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2. 16
낭만적 운명론은 물론 신화이고 착각이다. 그러나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이유는 없다. ... 클로이가 내 삶에서 하게 된 역할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눈이고,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키스를 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전화를 받거나 머리를 빗는 모습인데.

3. 22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신에 대한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4. 30
차라리 편지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일주일 뒤에 전화를 했을때 나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준비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어슬렁거리다가, 면봉으로 귀를 후비며 욕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기습을 당했다. 나는 침실에 있는 전화로 달려갔다. 목소리는 배우지 않는 한, 그래서 연기를 하지 않는 한, 밑바탕 스케치일 수밖에 없다. 내 목소리에는 긴장, 흥분,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 만일 종이에 쓰는 글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능숙하게 지워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기는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서 말하는 사람에게 한 번의 기회밖에 주지 않았다.

5. 39
"두 당사자가 평등한 상태에서,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한쪽은 얼른 한번 즐기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진정한 사랑을 원할 때에는 관계가 성립되면 안되죠. 거기서 모든 고민이 생기는것 같아요.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인생에서 뭘 원하는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6. 44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 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그 질문의 재귀적인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점점 배반과 비진정성에 물들게 될 수밖에 없었다.

7. 80
어쩌면 우리가 찾는 것은 반드시 더 푸른 풀이 아니라,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풀일지도 모른다.

8. 82
마르크스주의자의 욕망의 대상이 된 사람은 불균형이 정산으로 보이는 영역에서 정확한 균형을 성취해야 한다. ... 클로이에게는 어려운 과제가 있었다. 나의 독립성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연약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나의 연약성을 부인할 만큼 독립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것.

9. 8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전에 어디선가, 어쩌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10. 89
 나는 클로이가 내 눈에는 잘 봐주어야 별 매력 없는 구두에 황홀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클로이가 어떤 여자인지에 대한 내 생각, 나의 아리스토파네스적인 확신에는 이 구두에 대한 열광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그 구두를 살 때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정신이 산란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클로이가 그 구두를 골랐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불편하게도 그녀가 그녀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녀의 취향이 늘 나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모순이 없을지 몰라도 그런 조화의 상태가 무한히 뻗어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늘 상식적인 생각처럼 유쾌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1. 137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동작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12. 160
 7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는 포토벨로 로드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날이어서 종일 하이드 파크에서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5시 무렵부터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서 이불 밑에 숨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피해야 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충동에 저항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일요일 저녁이면 우울했다. 죽음, 끝내지 못한 일, 죄, 상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클로이는 신문을 읽었고, 나는 창 밖의 차량과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
 전에는 아무도 내 표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지만, 클로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그 말이 그때까지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운 슬픔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되면서, 내 우울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말 때무에,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던 느낌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기꺼이 내 세계로 들어와 나 대신 그것을 객관화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강렬한[그리고 어쩌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사랑을 느꼈다. 고아에게 고아라고 말해줌으로써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13. 164
♣그녀는 질식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길 떄문에 움직임이 뻣뻣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시골에서, 창문은 크고 가구는 거의 없는 널찍한 하얀 집에서 혼자 사는 꿈을 꾸었다. 억압적인 눈길로 그녀의 진을 다 빼버리는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열아홉이 되었을 떄 그녀는 애리조나로 감으로써 그 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도시 변두리의 오두막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어린 시절에 살던 집으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젊음의 낭만주의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고전들이 가득 든 가방을 가지고 갔다. 그녀는 달의 표면 같은 사막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그 책들을 읽고 주석을 달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그녀는 평생 갈망했던 고독 때문에 방향감각이 흐트러지고, 겁이 나고,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주 조그만 시장에 가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리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존재감, 자신의 경계들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마침내 겨우 한 달 만에 그녀는 그 소도시를 떠나 피닉스의 한 레스토랑에 웨이트리스로 취직했다. 그녀를 내리누르는 "비현실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닉스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사회적 접촉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라는 것에 대한 모든 느낌을 잃었다. 그녀가 겪은 경험들은 언어로 정리될 수 없을 것 같았다.

