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3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2. 54
나는 진짜 글쓰는 재능이 풍부했다기보다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상대적으로 짧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고 나니 아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내게 아무런 목표도 없었다는 점. 취직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일주일에 몇 시간 되지 않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만약 주변에 마리화나라도 있었으면 그걸 피우면서 시간을 보냈을 텐데, 손 닿는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낡은 286컴퓨터뿐이었다.
 정릉 산꼭대기에 있던 자취방은 책받침만한 들창으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를 제외하면 아무런 풍경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곳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한국어 멘트가 나오지 않는 AFKN FM을 하루종일 틀어놓고 자판을 두들기며 소설을 썼다. 왜 시간을 보내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입대하기 전에는 하루하루가 너무 지겨워 성북동에서 압구정동까지 걸어갔다가 해가 떨어져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방위 시절에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컴퓨터에다 하염없이 입력한 적도 있었다. 내가 뭔가를 쓰게 됐다면 그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20대 초반의 나는 시간의 흐름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이유가 왜 이런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됐다.

3. 59
오만한 반 다인이나 똑똑한 에코와 톨킨을 제외하면,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런 소설을 가리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쓰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일반인의 처지에서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받았을 때 붙이는 이름인 듯하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4. 65
'내가 왜 글을 써야만 하는가' ... 등단했다고 금배지를 달아주는 것도 아닌 바에야 문학인의 명예라는 건 불멸과 관련한 것이다.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작품이 영원히 남아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 그런데 이건 근본적으로 내 폐쇄적인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 나는 글을 긁적이기 시작했다. 글쓰는 일이 영화감독처럼 다른 스태프와 함께 일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면 나는 퍼즐왕이나 등대지기가 됐을 것이다.

5. 66
1999년쯤이었다. 그 즈음 나는 내게 돈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나 문학을 쇄신하는 사상이 담기지도 않을 게 분명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내려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6. 80
 할 일이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하루종일 뒹굴뒹굴 책이나 읽으면서 보내는 일이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하루가 저물었다. 아무리 책을 천천히 읽어도 언제나 시간이 남았다. 그렇게 느릿느릿 책을 읽었는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창 밖을 보면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 그게 너무나 신기했다. 그 당시에도 신기했고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흐르지 않는다면 세월이야 흐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하루종일 시간을 두고 책을 읽기만 했었다.
 그 시를 읽은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책을 펼치고 읽다가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경우에 쓰는 것이리라.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높다란 마루에서 거울을 보고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처럼 된 것을
- 이백 '장진주' -

7. 93
 나는 밤을 사랑한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검은 얼굴을 지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눈들은 저마다 빛을 낸다. 그 빛 속 하나하나에 그대들이 있다. 외로운 그대들, 저마다 멀리 떨어진 불빛처럼 멀리서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그대 창으로 부는가, 그런 걱정이 든다. 하지만 그건 멀리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빛이다. 한때 우리는 너무나 가까웠으나, 그리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밤의 얼굴에다 대고 나는 입김을 분다. 내 깊은 숨들이 조금씩 어둠의 물결 속으로 풀려나간다. 이제 나는 점점 줄어든다. 이제 나는 점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이제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밤으로 나는 스며든다. 그대를 생각하며 밤을 마주할 때, 나는 비밀이 된다. 무엇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된다.
 
8. 107
그런 한심한 꼴로 학교를 다니자니 늘 드는 생각이 내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 선택에 어떤 숙명 같은 게 있지 않겠는가 하는 체념이었다. 그게 아마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이면 거의 50매에 가까운 글을 쓰는 생활이 1995년부터 이어졌으니 숙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숙명이 그토록 간단한 과정을 통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진정 구르는 돌처럼 그렇게 굴러다니다가 낯선 곳에 머무르는 게 삶이란 말인가?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데 내 마음에는 의문만 잔뜩 끼었다.

9. 109
자기가 뜻한 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거지에게 동전을 던지다가도 내일이면 그 거지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구걸할지도 모르는 삶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고 밥 딜런이 그 노래에서 한 말이다. 자신이 뭔가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의 배음을 지켜가는 알 쿠퍼의 오르간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런 자신이 어설프게만 느껴진다면 밥 딜런의 말처럼 '소리를 키우도록.' 때로 단순히 소리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음반에 참여한 역사적인 키보디스트가 탄생하기도 하니 말이다.

10. 110
나는 이안 와트의 '소설의 발생'을 공부하면서 소설에 대한 견해를 비로소 가질 수 있었다. 아마도 와트의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소설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11. 124
 그 공허감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세계였던 것이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이, 새가 알을 깨듯이 우리는 자폐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세계 속으로 입문한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사람이 됐다. 내 생활을 뿌리째 흔드는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 무시무시한 공허 속으로 들어가고픈 욕구를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12. 132
다음날,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13. 141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14. 164
때로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 그게 바로 젊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여름날 같은 것. 꿈꾸다 깨어나면 또 여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곳.

15. 171
 시인이 됐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생에 딱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얼마나 좋았던지 그날 학교에 간 나는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다 말고 1분 정도 큰소리로 웃었다. 밥을 먹던 아이들이 모두 나를 돌아봤는데,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크게 웃었다. 나는 이제부터 시인이다. 보들레르 정도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이라구. 짜식들아, 그게 뭔지 알아? 마음 같아서는 교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로 하루종일 떠들어대고 싶었다. ...
 그리고 그게 다였다. 왜 그런 것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시인이 되어서 일어난 일은 그게 다였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등단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16. 177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습니까? 라고 스님이 말했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책 표지를 보여주며 랭보의 시집입니다, 라고 말했다. 잠시 입을 오물거리던 스님이 보리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말했다. 장차 시인이 될 생각인가요? 조만간 군인이 된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장차 뭐가 될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사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스님은 다시 입을 오물거리며 손을 크림빵으로 뻗었다. 나는 다시 랭보의 시로 눈을 떨궜다. 그때였다.
 10년 뒤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사람이 돼 있을겁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스님이 그런 예언을 서슴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내 가슴은 쿵쾅거렸다.

17. 202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18. 242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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