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시대 -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
노정태 지음 / 반비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류의 역사를 금, 은, 청동, 철의 네 시대로 구분했다고 한다. 황금의 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이행할 수록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인류는 점점 타락했다. 심지어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이 시대가 오기 전에 죽거나, 이 시대에 끝난 후에 태어났어야 했다'고 자조했다. 그리고 현세는 바로 그 철의 시대였다.


2.

그런데 사실 헤시오도스는 이 네 시대 사이에 한 시대를 더 끼워넣었다. 바로 '영웅'의 시대다. 반인반신인 이들은 인류와 완전한 '철의 시대'로 접어들기 전에 빛나는 무용담을 남기며 활약했던 이들이었다. 요컨대 『논객시대』의 노정태가, 『안티조선 운동사』의 한윤형이, 그리고 이들과 인식을 같이 하거나 같이 했던 많은 이들(민주당-열린우리당 혹은 진보정당을 지지했던)이 목격했던 것은 바로 현세, 즉 '완전한 철의 시대(?)'가 오기 직전 영웅들이 활약하던 바로 그 때의 장면들이었으리라.


3.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1997년 IMF를 맞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누렸다. 물론 이 시기는 동시에 (물질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세계를 지탱하던 거대한 축 중 하나가 무너져 내린 시기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에 누군가는 '역사의 종언'을 얘기했으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그 어떤 시기보다 역동적인 에너지가 태동한 시기였다. (이렇게 보면 가끔씩 세계를 움직이는 시계와 한반도를 움직이는 시계는 서로 조금 엇갈린다는 생각이 든다.)


4.

그러나 영웅담은 대개 영웅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헤라클레스도, 이아손도, 아킬레우스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그렇게 영웅들이 모두 죽고난 후에야 비로소 현세(철의 시대)가, 인간들의 시대가 열린다. 영웅들은 그들 나름의 재간으로 자신의 운명을 꾸려갔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오늘의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다.




p.s. 

아르고 원정대랄지 어벤저스랄지, 아무튼 내로라하는 논객들이 총출동했던 '안티조선운동',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탓일까? 논객들에 대한 서사시를 읊는 노정태의 문장은 날개를 단 듯하다. 어쩌면 가장 큰 애증의 대상일 진중권에 대한 평을 보자.


"하지만 진중권이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최소한의 진보는 대단히 허약한 뿌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토양이 유실되어 뿌리가 드러나고 가지가 말라붙고 나무가 땅에 쓰러지는 과정에서, 진중권이라는 '진보 논객'은 결국, 본인이 비판했던 다른 논객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판단과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인정하자. 숱한 '야권 단일화'의 정치적 도박 끝에, 이제 한국 정치판에서 제3세력으로서의 진보정당은 의미 있는 중량감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런 구도 속에서 진중권 역시, 자신이 '야권 이산' 중 한 명으로 판단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이른바 범야권이 진중권에게 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개 잡고, 닭 잡는 일"일 뿐이다. 진중권이 디오게네스로서의 존재 미학을 주장한다 한들, '진보'의 위치를 차지한 범야권은 백정 노릇을 계속 요구할 따름이다. 우리의 디오게네스는 한국 사회로부터 체류형을 선고받았지만, 그 디오게네스가 박근혜에게 추방형을 선고하는 일은 실로 요원해 보인다." (96~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파트 게임 - 그들이 중산층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콘유 3부작
박해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쩌면 아파트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식민지 경험과 그에 이어진 참혹한 전쟁이 남긴 정신적․물질적 폐허 위에서, 아파트는 그야말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근대화’에 대한 일념 하나로 도시 곳곳에 쌓아올린 거대한 철골 콘크리트 구조물이자, 동시에 사람들의 욕망 위에 세워진 장대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였다.


