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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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0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100페이지 가량으로 얇은 편이다. 하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공리주의가 무엇이다라고 명쾌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반론하는 것으로 공리주의 무엇인지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약한 근거에 대한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데, 역자는 작품 해설에서 밀이 살았던 시대의 관습, 관행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에세이처럼 읽지 말고, 적어도 세 번은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19세기 영국 문인들이 쓴 글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심심찮게 튀어나옵니다.()
라틴어식 수사법은 라틴어 명사의 격변화와 동사변화를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글 쓰는 사람이 언어 다루는 능력을 과시하도록 권장합니다.
또 그 글쓰기는 웅변이나 논변이 주종이었으므로,
그 글을 읽는 사람의 반박을 미리 예상하면서 양보 구문이나

우회 구문을 많이 집어넣는 것이 특징입니다.(176)



공리주의라는 단어에서 공리는 공공의 이익으로 짐작되었는데, ‘어떤 행위에 의해 얻어지는 공명과 이익, 혹은 철학적으로 다른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역자는 밀의 주장이 공리를 통하여 행복으로 가기 때문에, 공리주의를 행복주의로, 공리를 행복으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이야기한다.


 

공리주의하면 떠오른 말이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인데, 벤담의 제자인 밀은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고 한다.


 

우선 공리주의는 행복이 인간 행동의 으뜸 원칙이고, 개인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보다 우위에 놓는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옳은 행동이 되며,
만약 불행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른 행동이 된다.(21)


 

정신적 쾌락, 정서와 상상의 쾌락, 도덕 감정의 쾌락은
감각적 쾌락보다는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에피쿠로스의 인생 이론은 그런 맥락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아, 공리주의 저술가들은 신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더 우위에 놓는다.(24)


 

공리 혹은 행복이 인간 행동의 으뜸 원칙()
공리주의적 기준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행위자 자신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최대 행복이기 때문이다.(30)


 

<최대 행복의 원리>에 의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욕망하게 만드는
궁극적 목적은 가능한 한 고통에서 면제되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즐거운 일이 많은 인생을 누리자는 것이다.(
)
인간 행위의 목적이 되는 행복이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행복은 인간 행위의 규칙이요 원칙으로 정의될 수 있다.(31)


 

공리주의도 다른 도덕 사상과 마찬가지로 제재를 제시하는데, 포상과 징벌이라는 외부적 제재와 양심이라는 내부적 제재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내부 제재와 외부 제재가 절충함으로써 사회적 일체감 형성하고, 공리는 사회적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외부적 제제()() 혜택에 대한 희망과 불쾌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애정,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외경심 등도 외부적 제제이다.(61)


 

공리주의의 기준에서 볼 때 제제란()
인류의 양심적 느낌(이다.)(63)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진 피해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저항하고, 보복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는 그 자신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며,
이런 행위를 접하면 자기 방어의 본능이 즉각 발동된다.(102)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자기 잘못도 없는데 열등한 지위로 몰린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막아야 한다.
그 사람은 우수한 능력 덕분에 이미 충분한 이점을 누렸다.
남들의 존경을 받았고, 개인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런 대접에 따르는 내적 만족감을 느꼈다.
이 세상의 재물을 남보다 더 많이 누리지 않는다 해도
이미 이런 보상을 누리는 것이다.(113)


 

밀은 <공리주의>에서 인간 사회가 발전하면 가난은 완전히 퇴치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너무 낙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 가난이 퇴치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밀이 전제한 사회 구성원들의 양식과 배려가 적절히 결합되지 못한 것이 원인일 듯도 하다. 법과 정부가 없을 때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경제력의 불균형으로 초래될 현상을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인간의 계약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공정 중 어느 것을 중요시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해악은 없앨 수 있으며,
인간 사회가 계속 발전한다면 통제 가능한 범위로 축소시킬 수 있다.
고통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가난은 사회의 지혜에 의하여
완전히 퇴치될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양식과 배려가 적절히 결합되기만 한다면 말이다.(36~37)


 

부자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법률이나 정부가 없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자들보다 그들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그 가진 돈의 힘으로
가난한 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115)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에 처해 있으며, 기후재난으로 6번째 대멸종을 예견하며, 앞으로의 10년이 지구를 지킬 마지막 기회라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야기하듯 지구라는 공동의 집을 지키기 위해 전 인류가 개인 보다는 인류를 생각하는 공리주의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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