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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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덴마크의 소설가 이작 디네센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우리에게 말 걸고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소설을 만난다는 일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김애란은 이제 30대가 된 젊은 작가로 일찍이 전작 《달려라 아비》(2005)를 통해 많은 팬을 확보한 바 있다. 《침이 고인다》(2007)는 이후에 출간된 단편들을 모은 단편집으로, 이번 작품 역시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2~30대를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대개 사회와 타인들 사이에서 안정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 경제적인 결핍과 인간관계에서의 결핍의 문제는 바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닌 문제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 즉 ‘우리’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야말로 벼랑 끝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나’는 14평 남짓한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바람과 상관없이 학원 강사를 해야 하며, 심지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리 중임에도 운동회에도 나가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간신히 버티는 공간에 타인은 결국 방해꾼일 수밖에 없다(〈침이 고인다〉). 또한 이러한 현실에서 사랑하는 두 연인은 그 어떤 날보다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야 할 크리스마스라는 시간에서조차 단지 주변자로 머물 뿐이다.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공간)는 오히려 평소보다 (그리고 그 가치보다는 훨씬)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거나, 2시간 마다 새로 주문을 해야만 간신히 머무를 수 있다. 즉, 오직 끊임없는 ‘소비’ 속에서만 유지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조차 극심한 경쟁으로 얻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연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든(소비 경쟁에서 이기든 지든) 충족감보다는 훨씬 큰 피로감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성탄특선〉).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지나가는 곳인 줄 알았던 장소를 몇 년이 넘도록 여전히 맴돌고 있으며(〈성탄특선〉), 무수히 많은 장소들을 전전하였음에도(“번역 아르바이트, 커피숍 서빙, 화장품 회사 홍보직, 잡지 교열, 논술 첨삭, 영어 과외…”, 208쪽) 여전히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는 불투명하다(〈기도〉). 이것은 그야말로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모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며,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로, 그러니까 삶의 주체로 있을 수 없으며, 공간들의 부재-결핍 속에서 더욱 피폐해지고 파편화되며 고립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방법은 있는가? 즉, 다시 말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있는가? 아쉽게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김애란은 이번 작품까지는 아직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김애란의 소설 속의 ‘나’는 아직까지는 현실을 버거워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좁은 공간 속으로 숨어들고 마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사내에게 문자를 보낼까 말까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보내지 않는다”(〈기도〉) 그러나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즉 ‘우리’의 목소리로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축복이자, 나아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정서적 공간-토대 마련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세대의 소설’이 갖는 힘, 어떤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다. 아직까지 김애란은 젊은 작가라는 점, 또한 그녀가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전작보다 깊은 고민과 무게감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세대'의 작가로서 그녀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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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2 - 다큐멘터리 만화 시즌 1 다큐멘터리 만화 2
최규석.최호철.이경석.박인하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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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극적인 허구성이 없이 그 전개에 따라 사실적으로 그린 것”


다큐멘터리의 사전적 정의다. 이 정의에서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특정한 대상(‘어떤’)을 특정한 형식(‘허구성 없이’)과 내용(‘사실적’)을 통해 그려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련의 ‘관점’(그 대상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어떤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담을 것인지)을 상정한다.


