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모리시마 쓰네오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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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작품을 읽으며 느낀 생각은

이제까지 남의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마주했던 마녀 사냥’, ‘마녀 재판은 작금의 

 이 땅에서도 있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작품을 읽다 보면 이런 내용 곳곳에 나오고 있어 이런 대목을 마주하게 되면 놀이동산에 있는 

귀신의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고는 한다 - 이 나온다.


자신이 신봉하는 신조교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자는 죽음으로 처벌하고자 하는

 불관용과 박해 정신에 있어서 신(개신교), (가톨릭) 양 종교의 입장은 완벽히 일치했다

이 문구를 갖고 우리 역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비슷한 사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자학의 신봉자였던 송시열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문난적과 관련된 

이야기다

사문난적이라 함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자의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내용이나 

해석을 가할 경우 송시열과 그의 추종 세력들은 그런 내용을 발설한 자를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에 어긋나는 언행으로 유교의 질서와 학문을 어지럽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문(斯文)은 문장을 쪼갠다, 갈라놓는다는 뜻으로 학문을 어지럽히는 행동, 난적(亂賊)은 나라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란 뜻으로 유학의 근본에 어긋나는 이단적인 학설 또는 정통에 어긋

나는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naver 참조)’

으로 규정하고 매장시켰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단어와 작품 내용이 오버랩 되었는데 본 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나의 이런 주장에 공감할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역사적 사실을 접하다 보니 특정 문구에서는 작금의 시대적 상황과 비교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데 해당 문구를 접하면서 그 전율의 정도는 극에 달했는데 그것은


근대적인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개혁 운동은 시작부터 최후까지 중세적 마녀재판이 이루어진 

 그 시기가 겹쳐진다


이 대목에서 할 이야기가 많다. 인문학이 꽃을 피우던 그 시기가 마녀를 처단하던 시기와 일치 

한다는 내용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우선 작가가 이야기한 르네상스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원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재생'(re)탄생(naissance)’을 뜻하는 프랑스 

언어에서 나온 것으로 구체적으로 14세기로부터 서유럽에서 시작된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

문화의 부활을 뜻한다.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교회의 권위가 쇠퇴하는 중세 말에서 근대 초에, 유럽인들은 중세의

크리스트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중세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당시 사회는 인문주의의 발달로 사람들은 중세의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

자연관, 세계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예술이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문화 운동을 르네상스라 한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문예를 되살리자는 것이지만, 단순한 

옛 문화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일찍이 도시가 번영하고 동방 무역이 

번창한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런데 논지에 따라 르네상스의 정의는 종종 크게 다르다.

, 문화운동을 지칭하는 경우와 시대 구분을 지칭하는 경우에 종종 혼선이 생긴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도 점성술과 마술 등 비과학적 사고가 많이 남아 있음이 밝혀졌다.

이로 말미암아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인가, 아니면 중세의 범위가 되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naver 참조)


매번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청산이다, ‘적폐다’, ‘구태를 벗어나야 한다등을 외쳤지

새 역사 창조를 위한 노력은 집권 초창기에만 반짝하고 보였을 뿐 과거의 좋은 정책이 후임

권력자에 의해 연속적으로 진행된 적이 거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르네상스에 대한 정의 구분이 헷갈리듯 새롭게 탄생한 정권이 국민이 바라는

새 정권인지 아니면 구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즉, 한풀이를 위해 탄생된 정권인지가 심히 우려

된다는 것이다

고난 끝에 정권을 잡아 기득권이 된 세력들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든다면서 바뀌기 이전

세상에서는 기득권이었고, 지금은 소수로 전락한 상대를 대상으로 주구장창 벌이고 있는 각종

행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아닌 다수결이 먼저이고 구태의 척결이

우선인 세상으로 변질되고 있는 듯하였으며, 정권을 잡으며 새로운 집권층이 외쳤던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며결과는 정의롭게

라는 슬로건이 진정으로 실현되고 있는지가 자못 궁금할 뿐이라고 주장하면 또 어느 누가 냄새가 난다는 둥, 웃자고 한 이야기 갖고 죽자고 덤빈다는 등의 이상한 논리로 은근 슬쩍 넘어가려 

할 것이고 논점을 흐리려 할 것이기에 무엇을 말하던 주류에서 벗어난 주장은 곧 이단이고,

사탄이고, 마녀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가 생기고는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인간의 존엄이 재평가되는 새로운 장을 열었던 르네상스의 진정한 

의미가 후대에 의해 논쟁거리가 되고 있듯이 이 정권 역시 진정성과 그들이 행하였던 업적도 

언젠가는 재 평가될 것이란 나름 무서운 생각을 해 본다.