저자 박해천이 『아파트 게임』을 통해 살펴보려 하는 것은 바로 그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의 서사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조금 특이한 글쓰기 방식을 취하는데, 이른바 ‘비평적 픽션’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저자의 시선은 대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아파트’라는 구조물이 어떤 형태로 사람들의 삶의 형태와 의식에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 구조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욕망이 어떤 형태로 변화하고 확산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 관통한다.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욕망의 대상이었던 ‘아파트’의 의인화를 통해 자기 삶(아파트의 역사)을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아파트 게임』은 욕망의 주체인 도시 중산층의 시선을 통해 그 욕망의 구조와 역사를 하나하나 짚어간다. 대표적인 중산층 세대이자 베이비부머 세대인 1955년(2장)과 1962년생(3장)의 시선에서 정치 격변, 경제호황, 아파트 건설이라는 일련의 흐름ㅡ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역사인ㅡ은 각 세대가 경험했던 도시(공간)의 모습과 사건(시간)을 중심으로 재구성되며, 마침내 그들의 자녀 세대인 1990년대(4장)와 2000대(5장)로 회귀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일련의 과정은 마치 ‘소설가 구보 씨’처럼 시대를 반복해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파국의 현장을 드러낸다. 1930년대(박태원), 1970년대(최인훈), 1990년대(주인석)를 되풀이 하며 살았던 ‘소설가 구보 씨’의 시선처럼, 『아파트 게임』에서는 ‘아파트’로 상징되는 ‘중산층’의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꿈꿨던 이들의 삶을 돌아본다. 그것은 ‘평수’ 또는 ‘지역’으로 대표되는 아파트의 숫자들과, 그 이름 아래 대출이자, 사교육비, 대학등록금, 명예퇴직 위기를 감내해야 하는 삶, 혹은 극심한 취업난과 비정규직 문제, 아파트 가격 폭등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 호황의 기억만을 자기 위안 삼아 상품으로 소비하는 삶뿐이다. 아파트로 상징되는 욕망이 낳은 이 끔찍한 영원회귀.


그렇다면 이 끔찍한 비극을 끊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더 이상 탄원은 없다, 돌파하라!”고 일갈한다. 부동산 신화가 더 이상 중산층의 행복한 삶을 대변해주지 못하는 저성장 시대라는 현실에서, 여전히 아파트가 그리고 아파트로 상징되는 욕망이 주인 행세를 계속하는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행복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폭등에 대한 기대감이 역병처럼 번졌다면, 폭락에 대한 공포는 피할 길 없는 후유증이지 않은가?”(64~65쪽) 저자가 던지는 일갈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신화는 결국 행복이 아니라 공포가 만연한 사회를 남겼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는 2000년대 후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확산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도 이 땅에서 여전히 그 신화적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결국 이 책은 눈앞의 파국을 보면서도, 애써 그것을 외면하는 이들의 시선을 하나의 질문 앞에 분명히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둘 중 하나다. 지옥에서 벗어나든지, 아니면 영원히 반복하든지.




덧붙이기.

디자인 전공자답게 저자의 글쓰기 전략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비평, 픽션, 사진, 도표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구성되었다. 즉, 이 책에서 디자인은 단순한 껍데기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가시화하기 위한 방법이다.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런 점을 살 살렸다. 애초에 학문 간 통섭을 목적으로 디자인에 힘을 준 자음과 모음의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 중 하나로 기획되어, 전체 디자인을 저명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인 workroom에서 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아무튼<아파트 게임>은 이런 지점에서 아주 조금 아쉬움은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사회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엄기호의 내공은 이미 전작에서 증명된 바 있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에서 저자는 ‘청춘’들에게 섣불리 조언이나 훈계를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힐링’과 ‘스펙 경쟁’의 양 극단에서 정작 자신들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채 소외된 그들의 목소리를 담담히 들려준다. 요컨대 그는 ‘화자’가 아니라 ‘청자’로 자리하는데, ‘듣는’ 행위를 강조하는 이러한 태도는 신작인 『단속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곁이 없는 사회


저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누구도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이 없고, 단지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사람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사람들은 ‘힐링’이나 ‘상담’처럼 단지 누군가 자기 말을 들어만 준다면 그것이 호통이라도 좋은, 요컨대 “돈 내고 야단맞으러 가는 세상”이 되었다(7쪽). 곁이 사라진 세상은 ‘편’이 대체했고, 끊임없이 서로를 편 아니면 적인 이분법적 대립으로 몰아간다. 타인의 경험(단지 성공담에 환호하는 게 아니라)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거나,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사회적 연대 책임 의식을 갖는 것은 먼 얘기가 되었다. 사람들 사이의 교류 역시 비슷한 취향에서만 가능할 뿐, 차이를 마주하게 되면 ‘취향 존중’을 핑계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구성원 사이의 유대나 소통, 일련의 관계망이 결여된 ‘사회 아닌 사회’, “타인의 고통 같이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외면하며 단속團束하는”(10쪽) 서로가 서로에게 빗장을 닫아 건 ‘단속사회’가 된 것이다.