14. 177
언어는 그 안정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 권태, 짜증, 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내 감정은 양면 공존의 운명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어떤 말이 그 상태를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을까?

15. 204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클로이는 갑자기 나에게 흥미를 잃을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습관이나 익숙함이 관계를 끝내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클로이나 나 둘 중의 하나가 끝을 내버리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연애가 자연스러운 종말에 이르기 전에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다툼을 하는 것에서 표현되었다]을 느꼈다. 증오에서 나온 살인이 아니라 지나친 사랑에서 나온, 아니 지나친 사랑이 가져올 공포에서 나온 살인이었다. 연인들은 그들의 행복의 실험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견딜 수 없을 때에만 자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

16. 267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는 시간표가 꽉 짜인 현재의 무자비한 역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17. 270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 뒤, 나는 런던의 그녀가 살던 동네에 갔다가,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전처럼 괴롭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내가 그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녀가 살던 동네였음에도], 근처 레스토랑에 잡아놓은 약속을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로이에 대한 기억은 중립화되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망각에는 죄책감이 뒤따랐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18. 272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잡게 되었다.

19. 273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시작한다. 그러나 지혜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지혜는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불안, 두려움, 우상 숭배, 해로운 정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첫 충동이 꼭 진실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은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20. 274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으로 나눌 수도 있다. 성숙한 사랑의 철학은 거의 모든 면에서 미성숙한 사랑보다 바람직하며, 그 특징은 각 개인의 선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매저키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어쩌면 이래서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고통 없는 상태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미성숙한 사랑은 [나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기는 하지만] 이상화와 실망 사이의 혼란스러운 비틀거림이며, 환희나 행복의 감정이 익사나 섬뜩한 구토의 인상과 결합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마침내 답을 찾았다는 느낌이 이렇게 헤맨 적이 없다는 느낌과 공존하는 상태이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성숙한 사랑의 절정은 결혼이며, 일상[일요일 신문, 다리미, 리모컨이 달린 장치들]을 통해서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미성숙한 사랑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다. 일단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 올라설 수밖에 없다. 미성숙한 정열의 정점을 안 사람은 결혼으로 정착하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차라리 절벽 너머로 차를 몰아 끝장을 내고 만다.

21. 277
페기 니얼리 박사의 '괴로운 마음'은 무엇에 대한 책일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 짝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와 여자, 상대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감정적 불만족 상태에 빠뜨리는 사람들, 술이나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행하지만 낙관적인 이야기이다. 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사랑과 고통을 연결시키며, 그들이 사랑하게 된 어울리지 않는 유형의 짝이 변화를 일으켜서 그들을 제대로 사랑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그들의 감정적 요구에 응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는 미망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게 된다. 니얼리 박사는 제3장에서 문제의 근원이 결함 있는 부모라고 밝힌다. 부모는 이 불행한 낭만주의자들이 감정의 과정을 왜곡되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린 시절의 감정적 애착 경험을 통해서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며 잔인한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치료과정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다시 짚어보면 자신의 매저키즘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짝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사실은 문제 있는 부모를 제대로 된 부모로 바꾸던 어린 시절의 공상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22. 286
- 역자후기 -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은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의 눈으로, 또는 굳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생각이 깊고 많은 사람의 눈으로 일상을 해석하는 데에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런 재주를 통찰력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이 책에서 드 보통의 통찰력은 우리가 여러번 무릎을 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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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의자 위에도 쌓이고
마룻바닥에도 널렸어요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 대자
책 무게에 책장이 부러져 버렸어요

