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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평점 :
<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백수련,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지음, 다산책방, 2020
<나의 할머니에게>는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여섯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여섯 명의 작가는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가상의 할머니를 통해 공기처럼 무감각하게 녹아 있는 기억 속의 할머니
또는 기억 밖의 할머니를 끄집어 낸다.
나는 어린시절에 외가와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할머니’하면 외할머니가 먼저 떠오른다. 자그마한 체구에 곱게 빗어 넘긴 단정한
머리를 고수하셨던, 등이 굽고 주름이 많던 할머니.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외모는 선명히 기억되는 것에 비해 할머니가 살아온 생애는 기억하는 바가 별로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억도 어머니가 전해주신 이야기이고 할머니를 통해 직접 들은 것은 거의 없다.
<흑설탕 캔디>는
소설집의 두 번째 단편으로 자식과 손자를 위해 노년의 자유로운 삶을 포기해야 했던 할머니의 로맨스를 기록과 기억으로 엮어낸 소설이다.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70쪽)
사별한 아들이 파리의 주재원으로 근무하게 되어 손자를 돌보기 위해 따라나선 타지에서의 생활. 아들 가족이 파리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 고군분투하는 동안 할머니는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을 공유할 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할머니의 사랑은 가족들에게 관심 밖의 일이었고 노년의 로맨스는 결말없이 끝을 맺는다.
젊음이 무한할거라 여겼던 시절. 가끔이지만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 속에 무심히 흘러간시간이 아쉬워 진다.
<흑설탕 캔디>를
읽고 우리 할머니의 로맨스가 궁금해 진 것처럼 다른 다섯편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할머니’로 대변되는 노년의 삶을 내 경험에 비추어 되돌아 보거나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집이
주는 즐거움이다. 또한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여섯 명의 할머니가 겪은 노년의 삶에 내
노년의 삶을 대입해 보게 된다.
수년 째 아버지의 제사에도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에 서운하지만 그들의 할머니가 되고 싶은 <어제 꾼 꿈>의 감수성 풍부한 할머니. 손녀에게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주었지만 이제 손녀의 얼굴도 기억 못하는 <선베드>의 치매 걸린 할머니, 단명할 운명을 타고난 남편과 아들을 두었지만
종국에는 부잣집 며느리로서 가부장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위대한 유산>의 할머니, 몇 십년 후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워진 대상으로 절락한
노인이 안락사를 위해 가족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아리아드네의 정원>의 할머니 등. 때로는 현실감 있게, 어쩌면 처절하게 다가올 지 모를 내 노년의
삶을 조금은 대범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면 소설을 통해 접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다.
자연스레 세월에 용해되어
지평선 아래로 잠기는 붉은 태양처럼 말이다. (210쪽)
늙어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220쪽)
나의 노년은 부디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 속에 ‘지평선 아래로 잠기는 붉은 태양처럼’ 자연스럽게 마무리 되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