종교개혁(과거청산)을 종교계(국가)의 르네상스라고 치자면 종교적 르네상스인(신진 집권층)

다들 열광적인 마녀 재판관이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런 마구잡이식 마녀 재판의 최전선에서 이를 부추긴 사람들은 일반 백성이 

아닌 역대 교황과 국왕, 귀족, 당대의 일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 등으로 대변되는 사람들로서 

마녀 재판을 벌였을 당시 주역들과 권력을 잡은 신진 집권층이 시대와 형태만 달리한 비슷한 

집단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머리가 아파온다.


나는 지금의 기득권층을 현대판 마녀 재판의 주역으로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김 대중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대통령처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정신을 상기해 어렵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았던 집단과 사람들은 

다수결이라는 미명아래 소수의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소수시절 받았던 섭섭함을 다수라는 이름 하에 과거의 다수들에게 되돌려 준다면 그것만큼 

치졸한 집단은 없을 것이다.

어느 수준 낮은 몰상식한 인간이 내뱉었다는 억울하면 다수가 되던가라고 외치지 말고 소통

하고, 타협하면서 민생이 반겨 하는 그런 토론의 장에 앉아 마음과 마음을 열어 놓고 이야기를 

한다면 안 풀릴 문제가 있겠는가?


나는 공수처 문제가 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단지 알고 있는 하나는 소수가 된 과거의 다수가, 한 때는 공수처 발족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점인데, 지금의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공수처는 절대 안 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들의 논리가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것이 선결되지 않고는 아무리 노력을 하고, 억울해 못 살겠다고 길거리에서, 신성한 국회

의사당에서 자리를 깔고 누워 항의해도 다수의 국민들은 과거에 다수였던 소수는 발목만 

잡으려는 치졸한 귀태라는 소리 밖에 들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서로가 한발씩 물러서 소통하고 타협하고, 대화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현재의 기득권은 과거의 기득권에게 너희들이 자행한 마녀재판을 청산하기 위해라는 소리를

현재의 소수들은 다수의 힘으로 밀어 부치는 마구잡이식 마녀 사냥을 한다라는 다람쥐 

쳇바퀴식 비난전만 벌어질 것이 자명하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의 진정한 르네상스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

지는 나는 물론이거니와 국민 모두가 각고의 자기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마녀 사냥을 종식시킨 주역이 다름 아닌 학식도, 명성도 없는 일개 상인 

,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두서 없이 정리해 보면


- 마녀가 박해를 당한 것은 마녀라서가 아니라 마녀가 주술을 이용하 사람을 죽이거나 농작물을 

  말려 죽이는 등의 악행을 저질러서였다. 마녀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마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녀가 행하는 반사회적인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 성서에서 마녀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구약성서는 극히 소수, 신약성서는 전무했는데,

  구약에서 마녀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22:18)’라는 모세의 말을 후일 마녀재판관들이 

  인용하면서라고 한다.


- 12세기 남프랑스에서 발발한 대규모 이단 운동과 이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준 충격,

  즉,  신의 나라가 붕되될지 모른다는 위기였다

  이단 운동이 일어난 원인은 강력한 교황의 권력과 이를 뒷받침한 성직자의 독선적인 우월성 

  때문이었다. 이 무렵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이 이를 부채질했다.

  인노첸시오 교황이 인민이 퇴패한 주원인은 성직자이다. 신앙이 죽고, 종교는 손상되었으며

  이단자가 증가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라고 이를 인정했다.


-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단을 멸하기 위하여 전도사를 남프랑스로 파견하는데 주축 세력은

  ‘도미니크 수도회를 만든 성 도미니크였다.(알비 십자군)

  알비 십자군은 1229년에 해산되지만 이단 심문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십자군이 탄생한다.

