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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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는 저자인 르네 지라르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주제인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모방 메커니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인류의 욕망이 동물적인 욕구와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타인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즉, 인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이며, 인류는 서로에 대한 모방을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모방 욕망과 폭력,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


그런데 욕망의 모방성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것이 경쟁적일수록 더욱 가열된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노스페이스 패딩’ 문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노스페이스 패딩’을 구매하는 친구들(경쟁자)이 늘어날수록 그것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진다. 모방 경쟁에서 “경쟁자의 등장은 욕망의 정당성과 욕망 대상의 가치를 확인”(23쪽)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점차 가열된 모방 경쟁은 공동체 내부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이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갈등은 (홉스의 표현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나아가 공동체 자체를 붕괴 위협으로까지 몰아넣게 된다.


지라르는 고대 역사서와 설화, 문학작품들 속에서 자주 엿보이는 ‘전염병’의 상당수가 실제 전염병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까지 심각해진 극도의 사회적 긴장 상태를 일컫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긴장은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필요한 것이 ‘희생양’, 즉 극도의 긴장 상태를 한 번에 해결시켜줄 존재이다.


에페소스의 아폴로니우스 설화는 바로 극도로 심화된 사회적 긴장이 희생양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지라르는 이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부른다.)을 그린 단적인 예이다. 아폴로니우스 설화는 ‘상호모방->상호모방으로 인한 극도의 긴장과 갈등의 전염(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모든 갈등을 한 사람의 희생양에게 전가함(희생양 제의)->갈등의 해소(그리고 사후에 이 희생양은 끝없이 죽임을 당하고 또 부활하는 신, 디오니소스처럼 ‘신성한 자’가 되기도 한다.)’라는 전형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비록 희생양 메커니즘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효과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악의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바로 그것은 희생자를 일방적으로 죄인(‘전염병’의 원인)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갈등을 진정시키는, 즉 갈등과 폭력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있어 ‘덜 나쁜’ 폭력으로 ‘더 나쁜’ 폭력을 대체하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평화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의 본질이 타인에 대한 모방인 이상, 이러한 모방으로 인한 갈등은 주기적으로 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공동체의 안정을 구하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수를 위해 소수의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양은 무고하다


그러나 전 세계 곳곳의 여러 공동체들은 아폴로니우스 설화와 같이 희생양 메커니즘 구조가 드러나는 설화와 신화, 종교 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효율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은 언뜻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신화는 오시리스나 디오니소스처럼 희생양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화들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신화가 앞선 다른 신화들을 차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라르는 이러한 신화들과 기독교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다른 것들과는 달리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라르에 의하면 『신약』은 일반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처럼 희생양을 ‘죄인’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제의에 가담하는 공동체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숨기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바로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러니까 희생양을 죄인이 아니라 온전히 무고(無辜)한 자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가 ‘그리스도’ 그러니까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 없는 희생양 예수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비로소 ‘악의 메커니즘’은 성스러움이라는 탈을 벗고 자기 정체(폭력성)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깨어진 이후의 세상은 어떨까? 혹시 모방 욕망으로 인한 갈등이 통제되지 못해 공동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갈등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모든 모방 욕망을 억제하고 제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지라르는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모방 욕망'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모방 욕망은 사회적 갈등을 촉발시키는 근본 요인이기도 하지만, 인류가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을 전승하여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잘 제어해야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 역사상 무수한 공동체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터부’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터부들은 예컨대 십계명에서 말하는 것처럼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식으로 공동체 내부에서 모방욕망이 과열되는 것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터부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결과적으로 모방의 심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는 없다.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 역시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터부인 ‘율법’이 점차 흔들림에 따라 공동체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금기들을 만드는 대신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지라르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조용한 소유는 욕망을 약화시킨다. 나의 모델에게 하나의 경쟁자를 줄 때,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그가 나에게 심어주었던 욕망을 되돌리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가 내 욕망에 반대하면서 나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바로 그 순간, 내 욕망의 모습이 또 그의 욕망을 강화시킨다.”(23쪽) 그에 따르면, 인류는 예수의 삶(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모방하는 ‘개종’을 통해 비로소 상호 모방의 심화로 인한 영속적인 긴장과 경쟁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의 ‘개종’은 단순히 종교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마음가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모방 폭력,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


르네 지라르는 문학 비평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문학작품들은 물론 고대 신화, 설화, 경전, 그리고 고대와 현대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텍스트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라르의 사유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문학이나 신학적인 지점에만 있지 않다.


