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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황교익 지음 / 지식너머 / 2019년 8월
평점 :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황교익 지음, 지식너머, 2019
익숙한 것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혹은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의문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요리 등 이국 음식의 복잡한 요리법을 보면 왜 저렇게 요리를
하지?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데, 한식의 요리법이나 유래 등은
그 이름의 친숙함 혹은 익숙함으로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익숙함과 친숙함이 잘 알고 있다는 착시효과를 만들어 더더욱 의문을 갖지 않도록
작용한 것 같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를 통해서 나의 익숙함은 무지였음을 깨달았다. 물 속의 물고기가
물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가 매 순간 공기를 마시고 있으나, 매
순간 공기를 존재를 느끼지 못하듯, 한식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 황교익은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를 통해 이러한 익숙함에 머물지 말고 한국음식에 드리워진 판타지를 깨기 위한 질문을 ‘쉼 없이’ 던지라고 주문한다.
이 책은 한국인이 한국음식에 붙여둔 판타지를 읽어내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쉼 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주길 바란다.
일종의 한국음식 판타지 놀이를 한바탕 즐기자는 제안이다.(저자 저문)
떡볶이부터 놀라웠다. 요리는 보통 그 이름에서 재료와 조리법을
유추할 수 있다. 내 머리 속에 각인된 떡볶이와 그 이름이 서로 맞지 않음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학교앞 포장마차에서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먹는 음식이면서도 정작 그 이름과 조리법이 전혀 맞지 않음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한국인이 먹는 떡볶이는, 그 조리법으로 보자면, 떡볶이가
아니다.
떡을 고추장에 조리거나 냄비에 만두, 어묵 양배추, 당면
등을 함께 넣고 끓인다.
떡조림 또는 떡탕이다.(13쪽)
애초 떡볶이는 가래떡에 여러 채소와 고기를 넣고 간장의 양념으로 볶는 음식이었다.
설날 상차림에 오르는 음식이다.
이 떡볶이를 요즘에는 궁중떡볶이라 하는데, 특별히 궁중에서 이를 먹었다는 근거는 없다.
(…) 조선 왕이 먹은 음식이기만 하면 궁중음식이라 하는 것은 코미디이다.
조선의 왕도 밥을 먹었을 것이니 밥을 지어놓고 ‘궁중밥’이라
할 것인가(15쪽)
치킨도 마찬가지였다. 닭의 영어 표현 그대로 음식이름이 된 치킨은
예의 기름에 튀겨진 후라이드 치킨과 그 후라이드 치킨에 양념으로 버무린 양념 치킨을 떠 올린다. 떡볶이
못지 않게 한 달에 한 두번은 꼭 먹게 되고, 치킨을 먹기 위해 생맥주를 곁들인다는 핑계를 댈 정도로
치킨과 맥주는 공식과도 같다.
그런데 그런 치킨이 맛있는게 아니라,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닭고기의 맛보다는 무미(無味)를 가리기 위한 튀김 옷 맛으로 먹는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를 읽기 전에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렇다고 치킨을 먹지 않게 된 것도 아니다. 같이 먹는 사람들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알게 됨으로써
그동안 별 생각없이 대했던 치킨이 다시금 새롭게 느껴졌다. 튀김 옷을 튀김 옷 대로, 닭고기는 닭고기 대로, 맛을 음미하고 각각을 평가하게 되었다. 모르고 먹을 때보다 알고 먹을 때가 호불호를 가리기 쉬웠다.
한국인이 치킨을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인 개개인의 저마다의 독립된 기호를 바탕으로 치킨 맛을 판단한 결과이고,
그 낱낱의 기호가 집합을 이루어 ‘한국인은 치킨을 좋아한다’는
집단의 기호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참으로 순박한 일이다.
집단이 처해 있는 먹을거리 확보 사정이 개개인의 기호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27쪽)
닭이든, 어떤 짐승이든 간에 대체로 그 몸이 성체에 이르러야 맛이 난다.
한국의 닭은 맛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잡는다.
닭고기가 맛이 없으니 여러 첨가물의 튀김옷을 입히고
이를 튀겨서는 또 양념으로 범벅을 하여 먹는다.
한국의 치킨은 닭고기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튀김옷 맛, 기름 맛, 양념 맛으로 먹는다.(30쪽)
비빔밥은 충격 그 자체였다. 비빔밥은 특별한 제조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고, 입맛이 없을
때라도 남은 반찬들을 넣고, 고추장과 참기를을 둘러, 계란후라이를
하나 얹으면 집나간 입맛도 돌아왔다. 밖에서는 조금더 특별하게 육회를 얹은 비빔밥이나, 멍게, 꼬막을 얹은 비빔밥을 사 먹기도 했다.