휴머니스트의 <사람 사는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만화’를 표방한 책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시선은 우리의 삶, 그리고 그 삶의 토대인 사회를 향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시선이 흔히 닿는 도심이나 번화가가 아니라 흔히 닿지 않는 곳(파업현장이나 철거현장, 다단계에서부터 도심 속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을 속속 비추고 있다. 고시원과 헬스장, 다단계를 하는 젊은이의 삶과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들의 삶, 그리고 도심 속에 살고 있는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사회 곳곳을 비치는 다양한 시선들은 단순히 몇 개의 관점을 우리에게 획일적으로 강요하기보다는 우리의 시야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넓고 밝게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다큐멘터리 만화’라는 형식은 박인하가 2권 본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는 근대만화의 덕목 중 하나였던 ‘계몽과 풍자’, ‘해학과 유머’를 다시금 동시에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치밀한 현장 취재나 작가 개인의 경험이 녹아든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게 경험하고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2권에서 다단계에 빠진 이의 시선에서 청년들의 삶을 이야기한 박해성 작가의 〈열심히 살자〉와 임성훈 작가의 〈나의 애국…보수집회 답사기〉가 인상 깊었다. 〈열심히 살자〉에서 ‘다단계’ 빠져들게 되는 청년들의 불안은 그들이 ‘아픈 청춘’이라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성과 경제적 모순에 크게 기인한 것이며, 이것이 이들의 인간관계와 삶을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파괴하는지(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다단계 ‘선배’인 정유진 PD의 대사ㅡ“무섭지 않니? 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는 게.”)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임성훈 작가의 〈나의 애국…보수집회 답사기〉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기지 건설을 찬성하는 보수단체들의 시위 현장 한복판에서 능청맞게 유머러스한 풍자와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작품 내에서 시선의 대부분이 광적이고 맹목적인 몇몇 캐릭터들의 묘사와 풍자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쉽다. “대한민국에서 할아버지들이 이렇게 귀하게 대접받는 곳이 이런 곳 말고는 없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 대사에서 작가가 보여준 날카로운 시선처럼, 일부 극단적 캐릭터들이 아닌 시위에 참가한 ‘다수’의 목소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귀 기울였다면 내용적으로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박인하, 신명환의 《당당한 현대사 만화》도 조금 아쉽다. 이승만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 이승만의 숙소와 행적, 발언들을 되짚음으로써 근대국가 대한민국과 국민들, 그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가진 (아마 브로델이 장기지속이라고 부를 법한) 내면적 전근대성을 지적한 점은 매우 날카로우나, 한편 그를 단순히 ‘권력’만을 탐해 친일파들을 이용한 ‘왕권지향’적 인물로 그린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시선은 아닌가 싶다. 친일파와 친일관료(테크노크라트)는 그 정의에서부터 처벌 범주에 대해 해방정국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고, 이승만의 초대 내각 역시 이시영(부통령), 이범석(국무총리), 조봉암(농림장관) 등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이승만을 위시로 한 남한 우파의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 역시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온 좌우파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극심한 대립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데에서는 필연적으로 ‘관점’이 있어야 하나, 하나의 ‘관점’이 놓칠 수 있는 다른 면에 대해서도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람 사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 곳곳을 따뜻한 그리고 다양한 시선으로 비추는 책이다. 물론 이러한 형식에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기적인 간행물이 아닌 이상, 연재만화들의 주제가 산발적인데다가 단편과 연재물이 혼재돼 있는 것은 자칫 독자의 집중력을 흩트릴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십시일반》과 같이 한 권의 책에 하나의 특정한 주제(‘인권’)를 다루는 것이 아닌 이상, 보다 큰 틀을 지향할 때 일정 부분 감내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또한 이 책은 훨씬 큰 장점과 많은 매력, 무엇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넘음이 있다. 이 책이 앞으로도 꾸준히 출간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우리가 좀 더 넓은 시야로 자신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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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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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는 저자인 르네 지라르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주제인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모방 메커니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인류의 욕망이 동물적인 욕구와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타인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즉, 인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이며, 인류는 서로에 대한 모방을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모방 욕망과 폭력,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


그런데 욕망의 모방성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것이 경쟁적일수록 더욱 가열된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노스페이스 패딩’ 문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노스페이스 패딩’을 구매하는 친구들(경쟁자)이 늘어날수록 그것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진다. 모방 경쟁에서 “경쟁자의 등장은 욕망의 정당성과 욕망 대상의 가치를 확인”(23쪽)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점차 가열된 모방 경쟁은 공동체 내부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이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갈등은 (홉스의 표현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나아가 공동체 자체를 붕괴 위협으로까지 몰아넣게 된다.


