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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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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쿱 생협 출판사에서 나온 책! 작은 출판사에서 대박 쳤구나.

 

자신의 전문 분야와 자신의 삶을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낸 서정적인 과학책이란 면에서 샌드라 스타인그래버를 연상시킨다. 문체도 비슷하다. 스타인그래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쿨한 태도로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이나 자신의 성 경험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쓰곤 했다. 호프 자런도 비슷하다. 냉정한 가족 관계에서 받은 상처, 여성으로 겪은 차별, 정신적인 약점, 소울 메이트 빌의 장애 등을 담백하고 정제된 문장으로 그려낸다. 노르웨이어를 할 줄 안다는 것도 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아름답게 설명하는 능력은 연구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을 것이다. 자런은 나무를 연구하다가 나무를 이해하게 되고 나무와 닮아간 것 같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외계 언어를 공부하다가 언어 속에 담긴 세계관까지 습득하게 되고 과거와 미래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자런도 나무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나무에 대해 공부하고 싶고 자런의 논문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몽실몽실 올라온다. 나무들에 대한 신기한 카더라 통신들이 이런 연구들에서 나왔구나, 하고 출처를 확인하게 되는 지적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화두는 빌이라 할 수 있다. 빌이랑 대체 무슨 사이인지, 처음에 내 아기라고 나오는 아기는 누구 아기인지 궁금해서 읽는 내내 애간장이 탔다. 곰 같은 문체로 여우 같은 플롯을 짰다고나 할까. 책 펼치기 전엔 있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은 스릴까지 갖췄다! 빌처럼 일 코드, 유머코드, 상대의 장단점까지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이란성 쌍둥이같은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다.

 

문장 하나하나가 천 번씩 담금질해서 나왔다는 인상을 준다.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르고, 단어의 배치를 바꾸고 또 바꾸고, 설명은 이해가 갈 수 있을 만큼만, 하지만 여운이 남는 정도로. 그래서 두꺼운 부피의 산문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를 읽는 것 같다.

번역도 매혹적으로 우아해서, 원문을 그대로 살린 번역 정도가 아니라 원문을 뛰어넘는 번역을 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베껴쓰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이 나와서 나중에는 포기했다. 그냥 손에 닿는 곳에 두고 반복해서 읽으련다. 원서로도 하나 사야겠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 )안은 내 생각.



- 육지에는 바다보다 600배나 되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 (밀도? 아니면 바이오매스? 검색했는데 못 찾겠다.. 어느 쪽이라 해도 놀라운 차이네.)

- 매 10년마다 프랑스 크기의 숲이 지구에서 사라졌다.

- 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는 문화 말이다. (과묵함을 소재로 한 핀란드 유머들이 떠오른다. 따루처럼 수다 좋아하는 성격이면 한국이 더 잘 맞겠구나 싶다.)



- 아빠가 난방이 들어오는 옷장에 우리 옷을 걸었다. (60년대에 이미 이런 옷장이 있었구나! 추운 나라에는 재래식 난방 옷장이 있었던 걸까?)



- 엄마와 딸로 산다는 것은 뭔지 모를 원인으로 늘 실패로 끝나고 마는 실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을 만나다니!)




-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한 해에 나무 한 그루씩 심자. 마당이 있는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나무를 한 그루 심고 집주인이 눈치 채는지 기다려보자. 만일 눈치를 채면 그 나무가 늘 거기 있었다고 주장해보자. 환경을 위해 나무를 심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하는 칭찬까지 더해보자. 집주인이 그 미끼를 물면 나무 한 그루를 더 심자. 둥치 부분에 철망을 치고 감상적인 분위기의 새집도 하나 매달아서 나무가 영구적으로 거기 서 있어야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자. 그런 다음 그 집에서 나와 요행을 바라보자. (하하. 이 부분 읽으면서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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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 왕조 기록문화의 꽃, 의궤
한영우 지음 / 효형출판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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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儀軌)는 국정보고서이다. 관련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의 1795년의 화성행차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며, 이 책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원본의 양이 워낙 방대해 1/10도 담지 못했다고 한다. 기록문화의 백미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원행정례>(園幸定例)는 정조시대의 수원행차를 전반적으로 정리한 것인데, 정리의궤만큼 자세하지는 못하다. 모든 것을 자료로 남겼으며 모든 것이 실명제이다. 저자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정치의 투명성, 책임성에 자신이 있었던 정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정조를 위대한 군주라고 처음부터 못박으며 과연 현재의 최고통치자 중 어느 누가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지를 묻고 있다.