최근 K-Food를 이야기할 때마다, 불고기, 김치만 내세우지 말고 비빔밥도 전 세계인이 좋아할 만한
한국 전통음식이라 생각했다. 물론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회자되고 있어 일종의 뿌듯함(?), 자부심(?)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비빔밥을 떠올리면 그려지는 이미지가 전주비빔밥처럼 밥 위에 빙둘러 재료를 담는 이미지인데, 전주비빔밥은 궁중음식이라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더욱이
이 이미지는 비빔밥의 원형처럼 널리 퍼져 전국 어디를 가나 같은 이미지로 내어지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여러 재료를 밥 위에 동그랗게 둘러서 내는 고착인데,
이걸 두고 오방색에 맞추니 어쩌니 한다.
이 구성을 따르니 비빔밥의 계절성은 버려졌고
식당마다의 개성도 잃었다(…)
온 국민이 전국 어느 식당에 가나
사계절 비슷한 비빔밥을 먹는다는 일이 놀랍지 않은가.
한국의 슬로푸드라고 내세우는 비빕밥이 프랜차이즈 사업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맥도날드화한 것이다.
조선의 궁중음식이고 전통이니 이걸 지켜야 한다고
너무 깊게 고집한 탓이다.(119쪽)
비빔밥은 밥과 찬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음식이니
그 찬에 따라 수많은 변주를 보이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찬의 수만큼 다양한 비빔밥이 존재한다.
이 개방적인 비빔밥에, 우리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121쪽)
비빔밥이 궁중음식이라는 주장은 문득 등장한다.
1976년 황혜성 씨가 <한국요리백과사전>에
궁중음식으로 비빔밥을 올린다.
아무 근거가 없다. 실록에 등장하는 것도 아니며,
조선의 문헌 그 어디에도 비빔밥이 궁중음식이라는 기록이 없다.
물론 조선의 왕이 비빔밥을 먹었을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1,000만 백성이 비빔밥을
먹었을 수도 있다.
음식을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것으로 분류하자면
그 특정 계급과 계층의 사람들이 그 음식에 특별한 의미를 두거나
특히 더 많이 먹거나 해야 한다.
조선 왕족이 비빔밥에 특별난 애착을 보였다거나
더 자주 먹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황혜성 이후 비빔밥 궁중음식설은 전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조선 왕족은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살았음에도
조선 왕족이 전주 이씨였다는 사실을 앞세우며
전주비빔밥을 궁중음식의 직계로 만들었다.(118~119쪽)
나의 무지에 대한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천일염이 전통
소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의 전통도 아닐 뿐더러, 일제강점기
이 땅에 이식된 것인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한 천일염에 미네랄이 많아
건강에 좋다느니, 자연에서 얻는 방식이라 자연 친화적인 것처럼 회자되는데 그 또한 사실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천일염이 전통 소금이 되었다.(…)
일본에서 온 것이라 하면 그 어떤 것이든 청산의 대상으로 삼는 한국인이
천일염에서만은 그 강력한 ‘민족혼’을 무장해제하고
있다.
천일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이 땅에 이식한 소금이다.
1907년 대한제국 통감부는 일본인 기술자의 제안에 따라
인천 주안에다 천일염전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군자와 소래, 또
황해도 연백, 평안도 광량만 등지에
대규모 천일염전을 조성하였다.
전남 신안의 천일염전은 한국전쟁 이후에 섰다.(315쪽)
일제강점기 이전에 한민족이 먹었던 소금은, 그러니까 한민족 전통의 소금은,
전오염(煎熬鹽)이다.
개흙에 묻은 소금기로 함수를 만들어 이를 끓여 만든 소금이다.
바닷물을 끓이니 화염(火鹽) 또는 자염(煮鹽)이라고도 하였다.(315쪽)
소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일본에 가서 염업 관계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 한반도에 이식한 그 염전이 일본에 아직 있는지 물었다.(…)
일본에 천일염전이 현재에 없는데, 과거에도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한반도에다 조성하였던 그 천일염전을
일본에다가는 조성한 적이 없었다.(316쪽)
신안의 염전은 한국전쟁 이후 조성되었다.
이북의 염전을 잃으면서 소금이 부족하게 되자 이 지역에 눈을 돌린 것이다.
가서 보면, 억지로 만든 염전으로 밖에 안 보인다.
함수가 담겨 있는 해주 안에 머리를 디밀면 시궁창 냄새가 진동한다.
함수의 염도가 높다 하여도 오래 갇혀 있으면 썩는다.
해주 주변의 땅도 썩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비닐이 깔린 결정지의 흙은 더 심히다.