  마녀 재판은 이 새로운 십자군에서 태어난 중요한 사항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단 심문에

  집중하자 개혁문제를 잊고 광신적인 주의 충직한 개가 되었으며 이단을 촉발시킨 타락한

  수도사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권위에 아첨하며 사리사욕에 눈이 먼 교황청 소속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 당초 마녀는 이단 심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녀를 싫어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일반 대중과 

  세속 재판관이었다. 교회는 오히려 마녀를 감쌌다.  이단자 처단 운동이 격화된 11~12세기 

  무렵부터 이단자를 재판하는 교회 측 법정에서 마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 마녀는 마녀가 행한 형사범적인 행위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 이전에 악마와 결탁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타락때문에 재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악마와의 결탁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유래했다.

- 이단 심문과 마녀 재판이 열렸던 중세는 신앙의 시대가 아닌 불신의 시대였다.

  특히, 템플 기사단에 행해진 엉터리 마녀 재판은 마녀가 정치적 도구로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템플 기사단 사건으로 강력한 왕권과 템플 기사단의 막대한 부를 챙기게 된다

- 프랑스의 잔 다르크의 이단 심문은 모두가 미워하고 기피하며 싫어하는 마녀 이단자로 꾸민 

  영국의 정치적 책략에 의한 희생양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 마녀 집회에 참석한 신참 마녀는 악마와 결탁했다는 증표로 몸의 특정 부위에 소위 마녀 

  마크가 새겨져 있다고 믿었으며, 이 마크가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을 경우 전신을 바늘로 찔러 

  무감각한 부위를 찾았다. 그 부위가 마크가 숨겨진 곳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바늘로 찌르기 업자의 정식 조합이 조직되기도 했다고 한다

  전문가는 수익을 늘이기 위해 부정한 도구(몸을 찌르면 바늘이 몸이 아닌 기구 안으로 들어

  가는 장치)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 14살 이상의 남자, 12살 이상의 여자에게는 이단을 고발할 의무가 있었다.

- 마녀로 처단되는 자는 사후 재산으로 마녀 사형 집행에 소요된 비용을 납부해야 했다.

  그리고 남는 돈이 있을 경우 마녀 재산의 3분의 2는 주교의 손에, 나머지는 재판관의 

  들어 갔다고 한다막대한 부를 소유한 유대인이 이단 적발의 타킷이 된 것은 몰수 재산액과 

  이단 추궁 열기가 정비례했다.

- 잔인한 도살에 의한 죄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겼고, 새로운 연금술은 사람의 피로  금과 

  은을 만들었다.(코넬리우스 루스 마법의 진실과 거짓, 1592)


- 이단 심문관은 신앙의 관리와 단죄는 이단 심문관의 권한이다. 이 권한은 다른 모든 권한

  위에 존재하며, 이를 방해할 그 어떠한 법률도 없다며 그 위세를 과시했다.

- 근대적인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개혁 운동은 시작부터 최후까지 중세적 마녀재판이 이루어진

  그 시기가 겹쳐진다.

  1600년을 중심으로 100년간은 마녀사냥의 절정기임과 동시에 또한 르네상스 운동의 절정기

  였다, 종교개혁을 종교계의 르네상스라고 치자면 종교적 르네상스인은 다들 열광적인 

  마녀 재판관이었다. 휴머니즘과 실증주의의 시대였던 르네상스 시대는 한편으로는 잔학과 

  미신의 시대이기도 했다.    

  최전선에서 이를 부추긴 사람들은 일반 백성이 아닌 역대 교황과 국왕, 귀족, 당대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이었다는 이다.


- 마녀 개념을 장착한 것도 그것을 또 이단심문에 적용하여 마녀재판을 시작한 것은 구교도이나

  마녀 재판을 화려하게 만든 것은 신교도이다.

- 마녀재판에 관한 한 종교개혁은 종교 제도 개혁일 순 있어도 종교 정신 개혁은 아니었다.

  개혁자는 옛 교회의 독단주의에 항의했고 직접 성서로 귀의했다개혁자에게 하나님 말씀의 

  해석이란 단 하나뿐이었다. 그 단 하나의 해석이란 오로지 자신의 해석이었다

  신교의 불관용이 여기서 생겨났다.

  따라서 신의 말씀은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해석된다고 여긴 루터는 코페루니쿠스를 졸부

  점성술사라 매도했고, 지동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마녀를 재판하는 자의 부정과 악덕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는데, 그들이 저지르는 악덕 행위 

  자체보다는 신의 이름으로행하는 일이라고 확신한 탓에 그들이 신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구제불능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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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나에게 - 불교철학자가 40년 동안 찾은 고독의 조각들
스티븐 배철러 지음, 이영래 옮김 / 유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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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1


작품을 읽다 보면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접하고 느껴지는 기쁨은 복권 1등에 당첨된 경험은

없지만 마치 복권 1등에 당첨된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애써서 고르고 고른 작품이 황당하기 그지없을 때 다가오는 서글픔이란 분노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작품 값이 아깝다는 생각 이전에 출판사에 대한 분노와 함께 

나의 짧은 안목을 자책한다. 그리고 슬그머니 출판사를 다시 한 번 훓어보게 된다.