책은 현관 기둥을 따라 높이 쌓이다가
마침내 커다란 현관문까지 막아버렸어요.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책을 단 한 권도 더 사들일 수 없는
가슴 아픈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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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
취재편집을 하는 기자들로 가득한 편집부의 풍경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편집부 선배들은 필자와 통화하고 디자인부에 원고들을 넘기느라 매우 분주했지만, 일단 교정지에 코를 박으면 옆에서 불러도 잘 모를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화중에 온갖 책들의 문구들을 줄줄이 인용하는 것이었다. 수습사원인 나는 취재, 교정일을 배우는 것도 벅찼지만 선배들이 언급하는 책들을 읽어내느라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책들이야말로 소위 문화예술계로 진입하는 야곱의 사다리인 것처럼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아, 나는 왜 이리 무식하단 말인가! 어떨 땐 부끄러워서 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2. 22
귀가하면 선배들이 언급했던 책들, 특히 동서양의 고전들을 읽어내는라 잠을 설치곤 했다. 대단한 교양을 기른다는 생각보다 선배들과 필자 선생들의 말귀를 잘 알아듣겠다는 욕심에서였다.

3. 24
독자에게 책이 지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중 광고문안 쓰기를 통해 대중적인 감각을 익혔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리드 문안, 여운을 남기는 바디 문안, 간결하고도 핵심을 찌르는 문안을 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4. 33
출판사에 근무하다 보면 단순히 업무량이 많다거나 혹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존재의 결핍감을 느끼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내부 충전이 없는 상태에서 많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 쉴 수 없다면, 방법적으로 곧장 전직을 생각하게 된다. 좀더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일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자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휴식 혹은 여가선용 방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일테면 일주일에 반드시 영화 한 편은 본다, 음악을 듣는다, 혹은 산에 오른다 등등의 취미생활을 통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음 편집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컨트롤해야 한다.
 어쨌든 나는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해 전직을 했다. 또 더 좋은 조건의 전직 제의도 그 한 이유였다.

5. 41
- 질 데이비스 '편집자의 일' -
책 출판은 '마술'이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책을 출간하는 결정을 신비롭고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행운, 경이로운 판단력, 재능)의 결과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도 따라야 하고 이성적이면서 냉철한 판단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항상 효율성과 합리성을 지향하며, 보다 나은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출판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

6. 72
주파수는 달라도 모든 세상 읽기에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균형감각'이다. 어느 정도 균형감각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실패하지 않을 정도의 균형감각'이라고 답하겠다.

7. 73
출판기획의 기술이 있다면 '미세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판기획, 편집을 지망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저 사람이 미세조정을 잘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를 제일 먼저 본다. 편집자의 자질은 미세조정 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기획의 일관성 또한 이 미세조정에서 온다. 본문 글자 크기의 한두 포인트 차이에서, 서체의 굵고 가늘기의 차이에서, 먹 농도의 10퍼센트와 20퍼센트의 차이에서 기획은 달라진다. 과장이 아니다. 글씨 급수가 바뀌면 그 책의 성격 또한 연동하여 바뀌는 것이다.

8. 77
나는 내가 만든 책 가운데 '예술가로 산다는 것(박영택 지음, 마음산책)'을 성공한 사례로 들고 싶다. 저자의 역량과 성실성, 편집의 기능, 주제의 깊이가 비교적 균형 잡혀 구현된 사례로 들고 싶은 것이다.

9. 83
- 조우석, 중앙일보 -
산다는 일에 조금은 지쳤거나 왠지 심드렁해진 사람들이라면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저자의 말대로 지독한 가난과 궁핍을 자청해 '소신 공양하듯' 미술행위에 매달리고 있는 이 시대의 미술가 열 명의 삶은 그토록 절실하게 묘사된다.

10. 108
편집자의 삶에서 희열이란 자신이 의도한 기획이 성공했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것의 일차적인 평가는 저자다. 그 다음에 더 무서운 평가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독자다. 그렇다고 편집자가 그 평가에 계속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출판일에 흥미가 식는다. 편집자의 덕목은 '열정을 갖고 기획'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11. 111
- '혼의 전사'라고 불리는 일본의 전설적인 편집자 겐조 도루 -
작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스며나오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쓰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이상한 구석이 내게는 전혀 없었어요. 비뚤어져도 남보다 못해도 좋으니까 자신의 고유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나는 가짜입니다. 하지만 가짜에는 가짜의 영광도 있습니다. 진짜들을 프로듀스하는 행위죠. 그것은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작가가 고통으로 짜낼 작품에 자극을 주고, 끊이지 않는 폭주를 위해 보조선을 그어주는 것입니다. 작가로써는 가짜인 나라도 프로듀서로서는 진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2. 113
편집자가 기획을 성공시키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1. 세상과 삶의 여러 가지 양태에 대해 왕성한 탐구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 지혜로워야 한다.
3. 열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4. 감동 마케터가 되어야 한다.