이제는 지구화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는 것이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현대 사회는 교역의 확대 그리고 교통과 통신 등의 발달로 인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졌던 무수히 많은 공동체들이 마치 하나의 공동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다른 욕망들을 마주하고 그것들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TV와 인터넷 등을 통해 타인의 것을, 삶을, 성공 모델을 본받을 것을 요구받지 않는가. 이것은 지라르의 식대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가 예전과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큰 규모의 모방 폭력 문제를 떠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갈등의 징후들은 서로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 우리나라는 물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도심 한복판에서 행해지는 무차별 살인이나 테러, 전혀 모르는 타인을 자살로 내모는 인터넷 악플 문제 등은 물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극도의 스트레스, 무력감, 사회에 만연하는 우울증 등은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각해져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을 현대 사회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혹 일시적으로 갈등을 배출할 가십거리를 찾아다니거나, 또는 모든 갈등의 원인을 단지 비정상적인 것에서 찾음으로써, 즉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가져다주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타인을 모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가진 의미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독립된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코 뗄 수 없는 상호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진정한 평화를 얻는 방법은 희생양 메커니즘과 같이 우리 안에 타자를 설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배제하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말처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마 19:19)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쟁적인 모방 폭력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지라르의 사유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으며, 이는 사회적 갈등과 폭력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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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 FTA의 지구정치경제학
홍기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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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이 한국 국회를 통화했다. 그러나 협정이 체결되고 국회에 통과하기까지 벌어졌던 수년간의 다난한 과정(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에서부터 여야 국회의원들의 물리적 충돌까지)은 비준동의안이 통과된 현 시점에서도 결코 쉽게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FTA란 무엇이며, 어떠한 점이 문제가 되어 이렇게 끝없는 논란을 낳는 것일까?


경제학자 홍기빈이 2006년에 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바로 위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바로 FTA에서도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ISD(Investor-State Dispute), 그러니까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인데, 저자는 이 조항이야말로 FTA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자 대표적인 독소조항 중 하나로, 이것이 한국 사회와 경제에 중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2020년의 한국 그리고 2003년의 체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FTA 체결 이후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파국에 대해 서술하면서 시작한다. 2020년, 세계적인 미디어 재벌 루퍼스 머독, 그리고 그와 손잡은 국내의 한 가공의 인물에 의해 한국의 방송계가 좌지우지 된다. 그들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송도 서슴지 않고, 막대한 재력을 동원하여 공중파 방송에 손을 뻗치는 등 점차 방송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그렇게 세력을 키워나가던 그들은 어느 순간,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을 벌인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들이 벌인 다툼의 불똥은 한국 정부에게 튄다. 경영권 다툼에서 패한 머독이 한국이 여러 나라와 FTA 조약을 체결할 때 합의했던 ISD 조항을 활용해 한국정부에게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법원에 중재재판을 건 머독은 마침내 한 곳에서 승소를 거두게 되고, 한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손에 넣게 된다.


위 사건은 단지 FTA의 단점을 극대화하여 가공한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가상의 사건’은 단순히 최악을 가정하여 구성된 완전한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실제 2003년 체코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체코의 충격적인 사례가 한-미 FTA가 체결된 미래의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ISD의 문제점에 대해 ISD의 배경(2장)과 정의(3장), 진행과정(4장)을 살펴보고, 구체적인 사례들(5장)을 통해서 그 폐해를 고발한다.


FTA 체결, 경쟁력 있는 미래가 아니라 파국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ISD로 대표되는 무수한 독소조항들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FTA가 자칫 ‘주권 양도’라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책의 5장에서 다루고 있는 국제적 대기업과 FTA 체결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숱한 소송들은 수자원이나 환경 및 폐기물, 공공서비스나 경제 정책과 같은 공공의 영역들마저 무차별적으로 대상화하고 있다. 즉, 국제적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국의 공익을 해치는 행위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발생한 이러한 사건들의 예처럼 FTA 체결은 단순히 경제의 영역이나 국가경쟁력의 문제로만 파악할 수 없다. FTA는 바로 일반 시민들의 삶, 그리고 일국의 주권과 공공의 영역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6장에서 호주 국민들이 ISD를 철폐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역시 ISD와 FTA에 대해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식으로 설익은 낙관론을 펼칠 것이 아니라, 파국을 피해가 위해서 그것들을 반드시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장).


2006년 그리고...


이 책은 한-미 FTA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던 2006년에 출간되었다. 6년이라는 시간만 놓고 볼 때, 어쩌면 이 책은 “팜플릿[sic] 정신”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시쳇말로 ‘한물간’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정권이 바뀌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2012년에도 여전히 FTA를 둘러싼 논란은 현재형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기 상대적으로 묻혀 있던 ISD 문제는 이명박 정부 들어 주요 쟁점으로 표면에 부상하고 있다.