공기와 햇볕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니 썩을 수 밖에 없다.(320쪽)
(일본)식용염공정취인협의회라는 단체(…) 규약 안에는
소금에 ‘미네랄 함유’, ‘미네랄 풍부’ 등의 말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항목(…)
“NaCl이 미네랄인데 그 외 극소량 들어 있는 기타의 미네랄을 두고
미네랄이라 하는 것은 비과학적”(…)
또한 그 어떤 소금에도 ‘천연’, ‘자연’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
NaCl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든 본디 자연의 광물이니
소금에 그런 단어를 붙이는 것이 비과학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나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부끄러웠다.
명색이 음식 전문 글쟁이인데 소금에 대한 과학적 상식조차
엉터리로 알고 살아왔던 게 창피하였다. 마침내 부아가 치밀었다.
한국의 과학자들, 과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는 그들은
국민을 상대로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일염이 광물에서 식품으로 바뀌었다”라느니
“자연 소금 천일염에는 미네랄이 많다”라느니…
국민을 바보로 여지기 않고서는! 그대들이 바보이든가!(327~328쪽)
그리고 한식=슬로푸드라는 막연한 믿음도 근거 없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음식 자체가 슬로푸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장이나 김치처럼 ‘천천히’ 발효하여 먹는 음식이
한국에 많다는 것이다.(…)
슬로푸드는 그 제조법의 특징을 분류 기준으로 삼아 만든 단어가 아니다.
사회,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용어이다.(…)
“무엇을 반대하고 무엇을 지향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반대의 대상은 세계화이고, 지향점은 지역적 삶이다.(106쪽)
이탈리아에서 슬로푸드운동이 시작(…)
농축산물과 식품에 대한 무역 장벽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리려 하였다.
‘신대륙’의 값싼 농축산물과 식품을 막아내야 한다는 과제가
‘구대륙’의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대륙의 먹을거리를 패스트푸드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음식에 인문학적 가치를 부여한 것이 바로 슬로푸드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에서 외국 농축산물을 막자고 만든
‘신토불이운동’과 유사하다.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철학적이며 심지어 정치적이다.(108쪽)
슬로푸드는 어떤 특정의 음식 그 자체를 말한다기보다
일종의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음식이다.(…)
‘산업화 이후 인간 세상에 대한 거부’(…)
“인간을 시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음식”(109쪽)
한식에 대한 자부심이 어쩌면 우리 안의 열등감이 아닐까 싶다. 경제성장에
걸맞는 문화강국으로의 자리를 갖고자 함에서 한식도 K-Food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함인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K-Food가 오히려
‘싸구려 민족주의’, ‘싸구려 문화’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에서도 백성은 먹을 것이 부족하여 보릿고개로 많은 이들이 굶주렸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지켜야할
전통이 있는지 의문들며, 조선의 왕과 지배계급이 먹던 음식을 전통의 이름으로 지켜야하는 것도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과 조선이라는 나라가 한반도라는 지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조선을 따르는 나라가 아니다. 전통이라 한다면 조선만을
따라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음식에 관여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국민의 의식과 정서를 조작하지는 말아야 한다.
음식은 문화이다. 음식을 문화라고 하는 까닭은
한 집단의 기호 음식에 그 집단 구성원의 정체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정치적 조작 대상으로 삼으면 안되는 것이다.
문화는 정치 위에 있다.(21~22쪽)
음식은 시대에 따라, 시대에 맞추어, 변화한다.
그 변화를 억지로 막아 세우는 일은 전통 지키기가 아니다. 고착이다.
한민족이니 한복만 입어야 하고 판소리만 들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케이팝은 한민족 전래 음악과 관련이 없다. 음식도 그렇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밥상도 바뀌어야 한다.(46쪽)
음식을 문화라고 하는 까닭은,
음식에 그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삶의 정체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식을 법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곧 그 한식을 먹고 있는 한국인의 삶의 정체성을
법으로 규정하겠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에 자기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파쇼를 허락하지 않았다.(99쪽)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독립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주의는 폐기되었어야 하였다.
민족주의는 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므로
독립 국가를 이루었으니 민족주의는 그 임무를 다한 것이었다.
민족주의는 한 국가가 지향해야 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국가 권력이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순간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103쪽)
우리는(한식은) 돌아갈 곳이 없다.
지키자 하여도 지킬 것이 별로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창조이다.(113쪽)
조선에서의 조리법은 크게 두 종류가 내려온다.
왕족이 연회 등을 하면서 먹었던 음식의 조리법과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초근목피 조리법이다.
초근목피 조리법이란, 진휼곡도 넉넉하지 않으니 산에 들에 돌아다니며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거두어 이를 먹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115쪽)
일제강점기 접대의 공간인 요정을 그 원형으로 하고 있는 한정식이 전통의 이름으로 회자되는 것에는 부끄러움마저
들었다. 또한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차리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조선이전 사회에서는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차려서 먹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기에 이를 전통이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정식의 ‘다 먹지 못하게 차리는 상’을
두고 전통이라 우기는 이들이 있었다.
