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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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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단편부터 중편까지 10개의 소설로 이루어진 책이다. 계엄 정국 때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의 몇 이야기들(승객, 병조림, 실화, 심장)은 답답하고 애매한 다소 열린 결말이어서 현실에서도 지쳐 있는 (탄핵 의결되었나? 윤석열 체포되었나? 구속되었나?) 상태에서 읽어나가기가 힘들었다. 다른 상황에서 읽었다면 훨씬 더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녹색 아이들’은 듀나의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와 보르헤스의 가상역사 소설들 느낌을 주었고, 예상 가능한 전개로 아주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병조림’, ‘심장’은 냄새와 질감, 공기의 색채가 생생하게 다가왔고 몰입감이 높은 이야기였으나, 아리송한 열린 결말이라 ‘왜 여기서 끝내!! 다음 이야기 내놔!’라고 외치고 싶게 만든다. 작가의 멱살을 잡고 싶다가 제풀에 지쳐, 이게 작가의 의도였나 또 납득되어버리기도 한다. (‘심장’에는 중국의 반가사유상이 나오는데 –반가사유상이라는 단어는 안 나온다- 작가가 반가사유상이 중국보다는 한국과 일본에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 궁금하다. 중국 반가사유상은 30cm 정도의 소형이 대부분이라, ‘심장’에 나오는 큰 불상은 드물 텐데... 작가가 철저하게 조사하는 스타일로 보여 이 부분이 의아함.) 신비로운 중국의 고승을 만나 커다란 깨달음을 얻고 삶이 달라졌어야 할 것 같지만, 그냥 그저 그런 일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결말을 곱씹으며 ‘그래, 사는 게 원래 그렇게 의미도 없고 방향도 없는 거지..’라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장편(掌篇)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짧은 첫 작품 ‘승객’도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를 다양한 결로 읽어낼 수 있게 하는 데에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트란스푸기움’은 지금 개봉 중인 영화 <애니멀 킹덤>과 비슷한 설정인 것 같다. 영화도 꼭 보고 싶다. 생명정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토카르추크의 상상력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다. 지금 벌어지는 생태학살을 막기 위해, 내가 예를 들어 넓적부리도요로 변하여 갯벌로 가서 도요새 무리에 섞여든다면, 그 사실을 아는 한국 사회에서는 ‘살인’을 막기 위해 개발을 막으려 할까? 하지만 굳이 형체가 변신하지 않아도 내가 도요새가 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애당초 존재의 경계는 희미한 것이니..
‘실화’는 익명성, 타자화에 대한 섬뜩한 우화다. ‘방문’도 다른 존재와의 공존을 불편해하는 세태에 대한 근미래(?) SF.
마지막 두 작품 ‘모든 성인들의 산’, ‘인간의 축일력’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종교, 영성, 죽음과 부활, 영생에 대한 집착, 희생양, 전통과 탈주,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인류의 어리석음, 기후위기와 쓰레기 누적, 공동체 파괴로 망해가는 지구에서 우리가 기댈 것은 과연 무엇..? 이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시적으로 녹여 냈다. ‘모든 성인들의 산’을 읽고 압도되었는데 그 다음 ‘인간의 축일력’은 또 대단했다. ‘모든 성인들의 산’은 죽음을 앞둔 심리학자가 비밀 프로젝트 속 입양아들의 심리테스트를 위해 스위스의 산 속 마을로 가서, 산 속 수녀원의 수녀들, 입양아들과 교류하며 프로젝트의 비밀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인간의 축일력’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흘만에 부활하는 존재가 발견되고 그 존재가 부활하는 연주기에 따라 인간 사회의 일년이 돌아가는 미래의 모습 속에서, 그 ‘신’을 돌보는 공무원네 집에 찾아온 딸 친구의 불편한 더부살이로 시작되는 균열을 보여준다. 긴장감이 엄청나다.
읽고 나서 책 수다를 떨고 싶은데 주변에 읽은 사람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인도는 왜 등장했을까. 왜 하필 인도에서 견습수녀를 찾아오는 내용이 있을까. 안나 수녀가 했던 용서받지 못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예스24와 알라딘에 서평들이 올라와 있긴 한데, 아니나다를까 민음사에서 서평단을 조직해서 나온 서평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기~다란 서평 하나는 ‘모든 성인들의 산’ 반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써놔서 안타까웠다. 댓글로 알려주고 싶었다. 작가가 대놓고 반전을 명확히 알려줬는데 그분은 왜...) 출판사에서 유도한 서평을 제외하면 서평이 참 적다. 왜 사람들이 책을 안 읽을까. 왜 서평을 안 쓸까. 슬프다.
폴란드어를 한 글자도 모르지만 역자의 노고로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번역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적어 본다.
‘트란스푸기움’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최 박사’가 등장한다. 작가가 한국어에 대해 얼마나 파악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좀 의아했다.
“최 교수에게는 ‘그 남자’도 ‘그 여자’도 아닌, 중성에 해당하는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할 테지만, 최 교수의 가정에서 통용되는 언어로는 그러한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이러한 중성적 표현은 오랫동안 인간이 아닌 존재를 위한 것이었고, 인성이란 성별의 양극성을 통해 발현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작가가 최 교수의 집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라고 설정하고 썼다면, 위 문장들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어는 영어에서 성 중립적인 대명사(ze, they, he/she 등... 프랑스에서는 iel)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찾던 이상향같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 여성, 제3의 성, 무성 등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인격에 대한 대명사이다. 오히려 성별을 넣은 ‘그녀’ 같은 대명사가 한국어에서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더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어에서는 3인칭 대명사의 사용이 제한되어 해당 단어를 반복하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작가가 최 교수의 집에서 유럽 언어처럼 성별이 있는 대명사를 쓴다고 설정했다면 납득되긴 한다. 작가의 생각이 궁금하다.
트란스푸기움 마지막에 한나가 할머니와 대화하며 할머니의 손을 쓰다듬는 장면이 나온다.
“손등에는 간 손상으로 인해 어두운 빛깔의 반점이 가득했다.”
이것은 간 손상으로 인한 반점으로 자주 오역되는 간반(肝斑), 즉 검버섯(저승꽃)일 가능성이 높다. 영어로 liver spot으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어 검색해봤으나, 영어 번역본은 못 찾고 포르투갈어 번역본은 찾았다.
...pancadinhas nas mãos magras cobertas de manchas hepaticas escuras...
manchas hepaticas는 liver spots, 즉 간반이 맞다. 간단히 검버섯이라고 번역하면 적절할 것이다.


