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3
내가 엘리베이터 타는 걸 좋아한건, 바로 옆,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장소에 어마어마하게 큰 창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절망 속으로 몸을 날리기>라고 이름붙인 놀이를 했다. 코를 창문에 바싹 들이댄 뒤 마음속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도시가 발밑 너무 아득히 있어, 땅에 추락하기 전까지 나는 원하는대로 그렇게 많은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2. 70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 극도로 권위적인 제도는, 이 제도가 적용되는 국가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일탈을 불러일으키는데,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또, 기가 찬 상식 밖의 행동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관용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일본 괴짜를 만나 보지 않았으면 진짜 괴짜를 모르는 셈이다. 내가 쓰레기를 덮고 잠을 잔거? 별 놀랄 일도 아니다. 일본은 <맥없이 무너진다>는 게 뭔지 아는 나라이다.

3. 80
그런데 일본 여성에게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여성이라면-그런데 대부분의 일본 여성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이런 탈출구가 없다. 말하자면 이런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살하지 않은 모든 일본 여성들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녀에게, 살아 있다는 것은 무욕의, 숭고한 용기를 보여 주는 저항 행위이다.

4. 88
그가 하늘에 떠 있는 비행 기구를 발견하고 나더니 창문까지 뛰어갔다. 이렇게 잽싸게 이동하는 동안 후각 입자가 주변 공기 중에 불꽃놀이를 하면서 퍼졌고, 뛰면서 공기가 들썩이자 방 전체로 입자가 흩어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피트 크라머의 땀에서 썩는 냄새가 났다.
커다란 사무실에서,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도시 상공에 정기적으로 뜨는 광고용 비행 기구를 보면서 이렇게 어린애같이 들뜬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감동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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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고난이 그들의 고난보다 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 치욕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처지를 부러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의 처지는 나만큼이나 비참했다.
내 눈에는 매일 10시간씩 숫자를 베껴 쓰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경리들이 위대함도 신비함도 사라진 신의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로 비쳤다. 오랜 옛날부터, 서민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현실에 삶을 바쳐 왔다. 적어도 과거에는 이렇게 무의미하게 삶을 바치면서 어떤 절대적인 대의가 있다고 상정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환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 명분도 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던지고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일본은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내가, 놀라운 것은, 여기서 자살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 145
새해. 3일 동안의 의례적이고 의무적인 휴식. 이런 무위 상태는 일본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3일 낮 3일 밤 동안 음식을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미리 만들어 근사한 칠기함에 담아 놓은 차가운 음식을 먹는다.
이 명절 음식 가운데 오모치라는, 쌀로 만든 떡이 있는데, 예전에는 내가 죽자고 좋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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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 2005-02-16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노통 책 중 가장 재밌다고 하는 책이죠. 제가 노통에게 질리기 전에 읽어서, 저 역시 재밌게 읽었습니다

진진 2005-02-1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일한 노통의 책이었는데..다음에 다른것도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