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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법원 -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
권석천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평점 :
『두 얼굴의 법원』, 권석천 지음, 창비, 2019
재판은
사실을 다투는 것으로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아닐 수 있다. 드러난 사실보다는 감춰진 사실들이 많은 가운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는 전적으로 판사의 몫이기 때문에 판사는 공명정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런 판사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판을 거래하고, 행정관료화된
법원행정처를 통해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 재판의 결과로 사회에 미칠 파장을 계산했다. 재판을 하라고 했더니 정치를 한 꼴이다.
이는
양승태 사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양승태, 박병대, 임종헌 등 판사 개인의 일탈은 더더욱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다. 그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역사의 시계는 반드시 거꾸로 흐른다. 우리는
반민특위를 통해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가 어떻게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지 보아왔다. 이명박근혜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허점이 역사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도 보았다.
사법농단에
대해서 보도되는 기사는 많으나, 기계적 균형에 빠져 일방의 주장과 반론을 나열하는 보도에 머무르고 있다. 사법농단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는 법무부장관
임명이라는 블랙홀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어, 사법농단에 대한 기사는 단신정도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한
가운데 <두 얼굴의 법원>은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척하다’라는
부제처럼 현재의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법농단으로 비로소 드러난
우리가 몰랐던 법원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두 얼굴의 법원
하나는 국민 앞에서 ‘자유, 평등, 정의’라는 공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법원.
다른 하나는 대법원장을 받들고 사법부를 지켜야 한다는
조직논리로 움직이는 현실의 법원(5쪽)
분리 통치(divide and rule)의 체계 안에서 자신의 고민을 같은 조직 사람들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어떤 부당한 일이 맡겨져도 해내야 할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쫓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닐까.(62쪽)
대한민국 헌법은 법원의 주인은 주권자인 시민이라고 말한다.
판사들은 대법원장을 주인으로 예유해서는 안 된다.
수사적 표현이라도 ‘주인’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오로지 주권자인 시민을 법원의 주인으로 받들며 재판해야 한다.(103쪽)
대법원장은 판사들이 제대로 재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존재다.
사법행정을 자기 뜻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독립하여 재판하는’ 판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아가야 한다.(103쪽)
사법농단이
우리에게 알려진 건 이탄희 판사의 사표였다. <두 얼굴의 법원>도
2017년 2월이탄희 판사가 사표를 쓰게 된 과정부터 이야기한다.
이탄희
판사의 법원행정처 발령 à 판사 뒷조사 파일 존재 확인 à
사표
à
사표번복à
양승태
코트의 1차 조사 à 김명수 코트의
2차 조사 à 특별조사단의
3차 조사 à 양승태, 임종헌 구속과 재판까지를 그동안 언론이 단편적으로 다룬 부분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사법농단 전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은 그럼 법원행정처는 왜 판사들 뒷조사 파일을 만들고, 행정부와 재판거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법원행정처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궁금했었는데, 말미에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을 통해 법원행정처가 작동한
방식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 결정을 못했는데,
열심히 다른 일을 해서 상황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이 닥치면 결국은 내가 가진 역량을 동원해서 일이 되는 방향으로 하겠구나,
나 자신이 주체가 돼서 결정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흘러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 그 모습이 객관화돼서 보였다.
갑자기 자기 자신이 상황의 노예처럼 느껴졌다.
- 이탄희 (68쪽)
우리는 유능함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유능함만큼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없다.
유능해야 할 때 유능해야 하는데, 무능해야 할 때 유능할 때가 많다.(76쪽)
조직의 이익-실제로는 고위 조직원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존재이유에 등을 돌렸다.
존재 이유를 잊은 조직은 흉기보다 위험하다.
존재 이유 때문에 받게 된 권한을 자신들을 위해 휘두르면
그 피해는 무고한 시민들이 입는다.(81쪽)
문제는 그 ‘믿음’이 무엇이냐다.
과정상의 문제쯤은 무시해도 그 믿음은 유지되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자신이 말하던 믿음을 이뤘을 때
그 믿음의 내용은 달려져 있는 것 아닌가.
절차적 정의를 지키지 않는 정의는 일그러진다.(104쪽)
진상규명을 책임진 자는 야차와 같은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오직 사실만을 추구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누가 그 칼에 베이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156쪽)
많은 이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처럼 생각했지만,
젊은 판사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이상은 보다 본질적인 것이었다.
법원이 바뀌어야만 했다.
국민의 눈높이를 그대로 맞출 수는 없어도 이제는 정말 달라졌구나,
하는 신뢰를 받으며 재판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제까지의 노력이 의미있을 것 같았다.(285쪽)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습니다.(…)
외형과 실질이 다르면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이탄희 (286쪽)
(양승태)그가 법관으로 살았던 42년간, 형사법정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유신시대, 잔혹하게 고문당한 이들이 판사 양승태의 법정에 들어와
억울함을 호소할 때 그는 어떻게 판결했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심했을 ‘소설 같은 공소장’으로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나,
“검찰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온 게 어제오늘의 일인가.