지라르는 고대 역사서와 설화, 문학작품들 속에서 자주 엿보이는 ‘전염병’의 상당수가 실제 전염병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까지 심각해진 극도의 사회적 긴장 상태를 일컫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긴장은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필요한 것이 ‘희생양’, 즉 극도의 긴장 상태를 한 번에 해결시켜줄 존재이다.


에페소스의 아폴로니우스 설화는 바로 극도로 심화된 사회적 긴장이 희생양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지라르는 이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부른다.)을 그린 단적인 예이다. 아폴로니우스 설화는 ‘상호모방->상호모방으로 인한 극도의 긴장과 갈등의 전염(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모든 갈등을 한 사람의 희생양에게 전가함(희생양 제의)->갈등의 해소(그리고 사후에 이 희생양은 끝없이 죽임을 당하고 또 부활하는 신, 디오니소스처럼 ‘신성한 자’가 되기도 한다.)’라는 전형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비록 희생양 메커니즘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효과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악의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바로 그것은 희생자를 일방적으로 죄인(‘전염병’의 원인)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갈등을 진정시키는, 즉 갈등과 폭력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있어 ‘덜 나쁜’ 폭력으로 ‘더 나쁜’ 폭력을 대체하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평화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의 본질이 타인에 대한 모방인 이상, 이러한 모방으로 인한 갈등은 주기적으로 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공동체의 안정을 구하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수를 위해 소수의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양은 무고하다


그러나 전 세계 곳곳의 여러 공동체들은 아폴로니우스 설화와 같이 희생양 메커니즘 구조가 드러나는 설화와 신화, 종교 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효율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은 언뜻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신화는 오시리스나 디오니소스처럼 희생양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화들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신화가 앞선 다른 신화들을 차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라르는 이러한 신화들과 기독교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다른 것들과는 달리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라르에 의하면 『신약』은 일반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처럼 희생양을 ‘죄인’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제의에 가담하는 공동체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숨기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바로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러니까 희생양을 죄인이 아니라 온전히 무고(無辜)한 자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가 ‘그리스도’ 그러니까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 없는 희생양 예수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비로소 ‘악의 메커니즘’은 성스러움이라는 탈을 벗고 자기 정체(폭력성)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깨어진 이후의 세상은 어떨까? 혹시 모방 욕망으로 인한 갈등이 통제되지 못해 공동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갈등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모든 모방 욕망을 억제하고 제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지라르는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모방 욕망'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모방 욕망은 사회적 갈등을 촉발시키는 근본 요인이기도 하지만, 인류가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을 전승하여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잘 제어해야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 역사상 무수한 공동체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터부’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터부들은 예컨대 십계명에서 말하는 것처럼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식으로 공동체 내부에서 모방욕망이 과열되는 것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터부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결과적으로 모방의 심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는 없다.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 역시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터부인 ‘율법’이 점차 흔들림에 따라 공동체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금기들을 만드는 대신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지라르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조용한 소유는 욕망을 약화시킨다. 나의 모델에게 하나의 경쟁자를 줄 때,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그가 나에게 심어주었던 욕망을 되돌리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가 내 욕망에 반대하면서 나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바로 그 순간, 내 욕망의 모습이 또 그의 욕망을 강화시킨다.”(23쪽) 그에 따르면, 인류는 예수의 삶(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모방하는 ‘개종’을 통해 비로소 상호 모방의 심화로 인한 영속적인 긴장과 경쟁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의 ‘개종’은 단순히 종교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마음가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모방 폭력,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


르네 지라르는 문학 비평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문학작품들은 물론 고대 신화, 설화, 경전, 그리고 고대와 현대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텍스트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라르의 사유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문학이나 신학적인 지점에만 있지 않다.


