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
취재편집을 하는 기자들로 가득한 편집부의 풍경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편집부 선배들은 필자와 통화하고 디자인부에 원고들을 넘기느라 매우 분주했지만, 일단 교정지에 코를 박으면 옆에서 불러도 잘 모를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화중에 온갖 책들의 문구들을 줄줄이 인용하는 것이었다. 수습사원인 나는 취재, 교정일을 배우는 것도 벅찼지만 선배들이 언급하는 책들을 읽어내느라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책들이야말로 소위 문화예술계로 진입하는 야곱의 사다리인 것처럼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아, 나는 왜 이리 무식하단 말인가! 어떨 땐 부끄러워서 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2. 22
귀가하면 선배들이 언급했던 책들, 특히 동서양의 고전들을 읽어내는라 잠을 설치곤 했다. 대단한 교양을 기른다는 생각보다 선배들과 필자 선생들의 말귀를 잘 알아듣겠다는 욕심에서였다.

3. 24
독자에게 책이 지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중 광고문안 쓰기를 통해 대중적인 감각을 익혔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리드 문안, 여운을 남기는 바디 문안, 간결하고도 핵심을 찌르는 문안을 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4. 33
출판사에 근무하다 보면 단순히 업무량이 많다거나 혹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존재의 결핍감을 느끼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내부 충전이 없는 상태에서 많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 쉴 수 없다면, 방법적으로 곧장 전직을 생각하게 된다. 좀더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일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자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휴식 혹은 여가선용 방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일테면 일주일에 반드시 영화 한 편은 본다, 음악을 듣는다, 혹은 산에 오른다 등등의 취미생활을 통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음 편집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컨트롤해야 한다.
 어쨌든 나는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해 전직을 했다. 또 더 좋은 조건의 전직 제의도 그 한 이유였다.

5. 41
- 질 데이비스 '편집자의 일' -
책 출판은 '마술'이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책을 출간하는 결정을 신비롭고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행운, 경이로운 판단력, 재능)의 결과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도 따라야 하고 이성적이면서 냉철한 판단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항상 효율성과 합리성을 지향하며, 보다 나은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출판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

6. 72
주파수는 달라도 모든 세상 읽기에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균형감각'이다. 어느 정도 균형감각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실패하지 않을 정도의 균형감각'이라고 답하겠다.

7. 73
출판기획의 기술이 있다면 '미세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판기획, 편집을 지망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저 사람이 미세조정을 잘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를 제일 먼저 본다. 편집자의 자질은 미세조정 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기획의 일관성 또한 이 미세조정에서 온다. 본문 글자 크기의 한두 포인트 차이에서, 서체의 굵고 가늘기의 차이에서, 먹 농도의 10퍼센트와 20퍼센트의 차이에서 기획은 달라진다. 과장이 아니다. 글씨 급수가 바뀌면 그 책의 성격 또한 연동하여 바뀌는 것이다.

8. 77
나는 내가 만든 책 가운데 '예술가로 산다는 것(박영택 지음, 마음산책)'을 성공한 사례로 들고 싶다. 저자의 역량과 성실성, 편집의 기능, 주제의 깊이가 비교적 균형 잡혀 구현된 사례로 들고 싶은 것이다.

9. 83
- 조우석, 중앙일보 -
산다는 일에 조금은 지쳤거나 왠지 심드렁해진 사람들이라면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저자의 말대로 지독한 가난과 궁핍을 자청해 '소신 공양하듯' 미술행위에 매달리고 있는 이 시대의 미술가 열 명의 삶은 그토록 절실하게 묘사된다.

10. 108
편집자의 삶에서 희열이란 자신이 의도한 기획이 성공했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것의 일차적인 평가는 저자다. 그 다음에 더 무서운 평가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독자다. 그렇다고 편집자가 그 평가에 계속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출판일에 흥미가 식는다. 편집자의 덕목은 '열정을 갖고 기획'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11. 111
- '혼의 전사'라고 불리는 일본의 전설적인 편집자 겐조 도루 -
작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스며나오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쓰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이상한 구석이 내게는 전혀 없었어요. 비뚤어져도 남보다 못해도 좋으니까 자신의 고유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나는 가짜입니다. 하지만 가짜에는 가짜의 영광도 있습니다. 진짜들을 프로듀스하는 행위죠. 그것은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작가가 고통으로 짜낼 작품에 자극을 주고, 끊이지 않는 폭주를 위해 보조선을 그어주는 것입니다. 작가로써는 가짜인 나라도 프로듀서로서는 진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2. 113
편집자가 기획을 성공시키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1. 세상과 삶의 여러 가지 양태에 대해 왕성한 탐구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 지혜로워야 한다.
3. 열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4. 감동 마케터가 되어야 한다.

13. 122
- 겐조 도루 -
전혀 빈틈없는 사람은 편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작가의 무의식에 있는 것, 엉켜 있는 것을 언어로 만들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의 찢어진 상처를 안고 그것을 도려내듯 쓰도록 해야 합니다. 편집자는 그 정신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행위에 열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건 언어가 상대의 가슴에 닿지 않으면 편집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 부담을 계속 주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요.