13. 122
- 겐조 도루 -
전혀 빈틈없는 사람은 편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작가의 무의식에 있는 것, 엉켜 있는 것을 언어로 만들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의 찢어진 상처를 안고 그것을 도려내듯 쓰도록 해야 합니다. 편집자는 그 정신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행위에 열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건 언어가 상대의 가슴에 닿지 않으면 편집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 부담을 계속 주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요.

14. 143
- 조셉 골드스타인 '비블리오테라피' -
당신이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고 책 속의 체험에 몰입하고 있다면 먼저 당신 몸이 그것을 말해준다. 가령 두근거리는 가슴, 땀에 젖은 손바닥, 느긋하고 평온한 호흡 등의 신체적 표시는 당신이 책속에 몰입하여 느끼는 감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공포, 분노, 흥미, 즐거움, 수치심, 슬픔 등 당신이 실제생활에서 체험하는 것과 똑같은 정서다. 놀랍게도 당신은 책 위로 눈동자를 굴리는 동작만으로도 체험을 '실감'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책에 몰두하다 보면 우리의 실제 세상은 소설 속의 세상보다 덜 리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책이 우리의 '진정한' 느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마치 읽을 시간만 있으면 금방 돌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생활, 또 다른 마법의 장소를 확보한듯 느껴진다. 독서가 이런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소설은 종종 마법의 양탄자, 도피수단, 정신적 여행으로 불린다.

15. 147
최고의 기술은 '책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데 있다. 책을 사기 전에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안 사면 내가 손해지" "이 작가의 글이 내 일상의 빛깔을 바꾸어줄 거야" 하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 후 독자에게 현실의 어떤 것을 환기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면 편집자의 꿈은 현실화되는 것이리라.

16. 154
- 조은 '벼랑에서 살다'라는 책이 만들어진 과정 -
 마침내 시인은 나의 청탁을 수락했고 한겨울에 문을 걸어잠그고 전화선을 빼놓은 채 원고쓰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동안 나는 물론 지인들도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드디어 원고를 들고 시인이 출판사에 나타났다. "바위에서 물 한 방울 짜내는 심정으로 힘겹게 썼다"고 말하는 시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작가, 시인에 기대어 작업을 하는 편집자로서는 무엇보다도 이 순간이 가장 미안하게 느껴지는 때다.
 600장의 원고는 그야말로 말의 의미 그대로 단숨에 읽혔다. 시인의 산문답게 치열했고, 마치 한 편 한 편의 시처럼 단단했다. 좋은 원고를 받아든 당시의 기쁨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17. 225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문제에 대해 상술하자면 우선 무엇보다도 기자들은 이런 보도자료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는 사람임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사의 책에 도취된 편집자의 광고문안에 가까운 보도자료는 환영받지 못한다. 보도자료에는 무엇보다도 정확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그 사실들을 숫자로 계량화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가령 '유럽 등 세계 31개국에서 번역된, 저자의 세번째 저작. 두번째 저작 이후 5년의 집필 기간을 통해 생산된, 원고지 2,000장의 역작' 등등의 표현이다. 또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그 책의 차별성을 강조해야 한다. 한편으로 사진자료나 알기 쉬운 도판 등을 활용하거나 저자와 인터뷰가 가능한지 여부 등을 상세히 알려주는 것이 좋다.