독서인의 한 사람으로서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가급적 이 작품을 고르려면 인내와

관용을 갖고 선택하시되 그런 것이 없으신 분들은 회피하시는 게 좋을 듯………


책 읽다 어이 없게도 나는 고독사 할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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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비로소이다 - 송익필 노비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정치 나는 OO로소이다
임상혁 지음 / 역사비평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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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7


작품을 읽기 전에 구봉 송익필 선생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으나 구봉 선생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못해 

아는 게 별로 없어 또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게 옳지 않기에 율곡 및 성혼 선생과 벽을 나란히 한 실력자라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추후 관련 작품을 접하면 상세히 적시하겠다)

아무튼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항은 구봉 선생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우리 나라도 한 때 이야기할 때마다 잘 되도 누구 탓, 잘못 되면 더욱더 누구 탓을 외치던 시대가 있지 

않았던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조금만 이상하면 구봉 탓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다.


구봉 선생의 명성을 엿볼 수 있는 사항을 작품에서 찾아보면 인조 때의 명신인 김류는 재상이 되었을 때 

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 그날 구봉께서 몸소 차근차근 가르쳐주신 덕분이다

라고 했을 만큼 뛰어난 분이셨고 또한 사계 김장생을 율곡의 문하로 배정하는데, 그가 이이로 부터 배운 

바도 적지 않으나 일찍부터 수학하여 평생 스승으로 섬긴 이는 구봉이었다고 한다.

작품의 개요는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안씨 가문이 송씨 가문을 박살내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 안씨 집안 사람들과 측근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 과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여종 비첩

(중금)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송사련이 자신의 처남(정상)’과 함께 관가에 고발하면서 일이 벌어진다

그 결과 안 씨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지만, 100년이 지난 어느날 안 씨 집안이 재기하면서 당시의 그 사건을 

들추어내 속된 말로 고소고발 전을 벌여 송 씨 후손들을 노비로 삼는다는 이야기며

그 송 씨 후손의 한 사람인 구봉 선생도 곤혹을 치룬다는 이야기로 작품은 일련의 이러한 과정이 타당하고도

합리적인 것이었느냐 하는 점에 대한 고찰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백 년 전에 일어난 일을 갖고 현재를 단죄한 내용이라는 점인데 그 과정이 합법성을 가장한

위법이 난무하였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고증한 작품이다.


위에 언급한 내용 외에 세세한 내용을 축약해 여기에 올리는 것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또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되어 이 공간에 작품을 축약해 올리지 않으려 한다

어찌되었던 중언부언하는 이야기지만 작품을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읽다 보면 한마디로 이야기해 

죽었다 살아난 권력이 원한을 가진 가문을 집요하게 망가트리는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작품 내용과는 별개로 다시 한 번 확인한 사항은 송강 정철에 대한 이야기다.

후세들이 그리 좋은 인물로 평가하지 않는 인물인 송강 선생에 대해 저자는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선생을 

변호하고 있는데 지난 2015년 송강 정철을 주인공으로 놓고 토론식으로 전개한 작품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오항년 지음/너머북스에서도 밝혔듯이 정철 선생은 후세 역사학자들  평가에 의해 억울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본 작품에서도 역설하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을 읽다 보니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권력과 쓰러져 가는 권력간의 혈전을 보는 

듯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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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 살기 싫어 몽테뉴를 읽었습니다
이승연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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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6


코로나로 인해 오랜 시간 외국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에 가까운 삶을 살다 보니 산다는 게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등등을 고민하다 살고 싶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 작품을 접했다.


당초 해당 작품을 선택한 의도와는 달리 책장을 넘기다 보니 본 작품이 과거(2019)에 몽테뉴의 철학을 

소재로 출간된 작품 어떻게 살 것인가?’(사라 베이크웰 著, 책 읽는 수요일라는 작품과 유사한 생각이 들어

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당시 해당 작품을 읽고 정리해 둔 서평을 찾아 여기에 일부를 언급해 

본다.  당시 작품을 읽고 나는 이렇게 정리를 했었다.