14. 143
- 조셉 골드스타인 '비블리오테라피' -
당신이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고 책 속의 체험에 몰입하고 있다면 먼저 당신 몸이 그것을 말해준다. 가령 두근거리는 가슴, 땀에 젖은 손바닥, 느긋하고 평온한 호흡 등의 신체적 표시는 당신이 책속에 몰입하여 느끼는 감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공포, 분노, 흥미, 즐거움, 수치심, 슬픔 등 당신이 실제생활에서 체험하는 것과 똑같은 정서다. 놀랍게도 당신은 책 위로 눈동자를 굴리는 동작만으로도 체험을 '실감'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책에 몰두하다 보면 우리의 실제 세상은 소설 속의 세상보다 덜 리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책이 우리의 '진정한' 느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마치 읽을 시간만 있으면 금방 돌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생활, 또 다른 마법의 장소를 확보한듯 느껴진다. 독서가 이런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소설은 종종 마법의 양탄자, 도피수단, 정신적 여행으로 불린다.

15. 147
최고의 기술은 '책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데 있다. 책을 사기 전에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안 사면 내가 손해지" "이 작가의 글이 내 일상의 빛깔을 바꾸어줄 거야" 하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 후 독자에게 현실의 어떤 것을 환기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면 편집자의 꿈은 현실화되는 것이리라.

16. 154
- 조은 '벼랑에서 살다'라는 책이 만들어진 과정 -
 마침내 시인은 나의 청탁을 수락했고 한겨울에 문을 걸어잠그고 전화선을 빼놓은 채 원고쓰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동안 나는 물론 지인들도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드디어 원고를 들고 시인이 출판사에 나타났다. "바위에서 물 한 방울 짜내는 심정으로 힘겹게 썼다"고 말하는 시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작가, 시인에 기대어 작업을 하는 편집자로서는 무엇보다도 이 순간이 가장 미안하게 느껴지는 때다.
 600장의 원고는 그야말로 말의 의미 그대로 단숨에 읽혔다. 시인의 산문답게 치열했고, 마치 한 편 한 편의 시처럼 단단했다. 좋은 원고를 받아든 당시의 기쁨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17. 225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문제에 대해 상술하자면 우선 무엇보다도 기자들은 이런 보도자료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는 사람임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사의 책에 도취된 편집자의 광고문안에 가까운 보도자료는 환영받지 못한다. 보도자료에는 무엇보다도 정확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그 사실들을 숫자로 계량화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가령 '유럽 등 세계 31개국에서 번역된, 저자의 세번째 저작. 두번째 저작 이후 5년의 집필 기간을 통해 생산된, 원고지 2,000장의 역작' 등등의 표현이다. 또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그 책의 차별성을 강조해야 한다. 한편으로 사진자료나 알기 쉬운 도판 등을 활용하거나 저자와 인터뷰가 가능한지 여부 등을 상세히 알려주는 것이 좋다.

18. 235
혼이 있는 홍보물,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했거니와 어떤 출판사의 브랜드를 떠올릴 때 혼이 있는, 즉 영혼이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그 출판사는 결코 독자들에게 외면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출판사가 하는 홍보라면 먼저 독자들이 신뢰로 대해줄 것이다. 출판사에 영혼이 있다 함은 무엇일까. 그건 '출판 정신'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트렌드에 혼이 빠져, 정신없이 쫓아가며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출판사의 인적 구성원들이 출판사의 출판정신에 동의하고 결정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9. 256
출판사에 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보고, 그 책들과 함께 성장한 세대가 많다. 따라서 한 권의 책을 낼 때에도 신중히, 이 책이 우리 출판사의 목록에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브랜드의 가치가 CEO의 몫이라는 점도 더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최고 경영자가 결국 그 브랜드의 가치를 담보해야 한다는 말이니까.

20. 260
 편집자는 저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관리자인가? 그렇지도 않다. 편집자는 출판경영자(시장을 인식한다는 점에서)이며, 출판영업자(독자에게 팔아야 한다는 점에서)이고, 또 독자(원고를 평가한다는 점에서)이며, 그 모든 것이다. 편집자의 정체성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내려는 노력 가운데 발생한다. 마치 비온 뒤 잠시 나온 무지개처럼.
 편집자는 독특한 잡식성의 동물이다. 뭐든지 취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취향에 몰두하니까. 새삼 편집광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명편집자가 된다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적인 호기심과 창의력, 편집적인 몰입과 추구 등등이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21. 276
-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
독자께서는 어떤 연유로 책을 읽으시는지?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이' '버릇이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강요로'라면 유감스럽게도 틀림없이 근대인이며, '그냥 재미있으니까' '진짜 좋아해서'라면 심각한 중독자일 가능성이 높다.

22. 282
후배나 동료 사이에서 인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미리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나는 항상 '일을 사이에 두지 않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서로를 좋게 평가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일 때문에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을 해야 하고 싸우기까지 한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서로 격론이 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하다. 논쟁이 두려워 일을 두고 적당히 타협하면 언젠가는 후회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과 일을 할 경우, '편안하다'가 아니라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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