이제는 지구화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는 것이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현대 사회는 교역의 확대 그리고 교통과 통신 등의 발달로 인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졌던 무수히 많은 공동체들이 마치 하나의 공동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다른 욕망들을 마주하고 그것들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TV와 인터넷 등을 통해 타인의 것을, 삶을, 성공 모델을 본받을 것을 요구받지 않는가. 이것은 지라르의 식대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가 예전과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큰 규모의 모방 폭력 문제를 떠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갈등의 징후들은 서로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 우리나라는 물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도심 한복판에서 행해지는 무차별 살인이나 테러, 전혀 모르는 타인을 자살로 내모는 인터넷 악플 문제 등은 물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극도의 스트레스, 무력감, 사회에 만연하는 우울증 등은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각해져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을 현대 사회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혹 일시적으로 갈등을 배출할 가십거리를 찾아다니거나, 또는 모든 갈등의 원인을 단지 비정상적인 것에서 찾음으로써, 즉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가져다주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타인을 모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가진 의미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독립된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코 뗄 수 없는 상호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진정한 평화를 얻는 방법은 희생양 메커니즘과 같이 우리 안에 타자를 설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배제하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말처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마 19:19)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쟁적인 모방 폭력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지라르의 사유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으며, 이는 사회적 갈등과 폭력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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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 FTA의 지구정치경제학
홍기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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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이 한국 국회를 통화했다. 그러나 협정이 체결되고 국회에 통과하기까지 벌어졌던 수년간의 다난한 과정(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에서부터 여야 국회의원들의 물리적 충돌까지)은 비준동의안이 통과된 현 시점에서도 결코 쉽게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FTA란 무엇이며, 어떠한 점이 문제가 되어 이렇게 끝없는 논란을 낳는 것일까?


경제학자 홍기빈이 2006년에 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바로 위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바로 FTA에서도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ISD(Investor-State Dispute), 그러니까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인데, 저자는 이 조항이야말로 FTA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자 대표적인 독소조항 중 하나로, 이것이 한국 사회와 경제에 중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2020년의 한국 그리고 2003년의 체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FTA 체결 이후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파국에 대해 서술하면서 시작한다. 2020년, 세계적인 미디어 재벌 루퍼스 머독, 그리고 그와 손잡은 국내의 한 가공의 인물에 의해 한국의 방송계가 좌지우지 된다. 그들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송도 서슴지 않고, 막대한 재력을 동원하여 공중파 방송에 손을 뻗치는 등 점차 방송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그렇게 세력을 키워나가던 그들은 어느 순간,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을 벌인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들이 벌인 다툼의 불똥은 한국 정부에게 튄다. 경영권 다툼에서 패한 머독이 한국이 여러 나라와 FTA 조약을 체결할 때 합의했던 ISD 조항을 활용해 한국정부에게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법원에 중재재판을 건 머독은 마침내 한 곳에서 승소를 거두게 되고, 한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손에 넣게 된다.


위 사건은 단지 FTA의 단점을 극대화하여 가공한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가상의 사건’은 단순히 최악을 가정하여 구성된 완전한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실제 2003년 체코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체코의 충격적인 사례가 한-미 FTA가 체결된 미래의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ISD의 문제점에 대해 ISD의 배경(2장)과 정의(3장), 진행과정(4장)을 살펴보고, 구체적인 사례들(5장)을 통해서 그 폐해를 고발한다.


FTA 체결, 경쟁력 있는 미래가 아니라 파국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ISD로 대표되는 무수한 독소조항들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FTA가 자칫 ‘주권 양도’라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책의 5장에서 다루고 있는 국제적 대기업과 FTA 체결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숱한 소송들은 수자원이나 환경 및 폐기물, 공공서비스나 경제 정책과 같은 공공의 영역들마저 무차별적으로 대상화하고 있다. 즉, 국제적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국의 공익을 해치는 행위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발생한 이러한 사건들의 예처럼 FTA 체결은 단순히 경제의 영역이나 국가경쟁력의 문제로만 파악할 수 없다. FTA는 바로 일반 시민들의 삶, 그리고 일국의 주권과 공공의 영역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6장에서 호주 국민들이 ISD를 철폐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역시 ISD와 FTA에 대해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식으로 설익은 낙관론을 펼칠 것이 아니라, 파국을 피해가 위해서 그것들을 반드시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장).