18. 235
혼이 있는 홍보물,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했거니와 어떤 출판사의 브랜드를 떠올릴 때 혼이 있는, 즉 영혼이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그 출판사는 결코 독자들에게 외면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출판사가 하는 홍보라면 먼저 독자들이 신뢰로 대해줄 것이다. 출판사에 영혼이 있다 함은 무엇일까. 그건 '출판 정신'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트렌드에 혼이 빠져, 정신없이 쫓아가며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출판사의 인적 구성원들이 출판사의 출판정신에 동의하고 결정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9. 256
출판사에 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보고, 그 책들과 함께 성장한 세대가 많다. 따라서 한 권의 책을 낼 때에도 신중히, 이 책이 우리 출판사의 목록에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브랜드의 가치가 CEO의 몫이라는 점도 더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최고 경영자가 결국 그 브랜드의 가치를 담보해야 한다는 말이니까.

20. 260
 편집자는 저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관리자인가? 그렇지도 않다. 편집자는 출판경영자(시장을 인식한다는 점에서)이며, 출판영업자(독자에게 팔아야 한다는 점에서)이고, 또 독자(원고를 평가한다는 점에서)이며, 그 모든 것이다. 편집자의 정체성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내려는 노력 가운데 발생한다. 마치 비온 뒤 잠시 나온 무지개처럼.
 편집자는 독특한 잡식성의 동물이다. 뭐든지 취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취향에 몰두하니까. 새삼 편집광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명편집자가 된다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적인 호기심과 창의력, 편집적인 몰입과 추구 등등이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21. 276
-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
독자께서는 어떤 연유로 책을 읽으시는지?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이' '버릇이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강요로'라면 유감스럽게도 틀림없이 근대인이며, '그냥 재미있으니까' '진짜 좋아해서'라면 심각한 중독자일 가능성이 높다.

22. 282
후배나 동료 사이에서 인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미리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나는 항상 '일을 사이에 두지 않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서로를 좋게 평가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일 때문에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을 해야 하고 싸우기까지 한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서로 격론이 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하다. 논쟁이 두려워 일을 두고 적당히 타협하면 언젠가는 후회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과 일을 할 경우, '편안하다'가 아니라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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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53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2. 54
나는 진짜 글쓰는 재능이 풍부했다기보다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상대적으로 짧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고 나니 아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내게 아무런 목표도 없었다는 점. 취직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일주일에 몇 시간 되지 않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만약 주변에 마리화나라도 있었으면 그걸 피우면서 시간을 보냈을 텐데, 손 닿는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낡은 286컴퓨터뿐이었다.
 정릉 산꼭대기에 있던 자취방은 책받침만한 들창으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를 제외하면 아무런 풍경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곳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한국어 멘트가 나오지 않는 AFKN FM을 하루종일 틀어놓고 자판을 두들기며 소설을 썼다. 왜 시간을 보내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입대하기 전에는 하루하루가 너무 지겨워 성북동에서 압구정동까지 걸어갔다가 해가 떨어져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방위 시절에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컴퓨터에다 하염없이 입력한 적도 있었다. 내가 뭔가를 쓰게 됐다면 그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20대 초반의 나는 시간의 흐름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이유가 왜 이런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됐다.

3. 59
오만한 반 다인이나 똑똑한 에코와 톨킨을 제외하면,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런 소설을 가리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쓰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일반인의 처지에서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받았을 때 붙이는 이름인 듯하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4. 65
'내가 왜 글을 써야만 하는가' ... 등단했다고 금배지를 달아주는 것도 아닌 바에야 문학인의 명예라는 건 불멸과 관련한 것이다.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작품이 영원히 남아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 그런데 이건 근본적으로 내 폐쇄적인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 나는 글을 긁적이기 시작했다. 글쓰는 일이 영화감독처럼 다른 스태프와 함께 일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면 나는 퍼즐왕이나 등대지기가 됐을 것이다.