공론空論장


근대사회는 본래 시민으로 인정된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과연 공론公論장은 존재하는가? 역사적으로도 문제에 대한 공론화 대신 이해관계에 따른 억압이 지속되었던 우리 사회는, 공론장은 외면한 채 ‘폭로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사실 폭로란 본래 공론장에서 억압되거나 배제된 자가 권력이나 구조에 대해 저항하고 배제된 목소리를 다시금 공론장에 호출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만연한 ‘폭로’는 배제된 목소리를 공론장에 부활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마치 콜로세움에 죄수를 세우기 위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도 검투사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도덕’을 어긴 이들을 공동체에서 축출해 사자 앞으로 내몰아 단죄하는(그리고 다수가 그것을 즐기는). 이러한 공동체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튀지 않는 것이고, 결국 개인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위축된다.


사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는 오로지 시장논리에 따른 ‘무한경쟁’이 되었고, ‘탈락’에 대한 공포의 만연은 모두를 우울증과 만성피로에 시달리게 만든다. 결국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와는 과잉연결되어 끝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상처를 호소하지만 누구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71쪽) 이렇게 타인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다는 것은 곧 관계를 통한 ‘개인’의 성장 기회의 박탈을 의미한다. 본래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오로지 관계 속에서, 즉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고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가 배제된 오늘날 ‘나’의 내면적 성찰과 성취는 이제 숫자로 대체되고, 기준에서 ‘탈락’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부여된 숫자(목표량)를 열심히 채워야만 한다.


이제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저자는 목소리를 내지 않던(또는 아무도 쉽게 귀 기울이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불러냄으로써 관계가 단절되고 고립된 개인과 사회의 결을 하나하나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결들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던져진다. 우리 모두가 자신이 고통 받고 힘겹다고 말할 때, 당신은 고개를 들어 타인의 얼굴을 마주한 적 있는가?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면 언제든 “자신도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266쪽)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소시오패스’가 되도록 권장하는 끔찍한 사회다. 그런 끔찍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바로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타인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청은 수동적인 청취가 아니라, “말하지 못하던 것, 말하지 않은 것,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276쪽)이다. 레비나스의 윤리학. 그리고 우리가 주체로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와 살아가야만 하는 구성원으로서 ‘나’와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제 모두 고개를 들고 서로의 고통스런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의 그리고 타인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바로 그 작은 행위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덴마크의 소설가 이작 디네센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우리에게 말 걸고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소설을 만난다는 일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김애란은 이제 30대가 된 젊은 작가로 일찍이 전작 《달려라 아비》(2005)를 통해 많은 팬을 확보한 바 있다. 《침이 고인다》(2007)는 이후에 출간된 단편들을 모은 단편집으로, 이번 작품 역시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2~30대를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대개 사회와 타인들 사이에서 안정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 경제적인 결핍과 인간관계에서의 결핍의 문제는 바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닌 문제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 즉 ‘우리’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야말로 벼랑 끝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나’는 14평 남짓한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바람과 상관없이 학원 강사를 해야 하며, 심지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리 중임에도 운동회에도 나가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간신히 버티는 공간에 타인은 결국 방해꾼일 수밖에 없다(〈침이 고인다〉). 또한 이러한 현실에서 사랑하는 두 연인은 그 어떤 날보다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야 할 크리스마스라는 시간에서조차 단지 주변자로 머물 뿐이다.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공간)는 오히려 평소보다 (그리고 그 가치보다는 훨씬)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거나, 2시간 마다 새로 주문을 해야만 간신히 머무를 수 있다. 즉, 오직 끊임없는 ‘소비’ 속에서만 유지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조차 극심한 경쟁으로 얻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연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든(소비 경쟁에서 이기든 지든) 충족감보다는 훨씬 큰 피로감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성탄특선〉).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지나가는 곳인 줄 알았던 장소를 몇 년이 넘도록 여전히 맴돌고 있으며(〈성탄특선〉), 무수히 많은 장소들을 전전하였음에도(“번역 아르바이트, 커피숍 서빙, 화장품 회사 홍보직, 잡지 교열, 논술 첨삭, 영어 과외…”, 208쪽) 여전히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는 불투명하다(〈기도〉). 이것은 그야말로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모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며,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로, 그러니까 삶의 주체로 있을 수 없으며, 공간들의 부재-결핍 속에서 더욱 피폐해지고 파편화되며 고립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방법은 있는가? 즉, 다시 말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있는가? 아쉽게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김애란은 이번 작품까지는 아직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김애란의 소설 속의 ‘나’는 아직까지는 현실을 버거워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좁은 공간 속으로 숨어들고 마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사내에게 문자를 보낼까 말까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보내지 않는다”(〈기도〉) 그러나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즉 ‘우리’의 목소리로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축복이자, 나아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정서적 공간-토대 마련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세대의 소설’이 갖는 힘, 어떤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다. 아직까지 김애란은 젊은 작가라는 점, 또한 그녀가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전작보다 깊은 고민과 무게감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세대'의 작가로서 그녀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 사는 이야기 2 - 다큐멘터리 만화 시즌 1 다큐멘터리 만화 2
최규석.최호철.이경석.박인하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극적인 허구성이 없이 그 전개에 따라 사실적으로 그린 것”


다큐멘터리의 사전적 정의다. 이 정의에서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특정한 대상(‘어떤’)을 특정한 형식(‘허구성 없이’)과 내용(‘사실적’)을 통해 그려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련의 ‘관점’(그 대상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어떤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담을 것인지)을 상정한다.