1.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2. 주의를 기울여라            3. 태어나라  

4. 책을 많이 읽되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5.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라               

6. 작은 요령을 부려라                  7. 의문을 품어라               8.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  

9.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라                                        10. '습관'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11. 절도 있게 살라                    12. 인간성을 지켜라            13. 아무도 한 적이 없는 것을 해 보라

14. 세상을 보라                        15. 너무 잘하지는 마라   

16. 철학적인 사색은 우연한 기회가 있을 때만 하라                 17. 성찰하되 후회하지 마라            

18. 통제를 포기하라           19. 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되라      20. 인생 그 자체가 해답이 되게 하라  

(* 소 제목만 놓고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니 해당 작품을 사서 읽어보시라!)


당시 작품을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은 [까르페 디엠]이었으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렸지만 아직 진정한 

카르페 디엠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 나의 경우 까르페 디엠의 화두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딩 선생이 학생들에게 강조한 화두였는데 작품을 

  읽은 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나는 그 화두 속에서 방향을 잃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기가 어려운 화두가 아닌가 생각한다 -


시간이 흘러 또다시 새롭게 접한 몽테뉴 철학을 이야기한 본 작품을 통해 추가적으로 두 가지 사항이 눈에 

들어와 여기에 옮겨 보면, 하나는 70% 자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도움은 필요한 사람이 요청할 때 도움을 

주어라였는데 이런 문구를 선정한 배경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야기하고 싶지 않다.


저자는 작품 에세에서 저자가 구상한 글 주제에 상응하는 문구를 발췌하여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투영시켜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고 있는데, 나의 으로 보았을 때 저자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생활 속의 분노와 직장인으로서의 아쉬움’, ‘억울함’, ‘펼치지 못 한 자신의 꿈(?)’ 등을 전체적으로 깔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크게 든 작품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386세대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나의 그런 생각을 확신하게 해 주는 느낌을 상당히 크게 받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 역시 

분노에 찬 작품을 써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간에 작품 내용이 나의 기대를 져버릴 무렵 인상적으로 다가 온 두 문구가 있었는데,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서 답답한 요즘 세상에 나를 다른 이들도 동감할 수 있을 – 흔든 문구가 있어 여기에 

올려보면,


 “어떤 곤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무엇이 가장 유리한 일인가를 택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곤혹의 상황에서 

  묘안이나 대책을 세워볼 수 없을 때 가장 확실한 길은, 더 공명정대한 방침을 잡아가는 일이다.(P134)"


라는 문구로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꼭 쉽지만은 사항으로, 후회로 점철된 나의 젊은 날에 

대한 반성을 듣고, 기록한 글처럼 여겨져 해당 문구를 읽고 또 읽으며 좋은 문구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려 

보았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위 문구는 인생을 사는 과정에 마주하게 되는 어려운 순간에 꼭 기억했으면 하는 문구로 

특히 사회생활을 하려는 초년생들이라면 꼭 마음에 새겨두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적어 보았다.


두 번째는 위에서 작가가 분노에 찬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유추한 근거는 ‘386세대’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한 내용 속에 있는 문구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불완전한 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한 정부가 불완전하다고비난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수고 그 대신 더 나은 상태를 세우는 일은한 정부를 비난한 자 중에 수많은 

 사람이 헛수고만 했다.(P142)”


작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촛불 받침대들의 타락상(일부 사건은 아직 판결 나지 않아 전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을 보면서 언제까지 권력을 잡은 자들이 반복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뻘짓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저자의 외침과 그런 외침에 동의하는 나의 관점에 힘을 실어주는 

문구를 어느 신문 오피니언 까페 기사에서 찾으며 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386들은 젊은 나이에 사회 곳곳의 요직을 차지하더니 자녀 입시 비리 의혹 등으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들이 벌이는 각종 내로남불의 작태를 볼 때마다 텍스트를 이용해 관람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작업을 하는 미국 미술가 제니 홀저(70)의 대표작이 생각난다. ‘권력의 남용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Abused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 1982년 뉴욕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에 게시돼 수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한 때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문장으로 꼽힌다


는 문구였다.