ISD와 FTA의 문제는 저자의 말처럼 단순히 정부 그리고 일부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두고 손 놓고 있을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먼저 주체가 되어 ...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인간과 자연이 온전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 등에 대해 먼저 판단”(212~213쪽)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경제나 법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시민들 역시 독자층으로 포함한다. 저자는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만큼, 이 책은 충실한 개념 설명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반인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ISD가 구체적으로 어떤 폐해를 가지고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팜플릿[sic]’으로서 이 책이 갖는 의미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용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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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이영훈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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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라는 부제에서 보이듯이, 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다뤘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박지향·이영훈 등 엮음, 책세상, 2006.)을 대중 강의 형식으로 읽기 쉽게 축약한 책이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을 탈 민족주의적·실증주의 경제사적 시각에서 재조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지배적인 역사인식·사회인식 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첫째, 민족주의는 과거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부적합하다. 저자는 이 책의 1부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듯이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고 고대로부터 연속적으로 이어져 온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족이란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국가가 형성되는 근대라는 특정한 시기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를 역사를 이해하는 인식 틀로 삼을 경우, 과거사를 실증적으로 분석할 수 없으며 역사를 단지 규범적·당위적으로만 파악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둘째,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는데 저해되는 요소이다. 민족주의란 “근본주의적 열정과 감성의 체계”로서 민족이라는 ‘전체’를 위해 개별 인간을 끊임없이 자발적-강제적으로 동원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개인’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자신의 자유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민족주의의 전체주의적 속성은 오늘날 인류 문명의 가장 기본적 요소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 인권과 같은 개념들을 더욱 성숙시키는데 방해가 된다.


위와 같은 민족주의의 문제점들은 구체적으로는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 책의 2부와 3부를 통해 조선 후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인 자본주의 맹아론,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 친일파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리고 건국 과정을 둘러싼 상이한 해석들(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민족 분단의 고착화’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나뉘는)에 대해 실증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사실 저자는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 학계를 포함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왔다. 이 책은 그러한 항간의 오해를 풀기 위한 나름의 적극적인 시도인 셈인데, ‘대중 강의’ 형식의 쉬운 문체 역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편집 역시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탈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에 대한 그동안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그들의 논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끔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부에서는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의 허구성과 한계를 먼저 비판한 다음, 2부와 3부에서 한국근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통해 대립되는 주장들을 꼼꼼하게 반박함으로써 탈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보다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당대의 사진자료나 유행가 가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 역시, 기존의 역사서보다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강점을 보이는 지점이다.


물론 이 책은 주된 논지나 사실(史實)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논쟁거리 역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저자는 곳곳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것들을 억압한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서는 ‘반공’을 통한 ‘나라세우기’가 매우 시급했으며, 이승만 정권은 비록 독재와 숱한 폭력과 억압을 동원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은 저자가 말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가 인민들 스스로 그것을 이해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단 반공을 통해 체제를 지키고, 일정한 역사적 과정(산업화)이 진행된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부산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와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이해는 나아가 개발독재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사적 측면에서의 학계의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인 허수열은 일제 강점기 이루어진 경제개발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논쟁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 시점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여전히 민족주의가 다른 가치들을 모두 억누를 정도로 지나치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에서, 실증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명확한 근거 없이 상식처럼 당연시되던 주장들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역사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단순히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의 영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만들어 나갈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비록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충분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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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 논픽션총서 1
안인희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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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히틀러’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세계대전을 벌이고, 유례없는 인종청소를 감행한―의 배경을 게르만 신화와 바그너의 음악(오페라)이라는 연결고리들을 통해 이해하면서, 신화가 예술로 그리고 다시 그것이 현실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마치 추리를 하듯이 흥미진진하게 추적하고 있다. 조직적인 대학살이 일어났던 그 때, 신화와 예술 그리고 정치는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게르만 신화는 바그너의 손에서는 하나의 예술로서, 그리고 히틀러의 손에 의해서는 참혹한 현실(정치)로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게르만 신화의 부활, 바그너 오페라


하지만 이것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벌인 대학살이 단순히 독일의 특유의 ‘민족성’과 연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게르만 신화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부활하게 된 배경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설명한다. 즉, 게르만 신화는 시기적으로 근대에, 철학과 사상이라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전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근대화에서는 크게 도태되어 있던 독일이라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 바그너의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해 비로소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그너가 누린 높은 명성은 그의 예술적 재능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오페라가 독일의 민족적 숭고함과 같은 당대 독일인들이 바라는 것들을 그들 눈앞에 생생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인들의 바람은 단순히 예술의 영역, 바그너의 오페라 무대 위에서 그치지 않고, 곧 실제 역사의 무대 위에서 재현되었다.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이루어진 참혹한 대학살은 마치 여러 가지 무대 장치들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꾸며진 바그너의 무대처럼, 현실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꼼꼼하게 짜여 이루어진 하나의 '오페라'와 같았다.