5. 66
1999년쯤이었다. 그 즈음 나는 내게 돈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나 문학을 쇄신하는 사상이 담기지도 않을 게 분명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내려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6. 80
 할 일이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하루종일 뒹굴뒹굴 책이나 읽으면서 보내는 일이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하루가 저물었다. 아무리 책을 천천히 읽어도 언제나 시간이 남았다. 그렇게 느릿느릿 책을 읽었는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창 밖을 보면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 그게 너무나 신기했다. 그 당시에도 신기했고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흐르지 않는다면 세월이야 흐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하루종일 시간을 두고 책을 읽기만 했었다.
 그 시를 읽은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책을 펼치고 읽다가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경우에 쓰는 것이리라.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높다란 마루에서 거울을 보고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처럼 된 것을
- 이백 '장진주' -

7. 93
 나는 밤을 사랑한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검은 얼굴을 지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눈들은 저마다 빛을 낸다. 그 빛 속 하나하나에 그대들이 있다. 외로운 그대들, 저마다 멀리 떨어진 불빛처럼 멀리서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그대 창으로 부는가, 그런 걱정이 든다. 하지만 그건 멀리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빛이다. 한때 우리는 너무나 가까웠으나, 그리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밤의 얼굴에다 대고 나는 입김을 분다. 내 깊은 숨들이 조금씩 어둠의 물결 속으로 풀려나간다. 이제 나는 점점 줄어든다. 이제 나는 점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이제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밤으로 나는 스며든다. 그대를 생각하며 밤을 마주할 때, 나는 비밀이 된다. 무엇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된다.
 
8. 107
그런 한심한 꼴로 학교를 다니자니 늘 드는 생각이 내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 선택에 어떤 숙명 같은 게 있지 않겠는가 하는 체념이었다. 그게 아마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이면 거의 50매에 가까운 글을 쓰는 생활이 1995년부터 이어졌으니 숙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숙명이 그토록 간단한 과정을 통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진정 구르는 돌처럼 그렇게 굴러다니다가 낯선 곳에 머무르는 게 삶이란 말인가?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데 내 마음에는 의문만 잔뜩 끼었다.

9. 109
자기가 뜻한 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거지에게 동전을 던지다가도 내일이면 그 거지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구걸할지도 모르는 삶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고 밥 딜런이 그 노래에서 한 말이다. 자신이 뭔가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의 배음을 지켜가는 알 쿠퍼의 오르간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런 자신이 어설프게만 느껴진다면 밥 딜런의 말처럼 '소리를 키우도록.' 때로 단순히 소리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음반에 참여한 역사적인 키보디스트가 탄생하기도 하니 말이다.

10. 110
나는 이안 와트의 '소설의 발생'을 공부하면서 소설에 대한 견해를 비로소 가질 수 있었다. 아마도 와트의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소설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11. 124
 그 공허감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세계였던 것이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이, 새가 알을 깨듯이 우리는 자폐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세계 속으로 입문한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사람이 됐다. 내 생활을 뿌리째 흔드는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 무시무시한 공허 속으로 들어가고픈 욕구를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12. 132
다음날,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13. 141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14. 164
때로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 그게 바로 젊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여름날 같은 것. 꿈꾸다 깨어나면 또 여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곳.

15. 171
 시인이 됐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생에 딱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얼마나 좋았던지 그날 학교에 간 나는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다 말고 1분 정도 큰소리로 웃었다. 밥을 먹던 아이들이 모두 나를 돌아봤는데,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크게 웃었다. 나는 이제부터 시인이다. 보들레르 정도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이라구. 짜식들아, 그게 뭔지 알아? 마음 같아서는 교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로 하루종일 떠들어대고 싶었다. ...
 그리고 그게 다였다. 왜 그런 것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시인이 되어서 일어난 일은 그게 다였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등단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16. 177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습니까? 라고 스님이 말했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책 표지를 보여주며 랭보의 시집입니다, 라고 말했다. 잠시 입을 오물거리던 스님이 보리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말했다. 장차 시인이 될 생각인가요? 조만간 군인이 된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장차 뭐가 될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사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스님은 다시 입을 오물거리며 손을 크림빵으로 뻗었다. 나는 다시 랭보의 시로 눈을 떨궜다. 그때였다.
 10년 뒤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사람이 돼 있을겁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스님이 그런 예언을 서슴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내 가슴은 쿵쾅거렸다.

17. 202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18. 242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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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잠들기 전, 귀찮은 일 한 가지를 정하라.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해치워라. 벌써 한 가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며, 또 이를 통해 그날 하루 에너지와 활력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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