 

전임 정권에서 이루어진 통수권자들의 의혹의 시간에 대해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금융비리로 차떼기 

정당이니 어쩌니 하면서 해 쳐먹는 방식과 스케일만 달라졌지 구태의연한 비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는 

작금의 기득권층을 보면 답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지적질 할 때 지적질하는 자는 한 손가락을 사용하여 상대를 향(지적)하지만 나머지 네 손가락 

중 세 손가락은 굽혀져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지적질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적을 할 때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점검하고반성할 점은 없는지 

앞으로 이런 자세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몰랐다면 지금부터라도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본 작품을 좀 더 객관적이고도 생활철학적 지침으로 활용할 부분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집필 당시의 의도와 배경을 확인해 보려 했으나 타인들의 서평이 나의 관점과 너무 

달라 그냥 그대로 덮고, 작품에서 내가 공감하는 부분만 정리해 보았다.


몽테뉴는 갔지만 그가 한 이야기는 아직도 살아서 우리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

가수 아니 예인 나훈아로 인해 소크라테스가 테스형으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몽 형하고 조만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자못 궁금하다.


- 우리가 죽음에서 주로 두려워하는 것은 습관적으로 죽음에 앞서 오는 고통이다.(P 20)

- 많은 사람이 사실보다 공상 때문에 죽음을 더 크게 본다.(P 28)

- 우리는 죽음의 근심으로 삶을 방해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을 방해한다.(P 29)

- 현재에 만족하는 정신은 미래의 일로 번민하기를 꺼린다.(호라티우스, P 29)

-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죽음을 대비하라.(P 33)

- 삶의 효용은 공간에 있지 않고 사용에 있다.(P 35)

- 실컷 산다는 것은 세월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그대의 의지에 달려 있다.(P 35)

-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터무니 없는 기적 없이 평범한 사람의 본보기로 질서 있게 사는 인생이다.(P 36)

- 삶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집중의 속도를 올려야 한다.(P 39)

- 침묵이 어떤 말보다 강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로써 위로 방법을 찾는 듯하다.(P 55)

- 어떤 괴로운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것을 억제하기 보다는 바꾸는 편이 간단하다.(P 57)

- 변화는 언제든 괴로움을 덜어주고 풀어주고 흩어준다. 싸워서 괴로움을 이길 수 없다면 빠져나가며 그것을 

  피하려고 비켜선다.(P 58)

- 늘 고통에 대항해서 마음을 긴장시켜야 한다. 물러나거나 뒤로 빼면, 고통은 우리를 위협하는 파멸을 

  불러온다. 육체가 굳어질수록 짐을 지기에 든든하듯 마음도 그렇다.(P 58)

- 멕시코인들은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아이야, 너는 참으라고 이 세상에 나왔다. 참아라견디어 내라 

  그리고 잠자코 있어라라는 말로 아이를 맞는다. (P 58)

- 피할 수 없는 것은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P 59)

- 어떤 신이 고통쾌락을 뭉쳐서 뒤섞어 놓으려고 했다가 그것을 잘해낼 수 없자, 이들을 꼬랑지끼리 

  붙들어 매어놓기로 작정했다.(소크라테스, P 59)

- 불행을 갖지 않음은 많은 행복을 가짐이다.(P 59)

- 소통은 공감이 전제될 때 의미 있는 것이고, ‘소통이라는 것이 꼭 말일 필요도 없다.(P 61)

- 우리가 진짜 불행한 이유는 불행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부정적 의미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P 64)

- 인생은 고해(苦海)’. 그러니 운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P 64)

-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는 걱정하지만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충족되기를 원한다.(P 70)

영광에 도달하는 가장 가까운 길은 우리가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을 양심으로 하는 데 있다.(P79)

- 정신의 가치는 높이 올라가는 데 있지 않고, 질서 있게 살아가는 데 있다.(P 80)

-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 진리가 시공간을 관통하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 늘 같은 형태와 색깔을 띠기 

  때문이다 (P82)

- 나는 내가 곤궁할 때 나를 맡길 가장 안전한 곳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몽테뉴, P 87)

- 사람들은 쉬운 길을 택한답시고 남의 힘에 의지하며 몸을 던진다.(P 87)

- 우리의 소유와 필요를 확대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운과 역경의 타격에 부닥친다.(P 88)

- 한 사람의 꿈이 야심과 동의어가 될 때 그 꿈은 사람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P 90)

- 야심이 사람을 망가뜨리는 이유는 바로 그 근저에 비굴함과 노예근성이 있어서다.(P 91)

