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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시대의 탄생 - 1980년대의 시간정치
김학선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평점 :
『24시간 시대의 탄생』,
김학선 지음, 창비, 2020.
세슘
원자(133-55Cs)가 흡수하는 전자기파가 9,192,631,770번
진동하는데 걸리는 시간.
1초.
왜
이렇게 복잡하게 정의해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루를 24시간으로, 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누는 규칙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12진법과 60진법을 사용하던 문명에 의해 정해졌다고 하는데, 어쨌든 지금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절대적인 시간이 되었다.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의적이란 생각이 든다.
흔히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시간’이라고 한다. 부자든 가난한자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으로
똑같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럴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시민이 시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시간은
통치자의 것이었다.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통치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를 시도하는 것은 역모였다.
한 국가의 표준시는 국민의 생체리듬에 맞아야 하고,
혼란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세계협정시(UTC)와의 시간 환산이 용이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표준시는 학문적 연구나 국민적 합의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과 정권의 변동에 의해 영향을 받곤 했다.(176쪽)
국경일, 법정기념일 제도는 근대적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시간이라는 차원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국가와 국민의 일체감을 기념하고 상징화하는 기제이다.(195쪽)
국경일은 법률로 제정되는 데 비해
법정공휴일은 대통령령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법정공휴일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지도자의 통치철학과
정권의 필요에 의해 변화를 보여왔다.
그런데 명절의 경우는 일관되게
근대적 국민국가의 시간제도인 법정공휴일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지 못했다.(200쪽)
전제군주국이
아닌 대한민국에서는 건국부터 지금까지 시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살았을까? 이 의문을 풀어줄
책이 <24시간 시대의 탄생>이다. 대한민국 70여 년의 역사에서 24시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진 것은 불과 4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권력을 가진 통치자에 의해 시간은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고 이야기한다.
야행통행금지 시간부터 표준시, 국경일까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이 어떻게 정해졌고,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시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시간 빈곤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게으름이나 나태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시간과 돈의 구조적 연결에 기인한 것이다.(23쪽)
1981년 9월 30일에 1988년 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결정된 이후,
야간통행금지제도의 해제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1월 5일 자정부로
대한민국 사회는 야간통행의 자유를 얻어 하루 24시간을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42쪽)
야간통행금지 해제 초기에는 심야시간 네시간에 대한 규제가 사라짐으로 인해
그만큼 여유시간과 자유시간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망과 달랐다.
노동자들의 자유시간은 ‘조국 선진화’에 동원되거나
소비 열풍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자유시간은 입시를 위한 경쟁의 시간에 잠식되었다.(60쪽)
심야 활동시간에 대한 제약이 없어지자 야간통금 해제 이전보다
야근, 야간자율학습 등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야간통금 해제 이전에는 대부분의 노동이 자정 이전에 끝나야 했기 때문에
불가능했던 심야작업과 철야근무 등도 가능해졌다.
즉 24시간 멈추지 않고 2교대나 3교대로 작업이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61쪽)
1980년대에 극장에서의 애국가 상영, 국기에 대한 맹세, 국기
하강식은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하는 것을 국가에 대한 충성과 등치시키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현 정권에 대한 동의나 협력과
동일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제였다.
이렇게 애국심을 강제하는 국기하강식 등은 신군부 정권이
개방과 자율을 표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강화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103쪽)
1980년대에 일상적으로 요구되었던,
애국심을 표현하는 시간으로서의 국기하강식은 그 획일성과 의례성 때문에
정부에서 불허하는 시위를 할 때 시위의 시작시간을 정하는 데 활용되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 시위의 시작시간은
국기하강ㅇ식이 있는 오후 6시로 정해지곤 했다.(111쪽)
당시 텔레비전 방송은 소위 ‘땡전뉴스’라고 지칭될 만큼
뉴스시간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일정 장면을 주기적으로 안방에 전달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을 ‘새 시대’의 정치지도자로 각인되게
했다.(…)
당시 시청자들은 공영방송체제에서 상업광고가 계속되고
일명 ‘땡전 뉴스’라고 칭해지는 뉴스프로그램의
보도양태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했는데, 그 방법은 시청료 거부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86년에 이르러서는 범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면서
야당재야시민단체 등이 협력해서
전국민운동이 되었다.(163~165쪽)
흑백텔레비전 시기에는 수신료가 800원이었지만
컬러방송이 시작되면서
컬러TV 수신료로 2500원이 부과되었다.
이전과 비교해서 3배가 넘는 수신료였지만 초기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하지만 신군부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해 공영방송의 편파성이 심해지고
수신료 징수에도 불구하고 상업광고를 계속하는 것에 대해
시청자들은 수신료를 내지 않는 방법으로 항의(…)
시청자들은 ‘수신료’를 ‘시청료’라고 명명하고
KBS 시청을 거부했다.
이로써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건전성은
수신료를 받기 위해 필요조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166쪽)
1988년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청문회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다.(…)
첫 국회청문회는 5공 청문회였다.
처음에는 녹화방송이었는데 이후 생중계로 바뀌면서 시청률이 62%까지 치솟았다.
이 청문회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주목은 서울올림픽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169쪽)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이 1982년. 그 이후에는 TV, 라디오 등 언론통제를 통해 24시간을 동원했다고 한다. ‘땡전뉴스’. TV 뉴스 시보가 “땡”하고 울리면 “전두환 각하께서는”으로
시작하는 뉴스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언론이 부르는 용비어천가이다.
80년대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기레기’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4035003
https://www.youtube.com/watch?v=jrO6ix3Px8M
https://www.youtube.com/watch?v=8TGPsqT0zL8
https://www.youtube.com/watch?v=N-ME8dkhLSI
‘5공 시절’의 옛일이라고 웃어넘기기 쉽지
않다. 현재의 언론 구조라면 언제든 정권을 향한 ‘용비어천가’는 또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하다. 또한 1989년 TV를 통해 외친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고, 아니 보다 더 심해졌으니 과연 우리 사회는 진일보하고 있는 것인가 싶다.
탈주범 중 한명인 지강헌이 텔레비전 생중계를 요구했고,
방송사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탈주범들의 인질극을
일요일 아침시간에 각 가정의 안방으로 생중계했다.
그때 지강헌이 한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였다.
그 전해에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 비리로 인해
70억원대의 횡령과 탈세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는데,
지강헌은 500여만원을 훔친 죄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었다.(…)
5공 비리와 올림픽 이후 심화된 사회 양극화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