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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평점 :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현대지성, 2020.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구빈원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올리버 트위스트가 구빈원에서의 생활과 이후 이어진 도제 생활, 그리고 런던의 빈민가에서 소매치기 일당과 지내는 가운데 선량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출생의 비밀을 밝혀내는
소설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올리버 트위스트 뿐만 아니라, 도둑과 장물아비, 소매치기, 매춘부 등 하층민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찰스
디킨스는 서문에서 당시의 문학작품에서 하층민의 삶이 미화되거나 영웅적으로 그려지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올리버 트위스트>를 썼으며, ‘최상류층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밑바닥의 삶에서’ 도덕적인 목적을 위한 소재를 얻고자 했다고 밝혔다.
비록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귀에 거슬리기는 하겠지만,
왜 찌꺼기 같은 밑바닥 삶에서는,
적어도 거품과 크림 같은 최상류층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목적을 위한 소재를 얻을 수 없는 것인지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다.(저자서문)
올리버 트위스트가 태어난 Workhouse는 우리말로 ‘생활 능력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여 구호하는 공적/사적인
시설’(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하는 ‘구빈원’으로 번역되지만, 이는
의미와 성격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고,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직업 능력을 배양하는 시설이라기 보다는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대가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죄악시하여, 고아나
부랑자들을 구빈원에 구금하여 노동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가혹한 노동조건과 부실한 음식과 수면시간
등으로 구빈원의 밖에서든, 안에서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은 지켜질 수 없었다.
찰스 디킨스는 이러한 모습을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구빈원과 귀족, 상류층의 인식들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누렇게 변색된 낡은 무명옷을 입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는
한순간에 계급이 결정되어 낙인찍혀 버렸다.
교구의 아이, 즉 구빈원의 고아로, 늘 배를
곯아 하릴없이
세파에 이리저리 시달리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경멸받지만
아무런 동정도 받지 못하는 인생으로 말이다.(22쪽)
이 이사회(구빈원)의 신사들은 아주 현명하고 깊은 철학을 지닌 분들로,
구빈원에 관심을 두게 되자 단번에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빈원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빈원은 공공오락을 제공하고
공짜 술집이자 1년 내내 아침, 점심, 저녁, 차를 얻어먹는 곳이니,
놀고먹기만 하고 일하지는 않는 벽돌과 회반죽으로 지은 낙원과도 같았다.(33쪽)
이 광경을, 배 속에서는 고기와
술이 썩어나고
얼음 같은 피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철학자들이 좀 보았으면 싶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개도 거들떠보지 않을 진수성찬에 달라붙어
개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말이다.
허기로 잔뜩 독이 오른 올리버가 고기뼈를 갈기갈기 찌어내듯 뜯어먹는
끔찍한 탐욕의 광경을 직접 목도하면 그 감상이 어떠할까?
이보다 더 바라는 소원이 딱 하나 있다면
그 철학자도 똑 같은 음식을 올리버와 똑같이 탐욕스럽게 먹는 것이다.(59쪽)
마누라 살려보겠다고 길에서 구걸을 했더니 날 감옥에 가두더군.
돌아와 보니 죽어가고 있었어.
내 심장에 있는 피가 다 말라버렸지.
그 놈들이 내 마누라를 굶겨 죽인 거야.
하느님이 이 모든 걸 다 지켜보셨어.
그 하느님 앞에 맹세하는데, 그놈들이 굶겨 죽였다!”(71~72쪽)
“부인이 너무 잘 먹인 탓이지요.
저 녀석의 처지에 전혀 맞지 않는 대접으로 인해 기운이 넘치게 된 겁니다.(…)
도대체 극빈자 놈들이 기운이 넘쳐서 뭐에 쓰겠어요.
그저 몸뚱어리나 부지하면 그만일 텐데.
저 녀석한테 죽이나 먹였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겁니다.”(86쪽)
<올리버 트위스트>는
성장 소설이기도 하지만, 당시 영국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풍자소설이기도 하며, 선과 악의 대결 구도에서 선이 승리하고, 악은 반드시 패배하는 권선징악
스토리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이 이어지고, 올리버 트위스트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조각들을 찾아가며 반전의 과정은 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글의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영국의 만화가 조지 크룩생크(1792~1878)의
삽화는 소설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장면을 이해하고 몰입하는데 도움이 된다.
찰스 디킨스가 당시 목도한 상류층의 위선과 하층민의 절박한 삶 속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은 시대를 넘어
현재에도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이 성숙되었는지 묻는 듯하다. 또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수단으로써 노동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 상황에서 노동을 전제로한 복지제공이 빈민 구제를 위한 유일한 혹은 유효한 수단인지 묻는 듯하다.
동네 가게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길거리에서 노아를 보면
‘거지새끼’처럼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러대기 일쑤였다.(…)
이 고아는 가장 미천한 자조차도 손가락질하며 깔볼 수 있는 존재였다.
노아는 자기가 받은 모욕에 이자를 얹어서 실컷 되갚아주었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가장 훌륭한 귀족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자선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이 아름다운 본성은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65쪽)
만약 우리가 같은 종의 인간들을 억압하고 괴롭힐 때 단 한 번이라도,
인간의 잘못에 대한 어두운 증거들이 묵직한 먹구름처럼 느려도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 저승에서 복수의 비로
우리 머리 위에 쏟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또 우리가 단 한순간이라도 상상 속에서 어떤 권력이나 자만심으로도
없앨 수 없는 망자들의 깊은 증언을 듣는다면,
과연 나날이 이어지는 우리 일상에 상처와 불의, 고통과 비참함,
잔인함과 잘못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있으랴!(3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