- 인간의 행복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P 99)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줄 아는 일이다.(P101)

- 불확실성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고, 인간보다 더 가련하고 오만한 것은 없다.(플라니우스, P 106)

- 행복 지수는 감탄의 횟수와 정비례한다.(P107)

- 인간 본성의 가장 큰 결함은, 우리의 욕망이 끊임없이 다시 젊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한 발은 무덤 속에 있는데도 욕망과 추구는 출생만 하고 있다.(P112)

- 죽음은 우리 의지에 달렸다. 죽음에 대한 자유가 없다면, 삶이란 노예가 되는 일이다(P117)

- 상대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자신을 속이기보다 자신이 맡은 임무를 실패하는 게 낫다.(P131)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진실한 영광이 있다용감성은 팔이나 

  다리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견고성에 있다.(P133)

-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의지가 틀어지는 경우는 빠른 

  길을 가려고 할 때가 아닌가 한다.(P137)

- 운으로 얻은 재산을 있는 그대로를 맛보려면 마음이 있어야 한다그것을 소유함이 아니고 누릴 줄 

  알아야만 행복하게 된다. 그 소유자가 건전해야만 획득한 재물을 잘 누린다.(호라티우스, P163)

-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강도가 아닌 빈도이다.(P165)

- 어린애의 교육에서 의욕과 애정을 돋우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P200)

- 욕망은 결핍일 때눈 집착하게 되고, 풍요일 때눈 피로를 느낀다.(P226)

- 신이 가르치는 사랑을 내가 아는 바대로 실천하고 산다면 나로서는 그게 믿음이고 종교다(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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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가 말하는 홀가분한 죽음, 그리고 그 이후
정현채 지음 / 비아북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권유도 7


하나님을 믿으며 천국과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나로서는 죽음을 학문적, 경험적으로 해석해

기존의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런 작품이 상당히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나 작품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지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환생론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는 계속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내 주장이 옳고, 확고하다면 남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경청해 보는 것이 시각을 넓히고 

삶의 지평을 넓히는 진정한 탐구의 자세라 생각하는 바이다.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기독교적 천국관의 간극을 

어떻게 메우는 것이 참다운 기독인의 자세일까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작품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물질과는 다른 차원인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을 과학의 잣대로 들여다봐야 건질 수 있는 게 

  없다과학 교육을 받은 정신과 의사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연구해 본 결과 사후 세계의 증거를 

찾았다고 하니 귀 기울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작품을 접하면서 이 문구는 정말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이런 관점도 있을 수 있으니 생각해 보고 관심이 있는 사람은 더 

공부해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 증거를 내놔라’,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할 이야기가 없다.

다시 이야기해 웃자고 한 이야기를 듣고,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인간이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과거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를

통해 또 부친의 죽음을 통해 그 죽음이라는 실체가 누구에게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으나 그 당시만 해도 죽음은 나와는 아직 관계가 그리 크지 않은 하나의 사실이라는

생각 속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죽을 것이고 언제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나의 사고

속에 잠재하면서 죽음은 이제 내 주변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

학창시절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젊은 나이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제는 웬지 그 죽음이 모두에게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작품을 읽으며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여러 사례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이야기를 하면 책 한 권으로 표현하기가 부족해 그냥 조용히 정리하고자 한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해 내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결과와 저자의 내용이 상통

하는 것만 여기에 정리해 보았다.

- 훌륭한 죽음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며그 일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화해이다.


- 조선시대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 것은 '유교'였는데,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음을 혐오하고 현세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종교학자들은 분석한다.


- 사후세계에 대한 상당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신비가 '스베덴보리'는 

  "죽어서 육신을 벗어난 신참 영혼은 사후 1차 영역에 머물게 되는데 고독감, 무력감결핍감

   고통, 환멸 같은 감정을 느껴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다. 이때 마음을 열고 간절히 기원하면 

   수호영혼의 도움을 받아 지상에서 사는 동안 오염되었던 삶을 정화하게 되고 손상된 영혼을 

   치유하고 복구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원래 맑고 순수했던 영혼을 회복하고 

   나면 영혼의 주파수가 높아져 완전히 다른 상위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 ‘신비가란 기존 종교의 도그마적인 교리를 거부하고 의식 상태의 변성을 통해 궁극적인

      실재와의 조우와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 영매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가진 관심, 불안, 실수 집착 등을 사후세계로

   계속 지니고 간다.