정조가 즉위한 시기는 이미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고 화폐경제도 발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광역수도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실학 운동이 일어났고 근대를 향한 움직임들이 여러 분야에서 발견된다. 정조는 이런 시대 상황을 적절히 파악하여, 서울시전상인(市廛商人)들에게 부여했던 난전금지권(亂廛禁止權), 즉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혁파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했다. 이것은 사상(私商), 즉 난전(亂廛)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으로 독점에서 자유경쟁체제로 이행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정조의 이러한 통치 스타일이 마치 대기업 총수 같다(p.88)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정조는 과학기술과 고급학문을 융통성 있게 수용하는 한편, 주자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정립해서 부정적인 상업·대중 문화를 배제하여 학문의 발전에도 힘썼다. 이 같은 정조에 대한 평가 위에서 정조의 화성행차를 바라본다면 앞 뒤 맥락 속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이 가능할 것이다. 정조는 왜 화성(華城)을 건설하였는가?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어머니 회갑을 기념하는 화성 행차를 기획한 것은 상당히 큰 사업이었다. 화성을 군사 요지에 있는 군사 도시로 키우고 부수도(副首都)로 만들며 대도회(大都會)로 키워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려는 의도는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황제'의 나라로 승격하겠다는 야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은 여러 모로 치밀하게 기획된 계획도시였는데, 우선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실학 도시였고, 도덕적으로는 성인의 도시였으며, 행정적으로는 수도의 역할을 분담하는 부수도였고 군사적으로는 서울 남쪽을 방비하는 요새 도시였다. 도시 공사하면서도 노동자의 이름, 주소, 근무일수, 품값 등을 일일이 기록하는 등 민을 최대한 배려하려 했다. 정조는 화성을 자주 방문했다. 가는 도중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을 처리하고 지방 경제를 활성화하는 등의 부수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특히 1795(정조 19)의 현륭원 방문은 단순한 어머니의 회갑 잔치가 아닌 정치적 시위였다.

역사의 결을 따라가면서 내부 논리에 따라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는 글쓴이의 방식은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정조에 대한 개인적 칭찬에 함몰되어 비판적인 글쓰기에 실패한 것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렴하고 현명하며 침착한 지도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를 뽑을 수 있을 만큼 유권자들이 똑똑해지는 것이나 선거 제도가 잘 정비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분산시키고 우리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우리 손에 쥐는 일이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은 글쎄, 필요하긴 하지만 절박한 문제는 아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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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가사노동
루스 슈워츠 코완 지음 / 도서출판 신정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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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학자인 코완이 쓴 이 책은 역사책처럼 많은 자료들을 동원해서 큰 줄기를 엮어 나간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사기술의 변화를 살피면서 구체적인 주부들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서구(특히 미국)에서의 변화사를 추적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변화의 양상은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 현실과의 괴리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수많은 가전제품들과 주부 대상의 여성지, 그리고 그 안의 광고들과 부록들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이렇게 적절한 이론의 틀을 짜냈을까 싶어지면서 '맞아, 맞아'하고 맞장구까지 치게 된다.

코완이 제시하는 가사기술 전파과정에서의 핵심 개념은 '죄책감'이다. 끊임없이 높아지는 깨끗함, 아름다움, 영양, 고급스러움 등의 기준으로 여성들은 가사기구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높은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석. 그러나 그것이 노동계급 여성들에게는 분명 긍정적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대안적인 기술-사회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해결책은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다. 하지만 결론 부분이 좀 미진한들 어떠랴. 탁월한 분석을 해낸 작가에게 해결책까지 제시하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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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거다 러너 지음 / 평민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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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성, 집단 기억. 이 두 단어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아주 오랜 기간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았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어머니, 할머니가 이루어놓은 그 어떤 사상도 연계받지 못하고 연장부터 다시 만들어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자매와 어떠한 공동 작업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했다. 시지프스의 끝없는 반복노동처럼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종적으로 단절되고 횡적으로 고립되어 단순한 남성중심성 비판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저 원점만 맴돌 뿐이었다.

남성들이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누적된 학문 체계를 나날이 발전시켜갈 때에도 여성들은 이 비극적인 순환 덫에 잡혀 있었다. 게다가 학문에 접근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조건은 매우 매우 까다로웠다. 귀족이고, 아버지가 학문을 하고 있어야 하며, 그가 여성의 학습에 호의적이어야 하고, 수녀가 되든지 독신이든지 해서 결혼에 묶이지 않아야 하고,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혹은 남편이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학자이라면 과부가 된 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서구에서의 일이다. 한국에서 여성들은? 생각할수록 절망적이다. 가부장제 사회 제도 때문에 여성의 재능과 인생이 소모되어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나 체계 수립자가 나올 수 없었다는 문제 의식으로 장장 15년에 걸쳐 역사 속에서 탐구하여 이루어낸 과업이 담긴 여성학의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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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하의 만화토피아 - 마니아가 추천하는 일본 망가 베스트 50
오은하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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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편하게 느껴질 책이다. 아무리 만화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들어 보았을 법한 만화가 상당수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이 때문에 이 책의 존재 의의가 어설퍼지는 효과 또한 생긴다.

우선 만화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읽을 필요가 전혀 없는 책이다. 그리고 만화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개론서 내지는 입문서라고 해도, 특별히 체계적으로 (공을 들여) 정리해 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주위에 있는 만화광에게 '뭐 읽으면 좋을까?'라고 묻기만 해도 술술술 나올 대답 이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만화의 평을 한 권에 담으려다 보니 하나 하나의 평이 너무 깊지 않다는 점도 걸린다. 서론을 풀고 이제 본론이 나오나 싶으면 글이 끝나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소개된 만화를 다시 생각하면서, '맞아, 정말 이렇지'하고 새록새록 느끼게 되는 잔재미를 주는 점이 장점이다. 만화맹에게는 괜찮은 입문서 역할을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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