2006년 그리고...


이 책은 한-미 FTA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던 2006년에 출간되었다. 6년이라는 시간만 놓고 볼 때, 어쩌면 이 책은 “팜플릿[sic] 정신”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시쳇말로 ‘한물간’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정권이 바뀌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2012년에도 여전히 FTA를 둘러싼 논란은 현재형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기 상대적으로 묻혀 있던 ISD 문제는 이명박 정부 들어 주요 쟁점으로 표면에 부상하고 있다.


ISD와 FTA의 문제는 저자의 말처럼 단순히 정부 그리고 일부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두고 손 놓고 있을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먼저 주체가 되어 ...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인간과 자연이 온전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 등에 대해 먼저 판단”(212~213쪽)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경제나 법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시민들 역시 독자층으로 포함한다. 저자는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만큼, 이 책은 충실한 개념 설명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반인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ISD가 구체적으로 어떤 폐해를 가지고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팜플릿[sic]’으로서 이 책이 갖는 의미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용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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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이영훈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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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라는 부제에서 보이듯이, 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다뤘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박지향·이영훈 등 엮음, 책세상, 2006.)을 대중 강의 형식으로 읽기 쉽게 축약한 책이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을 탈 민족주의적·실증주의 경제사적 시각에서 재조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지배적인 역사인식·사회인식 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첫째, 민족주의는 과거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부적합하다. 저자는 이 책의 1부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듯이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고 고대로부터 연속적으로 이어져 온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족이란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국가가 형성되는 근대라는 특정한 시기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를 역사를 이해하는 인식 틀로 삼을 경우, 과거사를 실증적으로 분석할 수 없으며 역사를 단지 규범적·당위적으로만 파악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둘째,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는데 저해되는 요소이다. 민족주의란 “근본주의적 열정과 감성의 체계”로서 민족이라는 ‘전체’를 위해 개별 인간을 끊임없이 자발적-강제적으로 동원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개인’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자신의 자유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민족주의의 전체주의적 속성은 오늘날 인류 문명의 가장 기본적 요소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 인권과 같은 개념들을 더욱 성숙시키는데 방해가 된다.


위와 같은 민족주의의 문제점들은 구체적으로는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 책의 2부와 3부를 통해 조선 후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인 자본주의 맹아론,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 친일파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리고 건국 과정을 둘러싼 상이한 해석들(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민족 분단의 고착화’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나뉘는)에 대해 실증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사실 저자는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 학계를 포함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왔다. 이 책은 그러한 항간의 오해를 풀기 위한 나름의 적극적인 시도인 셈인데, ‘대중 강의’ 형식의 쉬운 문체 역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편집 역시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탈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에 대한 그동안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그들의 논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끔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부에서는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의 허구성과 한계를 먼저 비판한 다음, 2부와 3부에서 한국근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통해 대립되는 주장들을 꼼꼼하게 반박함으로써 탈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보다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당대의 사진자료나 유행가 가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 역시, 기존의 역사서보다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강점을 보이는 지점이다.


물론 이 책은 주된 논지나 사실(史實)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논쟁거리 역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저자는 곳곳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것들을 억압한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서는 ‘반공’을 통한 ‘나라세우기’가 매우 시급했으며, 이승만 정권은 비록 독재와 숱한 폭력과 억압을 동원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은 저자가 말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가 인민들 스스로 그것을 이해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단 반공을 통해 체제를 지키고, 일정한 역사적 과정(산업화)이 진행된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부산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와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이해는 나아가 개발독재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사적 측면에서의 학계의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인 허수열은 일제 강점기 이루어진 경제개발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논쟁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 시점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여전히 민족주의가 다른 가치들을 모두 억누를 정도로 지나치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에서, 실증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명확한 근거 없이 상식처럼 당연시되던 주장들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역사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단순히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의 영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만들어 나갈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비록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충분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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