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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아르떼, 2019
<슬픔이여
안녕>은 내 안에 있는 어떤 감정들이 결국에는 ‘슬픔’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그래서 제목의 안녕은 이러한 슬픔을
떠나 보내는 작별인사라고 생각했다.
나는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11쪽)
그런데 다 읽고 표지를 보니 <슬픔이여 안녕>의 원제는 <Bonjuour Tristesse>이었다. 안녕이 만남의
인사인 ‘봉쥬르’였다. 슬픔과
작별하는 이야기가 아닌 ‘슬픔’과 만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열일곱 살의 세실은 십오년 전 어머니를
여의고 이년 전 기숙학교에서 나온 후 아버지가 여자와 동거중이고 6개월 마다 여자를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내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가 현재 애인인 ‘엘자’와 함께 지중해 해안으로의 여름 휴가를 제안하게 되고 세실은 이를 받아 들인다.
주인공 ‘세실’은 열곱 살의 소녀로, 십오년 전 어머니를 여의고 이년 전 기숙학교에서
나와 아버지와 생활을 하게 된다.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아버지가 여자와 동거중이고 6개월 마다 여자를 바꾼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던 중 현재 애인인 ‘엘자’와 지중해 해안으로의 여름 휴가를 제안하게 되고 ‘세실’은 이를 받아 들인다. 세실은
바닷가에서 만난 ‘시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여름 휴가는 한가롭고 평화로울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은 엄마의 오랜 친구이자 독신인
‘안’이 아버지 ‘레몽’의 초대로 같은 별장으로 오게 되면서 묘한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그러던
중 ‘레몽’은 이내 ‘안’과의 결혼을 선언하고, 함께 있던 ‘엘자’는 한 순간 버림받게 된다. ‘안’은
세실의 대입시험 준비를 위해 ‘시릴’과도 만나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세실은 엘자’와 아버지를 다시 이어주고, 자신은 ‘시릴’과 만나기 위한 계획을 꾸민다.
‘엘자’와 ‘시릴’이 함께 아버지 ‘레몽’의
질투심을 자극해서 ‘안’과 헤어지게 만든다는 다분히 즉흥적인
계획이지만, ‘엘자’와 ‘시릴’은 자신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계획을 받아들이게 된다.
열일곱 소녀 ‘세실’은 열살이나 많은 어른들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그리고 ‘안’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의 세계가 주는 안락함과 안정감을 바라는 양가감정을 느끼며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고 이끌려 최악의 상황을 맞닥들이게 된다.
‘레몽’과 ‘엘자’가 숲속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안’은 차로 별장을
떠났으나 이내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또 다시 여름
별장을 빌려 휴가를 떠날 생각을 하며 ‘안’에 대해 생각하며
슬픔을 마주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주인공 세실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고, 자신의 계획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과는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부분에서는 주인공 ‘세실’이
미워지고, 어리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했다.
물론 우리 모두 누군가를 대하는 감정이
항상 일관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좋다가도 어떨 때는 미워지기도 하니,
어린 소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감정의 변화, 기복이 더 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해는
되면서도 마지막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하는 세실을 보면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은 자신의 죽음을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로 여길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그곳은 사고가 잦은 장소였고 안의 자동차는 커브 길에 약했다.
그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 마음이 약해졌을 때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분명히 내 입장에서 그려본 가설일 뿐이다.(182쪽)
‘안’의 비극적 최후를 보면서 ‘안’이
시릴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라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죽은
‘안’이 살아서 남기는 용서로 느껴져 더욱 가슴 아팠다.
넌 앞날에 대해선 거의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
그런 젊음의 특권이지.(157쪽)
한편으로는 ‘세실’이 ‘시릴’의 어머니를 만나서 자신이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어려움, 자식 키우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에 아버지와 안이 공감하고 칭찬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발끈하는 장면에서는 ‘현모양처’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중산층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 그 상황에
안주해서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취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워한다는 시각이 ‘현모양처 판타지’였음을 일깨웠다.
그녀는 많은 여자들이 간 길을 따랐고 알다시피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죠.
젊은 시절 중산층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고
그 상황에 안주해 거기서 벗어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그 부인은 이것도 하지 않고 저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뭔가를 성취하지 않았다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요.(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