예술과 정치, 바그너에서 히틀러로


발터 벤야민은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파시즘이라고 말한 바 있다. 히틀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바그너의 오페라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바그너 오페라의 광팬이었던 히틀러와 괴벨스는 그의 오페라로부터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당대 눈부시게 발전했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신화’의 심연을 더욱 매혹적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연설 무대 역시 마치 바그너의 오페라 무대처럼 주인공(히틀러)을 향해 비추는 적절한 조명, 곳곳의 무대 장치, 그리고 연기(제스처와 표정) 등으로 꼼꼼하게 구성되었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원래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어쩌면 그는 비록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바람대로 화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치 독일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의 신화가 가진 보편성


그러나 동시에 그 오페라는 히틀러 개인의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독일인들 역시 가담한 무대였으며, 또한 온 유럽이 암묵적으로 연출했던 무대이기도 했다. 우리는 신화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은 사실상 독일 한 나라에만 특수하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또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급속도로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파시즘에 빠지게 된 것 역시 프랑스를 포함한 승전국들의 지나치게 가혹한 전후 조치에 상당한 원인이 있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당대 이루어진 눈부신 ‘진보’의 산물이었던 과학과 화학의 발전 역시 히틀러를 주연으로 한 ‘오페라’를 꾸미는 중요한 무대장치가 되었다. 바로 나치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 했던 것이 바로 당대 ‘과학’으로 인정받던 우생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생학으로 대표되는 근대 유럽 문명이 낳은 참혹한 산물은 비단 히틀러와 나치 독일만 활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탈식민주의 사상가 에메 세제르의 일갈―“(이미) 히틀러는 그들(유럽 문명)과 동거하고 있었다”―처럼, 그러한 참상의 가능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그리고 전 세계 식민지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과학과 문명 진보 그 자체로 여겨졌던 근대 유럽 문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본질적으로 폭력과 야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배경들이 나치 독일 당시의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신화와 예술, 역사를 넘나들면서 ‘히틀러’라는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려 했던 것은, 유례없는 조직적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역사의 표면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즉, 이 책은 서로 상관이 없을 것 같던 게르만 신화와 바그너 오페라, 그리고 히틀러가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보다 다양한 맥락들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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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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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인간사 가장 큰 고통은 후회요.” (〈서유기〉선리기연 中)


슬프게도, 많은 깨달음은 대개 한두 걸음 늦게 온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아마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태생적으로 후회하도록 생겨먹은 것이 인생이요 사람인 것을. 때문에 우리는 좌절을 맛볼 때마다 많은 후회를 한다. 나도 많은 후회를 했는데, 대체로 사랑을 잃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찾아왔다.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인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는 그의 다섯 번째 앨범 《가장 보통의 존재》와 함께, 내가 후회할 때마다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던 책이다. 하지만 그 위로는 단지 형식(가식)적인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소위 '감성팔이'가 아니다. 이석원 식 '위로'는 오히려 사랑에 대한, 좀 거창하게 말하면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어떤 절망적일 정도로 현실적인 인식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랑은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했던 연인도 결국은 서로에게 ‘보통의 존재’로밖에 기억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이러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 때 느끼는 절망감... 아마 어떤 이들은 사랑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지나치게 시니컬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과 이별을 경험해 본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라면(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사랑도 경험하지 못하거나, 첫사랑 단 한 사람과 아주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소수의 경우는 제외하자) 이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좀 더 침착하게 되새길 것이다.


“우리는 사랑했다. … 하지만 슬프게도 서로를 갉아먹는 햄스터가 되었다.” (본문 248~249쪽)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그의 글과 노랫말에는 막연한 희망보다는 체념과 자조의 정서가 흐른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의 그런 체념과 자조의 정서에 심취할수록, 공허함이나 절망이 아니라 이상한 따뜻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이별 후 공허함과 절망감에 심취해 지내던 어느 무렵,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문득 깨달았다. 사랑이 시간에 의해 퇴색되고 절망이라고 생각한 현실에 마주했을 때, 나도 그리고 당신도 후회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했던 그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진실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순간의 영원함’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연인과 사랑을 했던 그 시간, 그 사실만큼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결국 이것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태도의 문제다. 끝을 알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순간들로 우리 삶을 채워나갈 것인가? 니체의 전언.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절망 앞에 섰을 때조차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이별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앞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끝이 어떻든 간에 우리의 삶은 후회와 절망 대신 무수히 빛나는 ‘순간의 영원함’들로 따뜻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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