휴머니스트의 <사람 사는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만화’를 표방한 책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시선은 우리의 삶, 그리고 그 삶의 토대인 사회를 향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시선이 흔히 닿는 도심이나 번화가가 아니라 흔히 닿지 않는 곳(파업현장이나 철거현장, 다단계에서부터 도심 속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을 속속 비추고 있다. 고시원과 헬스장, 다단계를 하는 젊은이의 삶과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들의 삶, 그리고 도심 속에 살고 있는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사회 곳곳을 비치는 다양한 시선들은 단순히 몇 개의 관점을 우리에게 획일적으로 강요하기보다는 우리의 시야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넓고 밝게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다큐멘터리 만화’라는 형식은 박인하가 2권 본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는 근대만화의 덕목 중 하나였던 ‘계몽과 풍자’, ‘해학과 유머’를 다시금 동시에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치밀한 현장 취재나 작가 개인의 경험이 녹아든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게 경험하고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2권에서 다단계에 빠진 이의 시선에서 청년들의 삶을 이야기한 박해성 작가의 〈열심히 살자〉와 임성훈 작가의 〈나의 애국…보수집회 답사기〉가 인상 깊었다. 〈열심히 살자〉에서 ‘다단계’ 빠져들게 되는 청년들의 불안은 그들이 ‘아픈 청춘’이라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성과 경제적 모순에 크게 기인한 것이며, 이것이 이들의 인간관계와 삶을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파괴하는지(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다단계 ‘선배’인 정유진 PD의 대사ㅡ“무섭지 않니? 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는 게.”)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임성훈 작가의 〈나의 애국…보수집회 답사기〉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기지 건설을 찬성하는 보수단체들의 시위 현장 한복판에서 능청맞게 유머러스한 풍자와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작품 내에서 시선의 대부분이 광적이고 맹목적인 몇몇 캐릭터들의 묘사와 풍자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쉽다. “대한민국에서 할아버지들이 이렇게 귀하게 대접받는 곳이 이런 곳 말고는 없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 대사에서 작가가 보여준 날카로운 시선처럼, 일부 극단적 캐릭터들이 아닌 시위에 참가한 ‘다수’의 목소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귀 기울였다면 내용적으로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박인하, 신명환의 《당당한 현대사 만화》도 조금 아쉽다. 이승만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 이승만의 숙소와 행적, 발언들을 되짚음으로써 근대국가 대한민국과 국민들, 그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가진 (아마 브로델이 장기지속이라고 부를 법한) 내면적 전근대성을 지적한 점은 매우 날카로우나, 한편 그를 단순히 ‘권력’만을 탐해 친일파들을 이용한 ‘왕권지향’적 인물로 그린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시선은 아닌가 싶다. 친일파와 친일관료(테크노크라트)는 그 정의에서부터 처벌 범주에 대해 해방정국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고, 이승만의 초대 내각 역시 이시영(부통령), 이범석(국무총리), 조봉암(농림장관) 등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이승만을 위시로 한 남한 우파의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 역시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온 좌우파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극심한 대립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데에서는 필연적으로 ‘관점’이 있어야 하나, 하나의 ‘관점’이 놓칠 수 있는 다른 면에 대해서도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람 사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 곳곳을 따뜻한 그리고 다양한 시선으로 비추는 책이다. 물론 이러한 형식에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기적인 간행물이 아닌 이상, 연재만화들의 주제가 산발적인데다가 단편과 연재물이 혼재돼 있는 것은 자칫 독자의 집중력을 흩트릴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십시일반》과 같이 한 권의 책에 하나의 특정한 주제(‘인권’)를 다루는 것이 아닌 이상, 보다 큰 틀을 지향할 때 일정 부분 감내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또한 이 책은 훨씬 큰 장점과 많은 매력, 무엇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넘음이 있다. 이 책이 앞으로도 꾸준히 출간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우리가 좀 더 넓은 시야로 자신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