한민족은 원래 인심이 좋아 손님에게 그리 대접하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한민족이 타민족보다 특별히 인심이 좋은지 어떤지는 내 짧은 경험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의 옛 상차림에는 그런 게 없다.
조선은 독상이 기본이다. 잔치를 하여도 독성을 안겼다.(167쪽)
단군신화에 나오는 ‘쑥과 마늘’
이야기를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쑥과 달래’로
바꾸자는 제안은 신선하기도 했고, 외래종인 마늘 보다는 자생종 달래가 더욱 친근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을 원본으로 하는데,
삼국유사는 한자로 쓰여 있다.
그 책에 쓰인 쑥과 마늘에 해당하는 한자는 영애(靈艾)와 산(蒜)이다.
영애는 ‘신령스러운 쑥’, 산은 ‘마늘’로 해석한다.(…)
산은 마늘만을 뜻하지 않는다. 달래, 파, 마늘, 부추 등을
이르는 한자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마늘은 산이라기보다 호(葫)라 하였다. 대산(大蒜)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작 시기인 고려시대에도 그랬을 수 있다.
또, 마늘은 몽골에서 전래된 외래식물이다. 마늘이란
말도 몽골어 ‘만끼르’에서 왔다.
산에 해당하는 식물 중 자생식물로는 달래, 산파, 산부추, 산마늘이 있다.(…)
산이라 할 수 있는 자생 식물 중에 달래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것으로
보이므로 단군신화 속의 산을 달래로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198~199쪽)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는 한식에 담긴 판타지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추석에 담긴 판타지도
걷어내자고 이야기 한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고 우리가 지켜야할 전통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추석은 추수감사절의 의미도 아니고, 수확의 시기와 맞지도 않는다는
것인데,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왜 정부에서 명절 물가 자료를 내놓는지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국가가 나서서 차례상을 세팅하는 거처럼 보인다는 거죠.
우리는 유교국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교 예법인 차례를 국가가 국민들에게 ‘이렇게 차려라’하고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크리스마스에 케이크 가격이 어떻다고 물가 자료를 안 내놓잖아요.
석가탄신일에 사찰의 시주 금액이 얼마인지도 내놓지 않고요.
그와 마찬가지로 차례상의 물가 자료를 내놓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272쪽)
“본래 추석은 노는 날이에요. 서양의 추수감사절 의미는 없어요.
해방 이후 영화, TV 등의 매체를 통해 서양의 추수감사절 풍습이 알려졌고,
이를 우리 초석과 연결시킨 건데, 사실 추석은 추수감사절과 절기가 맞지 않아요.(…)
밤은 죽음, 귀신, 도깨비 등을 떠올리게 만드는 두려움의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추석은 큰 달이 뜨는 날이에요.
한반도의 가을 하늘은 굉장히 맑잖아요.
그 맑은 밤에 휘영청 보름달이 뜨면 한밤중에도 대낮 같아요.
그렇게 추석의 밤은 죽음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그날에는 여성도 해방됐어요.
바깥으로 나가 밤길을 돌아다녀도 되는 날인 겁니다.”(273쪽)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그런데 축제가 없어요.
스페인 토마토 축제 등 서양의 유명한 축제들이 오랜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게 아니에요.
산업 국가로 운영되면서 노동자들이 한바탕 신나게 열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축제가 기획된 거죠. 지금 우리 시대 노동자들이 한바탕 신나게 놀 수 있는
날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없습니다.
국가는 추석 물가를 내놓을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한바탕 놀 수 있을까’라는 궁리를 해야죠. 언제까지 집마다 차례상 음식 마련에 전전긍긍하도록,
여성들을 부엌에 가두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만 합니다.(274쪽)
명절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명절에는 놀아야 한다는 생각이 크게 번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급작스럽게 노동자의 나라로 변하면서
노동자가 신나게 노는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이 한바탕 크게 놀 수 있게, 정부에서도 궁리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275쪽)
저자는 맺음말에서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에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책이 아니니 ‘읽고 멀리 두고, 버리고
잊으라’한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자랑도 아니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을 기회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자꾸 회자되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다.
괜히 읽었다 싶을 정도로 기분이 상하고 고민만 깊어졌을 수도 있다.
기존의 한국음식 담론과는 그 결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다 읽었으면 이 책은 되도록 멀리 두시라고 권한다.
버리시고 잊으시라.
내가 들었던 불협화음의 판타지아가 여러분들의 뇌리에 남아 있으면
편안한 한국 생활이 어려울 수도 있다.(맺음말)
무엇이든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잘 알아야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다. 막연한 사랑은 사랑으로 포장된 집착이거나 사랑으로 포장된 착취일 뿐이다. 한민족으로써
한식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한식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