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에서 1906년 사이, 루쉰(魯迅)은 가난한 유학생으로 일본의 센다이(仙台)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졸업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국가개혁이라는 시급한 일에 힘쓰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높은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루쉰의 계획은 하나의 구경거리(spectacle)를 접한 어느 날, 과감하게 바뀌었다.”(본문 20쪽)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아케이드(arcade)는 그야말로 근대의 대표적인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은 바로 상품들이 줄이어 진열된 공간, 즉 ‘구경거리’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근대는 이러한 시각문화(특히 집단적으로 ‘엿보는’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당대 가장 근대적인 도시였던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곳도 바로 모르그(morgue, 시체공시장)였다.
근대, 주체의 탄생
근대란 곧 ‘주체’의 탄생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근대적) 주체란 사실 데카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자체를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주체(Cogito ergo sum)가 아니라 단지 그것(의심할 수 없는 주체)을 '상상'하는 주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주변부(객체)를 인식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엿보는 주체다. 즉, ‘(근대적) 세계’란 결국 타인을 그 비밀스러운 곳까지 구석구석 엿보는 “당시증(瞠視症)”(31쪽)의 공간이며, 비서구 세계를 ‘야만’의 눈으로 구경거리로 ‘전시’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아케이드’이다. 저자인 레이 초우는 이에 대해 티모시 미첼을 인용하여 “세계 자체를 일종의 끊임없는 전시회로 정리하고 서열화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구경거리, 근대적 주체의 주변부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에서 ‘구경거리’가 된 이들, 즉 주체 바깥에 위치 지어진, 주체성을 박탈당하고 사물처럼 전시된 운명에 처한 이들(대표적으로 비서구 세계)에게 근대란 어떤 의미인가? 글의 서두에 인용했던 에피소드에서 루쉰은 어떤 영화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아 의학도(물질적 측면에서의 근대)로서의 길을 버리고 문학(정신적 측면에서의 근대)으로 전향한다. 그가 영화에서 보았던 것은 어떤 중국인들이 일본인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장면이었는데, 레이 초우는 그가 받았던 충격이 단순히 처형에 대한 공포나 중국인들이 힘없이 처형당하는 모습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먼저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날 것”으로서의 힘, 그러니까 단순히 스크린에 보이는 것(화면, 그림자)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계)전체’를 그대로 전달하는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바로 영화라는 ‘구경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야말로 하나의 스펙타클(Spectacle)이며, 이것은 언급한 공포와 분노를 아우름과 동시에, 영화를 바라보는 루쉰 자신에 대한 인식과 관계한다. 즉, “더 정확히 말하면 한 편의 영화로, 하나의 구경거리로, 이미 늘 보고 있던 존재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28쪽)
그가 영화를 보며 느낀 공포는 단순히 스크린 속 핍박받는 중국인에 대한 인식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중국인의 모습―구경거리로 전락한―을 무기력하게 인정하며 바라보는 중국인(루쉰 자신을 포함한)에 대한 자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루쉰에게 있어 가장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봉건적 악습뿐만 아니라 중국인들 사이에 만연한 무기력증이었다. (대표적으로 전자에 대한 비판은 《광인일기》를 통해서 후자에 대한 비판은 《아Q정전》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자신의 문학 활동을 통해 전통적 질서(힘, 권력)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새로운 중국과 중국 민족을 만들기 위해,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해,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보여지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즉, “루쉰의 급진적 행동은 전통적 관행을 새로운 삶으로 부활시키려는 신경증적인 시도”이며, 그렇게 해서 탄생한 주체란 역설적이게도 결코 주체적이지 못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원시적 열정’
그런데 사실 이것은 비단 루쉰 개인이나, 개항기 중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세계’의 역사, 즉 모든 근대화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실제로 모든 ‘민족’, ‘전통’, ‘역사(민족사)’ 등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 또는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근대의 산물이다. 타자의 시선에 억압된 자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통’은 양가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레이 초우는 이를 ‘원시적 열정’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후진적’인 것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태고적’인 것으로서 긍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된 감정은 말 그대로 복합체이며 따로 분리된 것은 아니다. 바로 근대 중국의 역사 속에서 개항기와 문혁시기 전근대적인 악습의 전형으로 부정되었던 ‘공자’가 오늘날 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러한 “악순환적 감정의 복합체”는 전자는 주로 공동체 내부에 대해, 후자는 외부에 대해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을 전제한다. 근대화 시기 분명한 피해자였던 중국이 민족주의적 팽창주의를 오히려 점차 강화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근대의 역사는 곧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내부적으로) 스스로를 재정립하기 위해 이러한 ‘신경증’적 과정을 그대로 거쳐 왔다.
아케이드,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인가? 요컨대 근대화 이후, 제국주의적 침략의 ‘대상’이 되었던 비서구 문명에 있어 ‘신경증’은 악질적인 불치병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레이 초우는 다시 처음, 벤야민이 바라보았던 거리, ‘아케이드’로 돌아가 볼 것을 권유한다. 전통적 질서의 해체는 단순히 억압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적인 것에서 대중적인 것으로의 민주적 이동”을 수반한다. 그리고 아케이드는 ‘보여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이는 공간’이자 ‘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근대로서의 세계사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된 ‘신경증’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방법은 단순히 그것을 감추고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케이드가 참여의 가능성이 열린 공간이라면, 제국주의적 시선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그 공간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또 다른 가능성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즉 우리는 자신들을 끊임없이 타자(세계)와의 연속성 속에서 서로 내보이고,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폭력을 지양하고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는 ‘축제의 장으로서 아케이드’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