- 근사체험을 경험한 제임스 밴 프래그는 사후 세계로 건너간 영들과 만나 오랫동안 모은

  정보 중 특이한 점

   1) 저쪽 세상에 가면 인생을 회고하는데, 자신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똑같은 상처를 경험한다.

   2) 삶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은 다른 형태로 다른 차원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체험을 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이다.

                                                                                                      (샤르댕 신부)

-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며 각 영혼은 거듭되는 환생을 통해 지상의 육체적 존재와 비물질적인 

  영적 존재 사이에서 진보와 퇴보를 거듭한다.

  많은 사람들은 카르마를 징벌의 과정으로 여겨 현생의 삶이 과거 생에서 행한 잘못에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르마는 징벌이 아니라 각 개인이 과거 생에서 행한 실수를

  긍정적인 방법으로 보상하는 기회이다.

- 기 기독교에서도 환생론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으나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기독교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이 삭제되었다.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진보적인 

  지성들에 의해 환생론은 다시 지지를 받게 되었다.

- "가족이란 전생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이생에서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맺어진 인연이

  다. 각자 역할을 맡아 영적인 성장을 서로 돕는다"(영매리사 윌리엄스)


- 우리는 반복되는 삶과 죽음을 통해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우주를 오가며 지구에 온 목적

  을 통해 완성할 때까지 길고 긴 여정을 계속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인 윤회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내재된 불성이나 신성을 조금씩 

  실현해 나가도록 이끈다.   


- 죽음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인간의 육체는 영원불멸의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로스 박사)


- 대다수의 과학자와 의사들은 인간의 두뇌가 곧 의식이어서 뇌의 활동이 멈추면 의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근사체험은 뇌의 활동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과학자나 의사 들로서는 받아들이기 몹시 불편한 사실이다.

- 근사체험의 열 가지 요소

   1)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         2) 긍정적인 감정           3) 체외이탈의 경험    

   4) 터널을 통과함                   5) 밝은 빛과의 교신       6) 색깔을 관찰 

   7) 천성의 풍경을 관찰            8) 먼저 떠난 가족, 친지와의 만남     

   9) 자신의 생을 회고              10)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인지

- 근사체험 경험자는 인생의 목적을 더 잘 이해하며, 영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아울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큰 폭으로 감소하였다. 사후생에 대한 믿음과 일상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크게 증가

  

- 체외 이탈이란 의식이 에너지화가 되어 육체와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이야기해 자신의 몸을 빠져 나와서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는 상태로 근사체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 죽음을 맞기 직전이나 죽음을 맞은 바로 그 시각에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지 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삶의 종말 체험이다.

  여러 관찰을 통해 임종이 시작되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대상이나 존재가 마중을 

  나오며 또한 환자들은 현재의 세상과 죽음 이후의 세상을 함께 볼 수 있다고 한다.

- 임종이 임박하면 인간 뇌의 필터 기능이 약화되거나 해제되면서 보통 때에는 보거나 듣지 

  못하던 것을 인식하게 되는 상태, 이것이 종말체험의 실체이다.

- 임종이 임박한 환자에게 근사체험이나 삶의 종말체험 같은 현상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그러면 환자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을 훨씬 덜 느끼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근사체험과 더불어 삶의 종말체험은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이라는 것을 시사

  하는 것이다.

- 훌륭한 죽음의 주요 요소

   1) 통증 완화 조절             2) 명확한 의사 결정            3) 죽음 준비      

   4) 훌륭한 마무리 : 갈등해소, 인사

   5)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여                 6)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

   1) 사랑해요     2) 고마워요    3) 용서합니다     4) 안녕히 가세요

-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죽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끝나거나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 < D = S - M >에서 D Despair(절망), S Suffering(고통) 그리고 M Meaning(의미)

  뜻한다. 즉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절망에 빠지지 않지만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의미를 잃으면 절망에 굴복하게 된다는 뜻이다.

 

책으로부터 얻은 잡지식

- You Don't Know Jack." : 당신은 쥐뿔도 모른다

-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최고의 축복이다.(소크라테스)

- 인간은 저승사자의 입맞춤보다 더 달콤한 키스를 맛본 적이 없으리라.(신비가, 다스칼로스)

-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키케로)

-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폰 프란츠)

- 삶의 영예는 한 번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는 데 있다.(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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