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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마음 ㅣ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1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1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레모, 2019
<충실한 마음>은
저자 델핀 드 비강이 ‘개인과 또 가족과 혹은 사회와 연결된 다양한 현태의 충실함을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모습을 그리며’ 쓴 소설이라고 한다.
각각의 인물은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에게 충실함을 묻습니다.
가족, 집단,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 배우자, 어린 시절,
혹은 조금 더 젊었을 때 했던 다짐 같은 것에 대해 충실한지를 묻는 거지요.
충실함은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구성하며, 우리가
지키려 노력하는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충실함은 우리를 가두고, 우리를 가로막기도 합니다.(6쪽)
<충실한 마음>은
네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12살 테오와 마티스,
이들의 학교 선생님인 엘렌, 그리고 마티스의 어머니 세실이 그들이다. 네 명의 주인공이 돌아가며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화자는 3명인 점이 독특하다. 성인인 엘렌과 세실은 1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아이들인 테오와 마티스는 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들에게 있어 ‘충실한 마음’은 무엇일까?
충실한 마음이란 가족, 친구,
직장 등의 인간관계 안에서 맺어진 ‘무언의 약속’이나
어린 시절 했던 다짐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무언의 약속’이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말로 표현하지 않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감내하는 것으로 네 명의 주인공은 각자 이 ‘무언의 약속’, ‘충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중학생인 테오는 이혼한 부모님이 일주일씩 양육하는 상황에서 부모 각자가 자신을 건사하는 것도 힘겨워하는
상황에서 방치되어 제대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재결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 현상을 유지하고자하는 무언의 약속을 가지고 부모에게 자신이 잘 지내는 것처럼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테오는 이명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이 또한 현재의 현상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부모나 선생님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다. 이 선의의 거짓말이
테오가 가진 ‘무언의 약속’이고, 가족을 지키고,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충실한 마음’이다.
부모는 그의 존재를 잊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너무 어려 이해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견고하고 어딘지 모르게 역겨운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는 그 말들을 기억할 것이다.(33쪽)
어쩌면 뭔가를 바로잡거나 제대로 돌아가게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에,
이 모든게 자신에게 얼마나 버거운지 알기에,
그리고 자신이 그만큼 강하지 않음을 알기에,
어쩌면 그저 어둠 속에 앉아 의자 다리 사이로
두 다리를 흔들어대기만 할지도 모르겠다.(82쪽)
그는 엄마의 품으로 숨어들고 싶다.
생생한 엄마의 향기를 맡으며 진정하고 싶다.(…)
엄마는 그를 안아줄 수 없다. 엄마는(…) 그를 거북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만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별일 아니야. 잘될 거야. 아빠는 좋아질 거야.
내가 아빠를 도울 거야.(143~144쪽)
그는 뇌를 일종의 대기 모드 상태로 유지시키고 싶다. 무의식의 상태.
그에게만 들리는, 난데없이 밤에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벌건 대낮에도 들리는
그 날카로운 소리가 끝내 멈추기를 바란다.(…)
알코올성 혼수상태(…) 그는 이 단어들을 좋아한다.
그 소리를, 약속을 좋아한다.
그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이 사라지는 순간,
어김없이 지워지는 순간이라는 약속.(145~146쪽)
마티스는 중학교 첫날, 같은 반에 아는 학생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테오와 짝궁이 된 것을 계기로 친구가 된다. 놀이로 시작한 알코올에 테오가 집착하는 모습에 불안하지만
이 우정을 깨고 싶지 않아, 부모나 선생님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무언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 어울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회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말이 필요 없는 무언의 공동체.
추상적이고 일시적인, 하지만 서로가 알아볼 수 있는 신호들.
이런 걸 무엇이라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떨어지지 않는다.(51~52쪽)
마티스는 테오의 침묵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인상적인지 안다.(…)
그는 결코 싸움을 하거나, 누굴
위협하지도 않는다.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그를 향한 공격이나 비난을 막아준다.
그의 옆에서라면 마티스는 보호받는 느낌이다. 위험할 게 하나도 없다.(52쪽)
그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어렸을 때로,
플라스틱 조각들을 조립하며 시간을 보내 던때로(…)
그는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자신만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제안을 거절했을 터이다.(…)
테오가 모임을 거절하길 바랐다. 하지만
친구는 가겠다고 했고,
이미 계획까지 다 짜놓았다.(…)
마티스는 이 일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 집에
있고 싶다.
아무 얘기도 더 알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테오 혼자 그들과 있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184~187쪽)
테오와 마티스의 담임 선생님인 엘렌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된 이후로 아이들이 가정폭력을 당하지 않는지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테오를 마주하게 된다. 테오의 무기력한 모습에 가정폭력을
의심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과도하리만큼 집착한다. 이는 그의 어린 시절 자신의 다짐에 대한 ‘무언의 약속’, ‘충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정폭력 피해자로 누구보다 가정폭력에 대한 민감도가 높기에 자신의 학생들을 가정폭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리고 엘렌은 아버지로부터의 폭력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고 숨기는 ‘무언의
약속’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폭력도 참아내는 ‘무언의 약속’이 있음을 알기에 자신의 학생들은
가정폭력이라는 무언의 약속으로부터 고통받지 않기를 원한 것일 수 있다.
