다.飮之爲味 不若不飮之爲味長也
말을 하는 뜻이 말을 하지 않는 뜻보다 깊지 못하다.言之爲趣 不言之爲趣深也 (104~105)(음지위미 불약지음지위미장야 언지위취 부언지위취심야)


* 해당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았으며, 제 주관에 따라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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