직접 ‘피고인’이 되고서야 뒤늦게 검찰 수사의
진면목을 알게 됐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검사들에 의해 기소돼 자신에게 재판을 받았던
숱한 피고인들이 느꼈을 고통에 대해서도 한마디쯤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291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재일동포 김동휘 씨 사건 등 4건의 간첮조작 사건에서는 배석판로, 강희철 씨, 오재선 씨 간첩조작 사건에서는 재판장으로 재판을 했다. 6건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됐다. 오재선 씨의 경우 1심 재판에서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라고 호소했으나 재판장이었던 양 전 대법원장은 오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내게 유죄가 선고되는 것은 곧 법원에 유죄가 선고되는 것이다.’
법원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었던 조직논리를 다시 스스로를 지킬 방패로 삼고 있다.(292쪽)
재판소 구성원들이 정신적 노예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킬 수 있겠는가?
자신의 기본적인 인권을 거의 대부분 박탈당한 사람이
어떻게 국민과 시민의 기본적 인권을 지킬 수 있겠는가?
- 30년 경력의 재판관 출신 일본인 교수, 세기 히로시(319쪽)
시급한 것은 시민사회가 법원을 감시하는 일이다.
대법원이 사법행정을 어떻게 하는지, 사법이 권력화되지 않는지 시민사회가 주시해야 한다.
판결문의 팩트와 논리가 맞는지 파헤치고 따져야 한다.
법정에 들어가 판사, 검사, 피고인, 변호인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한다.
그래야 판사들이 변하고 검사들이 바뀐다.(320쪽)
대법원 판결로 일본 기업들이 내야 할 배상금 규모가 크다는 게
왜 국가에 손해가 될까.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일본 정부가 경제 보복을 한다고 해서
잘못된 판결인 걸까.(344쪽)
임종헌 차장이 직접 작성한 문건에는
‘사법부가 국정운영에 협조해온 사례’가 제시된다.(…)
기업, 국공립대, 은행권에 이익이 되는 것이 왜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것인가.
노동자가 임금을 많이 받고, 국공립대 학생들이 기성회비를 돌려받고,
중소기업이 이기는 건 왜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
이러한 사고의 밑바닥에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여기는
상당수 법관들의 통념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345쪽)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국가 권력이 민사소송에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당사자들 간의 분쟁인 민사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청와대-대법원(법원행정처)-외교부의 삼각 협의체가 3년 넘게 돌아갔다.(365쪽)
청와대는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정지 사건이 매우 중요 사건이나
대법원 입장에서 많은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하므로
양 측에 윈윈(양쪽 모두에 유리함)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재항고를 인용함이 상당하다.
- 2014.12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문건 (373쪽)
적어도 ‘영향 받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얘기를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에서 해서는 안 된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영향을 미쳐놓고
‘왜 영향을 받았느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다.
도덕적 비난을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하게 하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379쪽)
판사가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려서 법원 전체가 비난받게 된다고
그 판결을 어떻게 나쁜 판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비난받지 않는 판결을 하겠다는 것은 재판하는 자들의 자기부정 아닌가.(380쪽)
한국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직논리’에 기대
움직이는 가부장제의 연합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걸까.
사법행정권 남용에 자꾸 이상한 프레임들을 갖다대려는 시도들에서
그들의 위기감이 느껴진다.(…)
사법농단은(…) 사법부와 판사들이 자기들끼리 허공에서 벌인 일이 아니다.
청와대 권력, 정부 권력, 국회 권력, 언론 권력…
권력들이 ‘손에 손 잡고’ 벌인 일이다.(389쪽)
한국의 보수가 군인들이 지배하던 ‘안보 보수’에서
머니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시장 보수’로 변화했다.(…)
‘문제는 한국의 보수가 안보와 성장, 즉
북한과 돈 외에는
세상을 보는 다른 프레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
- 정치컨설팅그룹 ‘민’ 박성민 대표(390~391쪽)
여전히
양승태, 임종헌은 재판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구속으로 사법농단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일탈로 몰아서 개인을 처벌하면 사건이 일단락되는 것으로 언론도 호도하고, 시민들도 그렇게 믿는 경향이
있으나,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반드시 재발하게 되어있다. 재발할
때는 이전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소위
엘리트들의 나라를 먹여살린다는 오만을 깨야 한다. 엘리트 사회에서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 그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해쳐모일 뿐이다. MBC 이용마 기자가
검찰, 기획재정부, 외교부를 출입하며 느낀점을 언급했다는
글이 가슴 깊이 남는다. 이탄희 판사의 말처럼 사회는 절대로 저절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며, 대한민국의 역사가 거꾸로 흐르게 하거나, 엘리트 독재의 세상이 되지
않도록 주권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들의 조직논리는 이미 국민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엘리트들은 평생 자기 조직에만 갇혀 살았고,
그 밖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서로 엘리트로 인정해주고
자기들끼리 보상해주며 살았다.
조직논리를 흔드는 외부의 침입이 감지되면
똘똘 뭉쳐 조직을 보호했다.
지극히 편협한 조직논리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들만이 절대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양 큰소리친다.
- MBC 이용마 기자(391쪽)
저는 세상이 저절로 잘될 거라는 식으로 낙관하지 않아요.
그건 저 자신을 속이는 거예요.(…)
미루지 말고 제때 선택하고, 그후의
상황에 끈질기게 대응하고,
또 마지막에 저의 방식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전부 다 필요했던 일이에요.(…)
희망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에서 나오는 거예요.
- 이탄희 (4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