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때문에 살 마음이 생겼고, 제목 때문에 책을 샀다. 앤서니 기든스의
『노동의 미래』(을유문화사, 2004)가 그 책이다. 원제(Where Now For
New Labour)를 보고 내용이 토니 블레어 주연의 영국 ‘신노동당’모험담
임을 알았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치하 11년, 존 메이저 집권 7년 동안
노동당은 철저하게 깨졌다. 그러니까 이 책은 1997년 정권을 쟁취한
노동당의 승리 교본이다. 그렇다고 절치부심(切齒腐心)이나 와신상
담(臥薪嘗膽)의 비장감이 전편에 흐르는 것은 아니고, 주조는 오히려
블레어의 얼굴 같이 ‘두루춘풍’이었다.
우파 학자가 ‘사민주의 세기의 종언’을 고하고, 좌파 지식인들마저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시대에 영국 노동당이 보여준 18년 만의 집권 시범은 그야말로 ‘사민주의의 마술적 복귀’라고 할 만하다. 그 마술은 손수건을 흔들어 비둘기를 만들어내는 따위의 눈속임이 아니라, 기든스에 의하면 노동당 지도부가 취한 철저한 ‘실용주의적 쇄신’의 결과였다. 거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클린턴식 미국 민주당이 영국 신노동당의 모델이었다”(28쪽)는 설명에는 갸우뚱하고 고개가 돌아간다. ‘클레어’니 ‘블린턴’이니 하며 양자가 짝꿍처럼 지낸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무어래도 클린턴이 사민주의자는 아니지 않은가?
기든스는 ‘제3의 길’ 전도사이고, 블레어의 노선 코치이다. 제3의 길은 심각할 때도 나오고, ‘심심할’ 때도 나와 다소 식상한 메뉴가 되어 버렸다. 1945년 종전 이후 제3세계 지도자들이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 건설을 외쳤고, 1960년대 동유럽에서 시장도 아니고 계획도 아닌 제3의 길 꿈을 가꾼 적이 있었다. 그 뒤에도 모방 간판들이 속출했다. 책에 붙은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이라는 부제로 미뤄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자본주의와 ‘낡은 사민주의’틈새에서 어떤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인 듯하다. 그러나 사민주의가 벌써 고전적 좌파 이념을 탈색한 것이니 그의 ‘새로운 사민주의’는 고전의 재탈색이 된다.
변신은 집권을 위한 긴급명령이었다. 당헌에서 공적 소유 조항을 폐기하고, 당내에 노조의 영향력을 축소한 블레어는 전통적인 노동 계급을 넘어 다양한 직종의 중간 계급에 의지했다. 승리를 위해 이념과 계급을 ‘쇄신한’ 노동당은 정부 서비스의 민간 개방, 평등 대신 기회의 평등 보장, 사회 정의보다 경쟁력 향상이 앞선 조세 정책, 역기능 방지를 위한 복지 축소 개혁 등 ‘노동당의 뉴딜’을 약속했다. 이렇게 되면 사민주의의 성형 수술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이다. 이것을 왜 제1의 길이 아니라 제3의 길로 불러야 하는지 나로서는 적잖이 의문이다. 아무튼 이를 바탕으로 기든스는 2001년 중임에 이은 블레어의 3기 연임을 자신한다.
발은 우향우로 돌면서도 입으로는 ‘새로운 중도 좌파’라니 미칠 노릇 아닌가. 그러니 반대파에게―예의 ‘낡은 중도 좌파’에게―쇄신은 전향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좋은 사회란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사회이다”(75쪽), “평등은 이뤄질 수 있는 것을 제한한다”(79쪽), “세금 인상은 성공에 대한 체벌로 널리 인식된다”(82쪽), “가난한 사람들의 참여는 경제 성장을 통해 이뤄진다”(133쪽) 등등의 대목은 그 전향의 물증이 될 만하다. 우파가 들으면 무릎을 치며 지당한 말씀으로 모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블레어가 대처 스쿨의 우등생으로 대처의 신임을 받는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그의 비판자들이 야유하듯이 확실히 기든스는 ‘적이 없는 정치’를 설교한다. 그러나 내부에 적을 만들고 있다. 이를테면 “의심할 여지없이 좌파의 일부는 좌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보다 우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더 행복해 한다”(33쪽)고 해당(害黨) 발언조차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우파가 정권을 잡아야 공격이 쉽고 좌파의 결속이 잘된다고 믿는 당내 ‘불평 분자’들에게 엿이나 먹으라는 말인데, 이거 좀 심한 것 아냐? 그러니 좌파보고 어쩌라는 거야? 스스로 불행을 참고라도(?) 좌파가 이기도록 하라는 거야, 좌파의 행복을 위해서(!) 우파가 이기도록 하라는 거야? 천사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정치에는 적이 있다.
19세기 중엽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를 적으로 겨냥했다. 그러나 20세기 말기의 ‘노동당 선언’은 고전적 사민주의, 전통적 중도 좌파 겨냥에 힘을 빼고 있다. 밖의 적이 비키는 대신 안에서 적이 자란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승리를 위해 한발 물러서느냐, 장렬한 전사를 무릅쓰고 신념을 지키느냐? 역사는 항상 문제만 제기할 뿐 그 대답은 사람이 찾아야 한다. 노동당 간판을 앞세운 정당이 단군 이래 처음으로 의회에 입성한 즈음 이 책은 8000원 본전의 몇 곱이나 되는 교사의 지혜와 반면교사의 경고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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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6 17:36 입력 / 2004.04.16 17:43 수정
자료출처 :인터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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