그 아이가 학대받는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피하며 행동하는 아이만의 방식에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내가 아는, 속속들이 아는 방식이었다.(…)
어린 시절 두들겨 맞았을 때, 나는
끝까지 그 흔적을 감추었다.
그러니 나를 속일 수는 없다.(13쪽)
나는 일종의 선을 넘어섰다.
선은 이미 내 뒤쪽 저 멀리 있었다.
“아세요, 부인? 아이들을 구멍 속이나 줄 끝자락에서
발견하면,
그땐 너무 늦은 거예요.”(…)
“제 생각에는 테오를 병원에 데려가봐야 할 것 같아요.
건강한지, 뭔가 결핍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보시는 게…….
테오가 너무 피곤해하는 게 걱정이에요.”(92~94쪽)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게 고작 이런 거구나.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약속들을 지키는 것.(168쪽)
아버지와 나에게도 우리만의 놀이가 있다.
TF1 채널의 예능 프로그램과 똑 같은 시간에.
그 놀이는 예고 없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오며 고통을 예고한다.(…)
첫 번째 오답. 머리통을 한 대
때린다.
두 번째 오답. 따귀가 날아온다.
세 번째 오답. 스툴 위에 앉아 있던 나를 밀어붙여 바닥에 넘어뜨린다.
네 번째 오답. 바닥에 쓰러진 내게 발길질한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의 질문과 똑같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규칙은 매번 달라진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다. 매번 그랬듯
땅바닥에.
일어나선 안된다. 이제 답을 하나도 모르겠다. 다음
매질을 예상한다.(38~39쪽)
그리고 마티스의 엄마 세실은 남편과의 ‘무언의 약속’을 지니고 있다. 세실은 부부 간의 무언의 약속이란 부부모임에 갔을
때 배우자가 다소 과장된 이야기를 하더라도 정정하거나 바로잡아 체면을 구기지 않도록 암묵적 동의를 하게 되는 상황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실의 무언의 약속은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의 서재에서
버려진 종이에 적힌 글들을 발견한 이후 깨진다.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온화하고 가정적인 남편이
인터넷 공간에서는 인종차별과 여성혐오로 가득한 글들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커플로 살고 있든, 혹은 한때 커플로
살았든,
누구나 상대가 수수께끼라는 걸 안다.(…)
상대는 자신만의 비밀을 지키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는 것.
침울하고 연약한 영혼이라는 것.
상대는 자신 안에 어린 시절의 일부와 비밀스러운 상처들을 숨기고,
고통스러운 감정과 어두운 심정을 억누르려 한다.(124쪽)
우리와 함께 살고 잠들고 먹고 사랑을 나누는 바로 그 사람,
같은 생각을 하고 의견을 일치시키고
나아가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비열한 생각을 숨기고 수치심으로 우리를 물들이는
낯선 존재로 드러나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만 같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상대의
이런 부분을 발견한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를 둘러싼 배경의 이면이 하수도의 곰팡내 풍기는
늪지에 잠겨 있음을 알게 될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125쪽)
대개 사람들은 내게 두세 번의 질문을 던진다.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대화는 다른 이에게로 슬그머니 넘어가고,
결코 내게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정주부에게 삶이 있다는 사실을,
관심사가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도 못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가정주부도 감각적인 문장으로 말 할 수 있고,
의견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153쪽)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처음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러다가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그가 웃었다 가끔 거북함을 숨길 때 하듯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늘 나누던 집안일이나 일상적인 문제에서 벗어난 대화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망설였다. 아주 짧은 동안.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그는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이
돌아왔을 대, 그는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당신, 생각이 너무 많은 모양이야.”(197~198쪽)
<충실한 마음>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기가 어두운 색으로 덮여 있다. 회색지대처럼 우리 사회의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양육방임, 청소년 음주, 사내 불륜, 여성
혐오, 여성 차별, 이중적 자아 등등. 그러나 <충실한 마음>은
이들을 가치 판단하지 않는다. 열린 결말로 끝맺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이러한 문제들에 생각하게끔 한다. 테오와 마티스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를 넘어 내 안에 테오와 마티스와 같은 아이들이 있는 건 아닌지, 엘렌과 세실처럼 삶에 대한 다짐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한 신념들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저자 델핀 드 비강도 충실함에는 파괴적 속성이 있어 이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충실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어요.
충실함을 파괴적인 속성을 지니기도 해요.
그러니 자신의 충실함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221쪽, 옮긴이의
말)
<충실한 마음>이
더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건, 나 또한 무엇인가 충실하고자 할 때 꼭 긍정적인 것에만 충실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에도 충실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은 ‘무언의 약속’, ‘스스로의 다짐’. ‘신념’들을 지키고자 할 때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으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충분히 부정적인 것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