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 논픽션총서 1
안인희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히틀러’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세계대전을 벌이고, 유례없는 인종청소를 감행한―의 배경을 게르만 신화와 바그너의 음악(오페라)이라는 연결고리들을 통해 이해하면서, 신화가 예술로 그리고 다시 그것이 현실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마치 추리를 하듯이 흥미진진하게 추적하고 있다. 조직적인 대학살이 일어났던 그 때, 신화와 예술 그리고 정치는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게르만 신화는 바그너의 손에서는 하나의 예술로서, 그리고 히틀러의 손에 의해서는 참혹한 현실(정치)로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게르만 신화의 부활, 바그너 오페라


하지만 이것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벌인 대학살이 단순히 독일의 특유의 ‘민족성’과 연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게르만 신화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부활하게 된 배경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설명한다. 즉, 게르만 신화는 시기적으로 근대에, 철학과 사상이라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전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근대화에서는 크게 도태되어 있던 독일이라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 바그너의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해 비로소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그너가 누린 높은 명성은 그의 예술적 재능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오페라가 독일의 민족적 숭고함과 같은 당대 독일인들이 바라는 것들을 그들 눈앞에 생생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인들의 바람은 단순히 예술의 영역, 바그너의 오페라 무대 위에서 그치지 않고, 곧 실제 역사의 무대 위에서 재현되었다.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이루어진 참혹한 대학살은 마치 여러 가지 무대 장치들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꾸며진 바그너의 무대처럼, 현실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꼼꼼하게 짜여 이루어진 하나의 '오페라'와 같았다.


예술과 정치, 바그너에서 히틀러로


발터 벤야민은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파시즘이라고 말한 바 있다. 히틀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바그너의 오페라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바그너 오페라의 광팬이었던 히틀러와 괴벨스는 그의 오페라로부터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당대 눈부시게 발전했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신화’의 심연을 더욱 매혹적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연설 무대 역시 마치 바그너의 오페라 무대처럼 주인공(히틀러)을 향해 비추는 적절한 조명, 곳곳의 무대 장치, 그리고 연기(제스처와 표정) 등으로 꼼꼼하게 구성되었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원래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어쩌면 그는 비록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바람대로 화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치 독일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의 신화가 가진 보편성


그러나 동시에 그 오페라는 히틀러 개인의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독일인들 역시 가담한 무대였으며, 또한 온 유럽이 암묵적으로 연출했던 무대이기도 했다. 우리는 신화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은 사실상 독일 한 나라에만 특수하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또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급속도로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파시즘에 빠지게 된 것 역시 프랑스를 포함한 승전국들의 지나치게 가혹한 전후 조치에 상당한 원인이 있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당대 이루어진 눈부신 ‘진보’의 산물이었던 과학과 화학의 발전 역시 히틀러를 주연으로 한 ‘오페라’를 꾸미는 중요한 무대장치가 되었다. 바로 나치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 했던 것이 바로 당대 ‘과학’으로 인정받던 우생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생학으로 대표되는 근대 유럽 문명이 낳은 참혹한 산물은 비단 히틀러와 나치 독일만 활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탈식민주의 사상가 에메 세제르의 일갈―“(이미) 히틀러는 그들(유럽 문명)과 동거하고 있었다”―처럼, 그러한 참상의 가능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그리고 전 세계 식민지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과학과 문명 진보 그 자체로 여겨졌던 근대 유럽 문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본질적으로 폭력과 야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배경들이 나치 독일 당시의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신화와 예술, 역사를 넘나들면서 ‘히틀러’라는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려 했던 것은, 유례없는 조직적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역사의 표면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즉, 이 책은 서로 상관이 없을 것 같던 게르만 신화와 바그너 오페라, 그리고 히틀러가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보다 다양한 맥락들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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