"다른 질서가 있을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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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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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쿱 생협 출판사에서 나온 책! 작은 출판사에서 대박 쳤구나.

 

자신의 전문 분야와 자신의 삶을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낸 서정적인 과학책이란 면에서 샌드라 스타인그래버를 연상시킨다. 문체도 비슷하다. 스타인그래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쿨한 태도로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이나 자신의 성 경험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쓰곤 했다. 호프 자런도 비슷하다. 냉정한 가족 관계에서 받은 상처, 여성으로 겪은 차별, 정신적인 약점, 소울 메이트 빌의 장애 등을 담백하고 정제된 문장으로 그려낸다. 노르웨이어를 할 줄 안다는 것도 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아름답게 설명하는 능력은 연구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을 것이다. 자런은 나무를 연구하다가 나무를 이해하게 되고 나무와 닮아간 것 같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외계 언어를 공부하다가 언어 속에 담긴 세계관까지 습득하게 되고 과거와 미래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자런도 나무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나무에 대해 공부하고 싶고 자런의 논문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몽실몽실 올라온다. 나무들에 대한 신기한 카더라 통신들이 이런 연구들에서 나왔구나, 하고 출처를 확인하게 되는 지적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화두는 빌이라 할 수 있다. 빌이랑 대체 무슨 사이인지, 처음에 내 아기라고 나오는 아기는 누구 아기인지 궁금해서 읽는 내내 애간장이 탔다. 곰 같은 문체로 여우 같은 플롯을 짰다고나 할까. 책 펼치기 전엔 있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은 스릴까지 갖췄다! 빌처럼 일 코드, 유머코드, 상대의 장단점까지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이란성 쌍둥이같은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다.

 

문장 하나하나가 천 번씩 담금질해서 나왔다는 인상을 준다.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르고, 단어의 배치를 바꾸고 또 바꾸고, 설명은 이해가 갈 수 있을 만큼만, 하지만 여운이 남는 정도로. 그래서 두꺼운 부피의 산문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를 읽는 것 같다.

번역도 매혹적으로 우아해서, 원문을 그대로 살린 번역 정도가 아니라 원문을 뛰어넘는 번역을 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베껴쓰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이 나와서 나중에는 포기했다. 그냥 손에 닿는 곳에 두고 반복해서 읽으련다. 원서로도 하나 사야겠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 )안은 내 생각.



- 육지에는 바다보다 600배나 되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 (밀도? 아니면 바이오매스? 검색했는데 못 찾겠다.. 어느 쪽이라 해도 놀라운 차이네.)

- 매 10년마다 프랑스 크기의 숲이 지구에서 사라졌다.

- 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는 문화 말이다. (과묵함을 소재로 한 핀란드 유머들이 떠오른다. 따루처럼 수다 좋아하는 성격이면 한국이 더 잘 맞겠구나 싶다.)



- 아빠가 난방이 들어오는 옷장에 우리 옷을 걸었다. (60년대에 이미 이런 옷장이 있었구나! 추운 나라에는 재래식 난방 옷장이 있었던 걸까?)



- 엄마와 딸로 산다는 것은 뭔지 모를 원인으로 늘 실패로 끝나고 마는 실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을 만나다니!)




-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한 해에 나무 한 그루씩 심자. 마당이 있는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나무를 한 그루 심고 집주인이 눈치 채는지 기다려보자. 만일 눈치를 채면 그 나무가 늘 거기 있었다고 주장해보자. 환경을 위해 나무를 심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하는 칭찬까지 더해보자. 집주인이 그 미끼를 물면 나무 한 그루를 더 심자. 둥치 부분에 철망을 치고 감상적인 분위기의 새집도 하나 매달아서 나무가 영구적으로 거기 서 있어야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자. 그런 다음 그 집에서 나와 요행을 바라보자. (하하. 이 부분 읽으면서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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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 왕조 기록문화의 꽃, 의궤
한영우 지음 / 효형출판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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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儀軌)는 국정보고서이다. 관련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의 1795년의 화성행차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며, 이 책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원본의 양이 워낙 방대해 1/10도 담지 못했다고 한다. 기록문화의 백미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원행정례>(園幸定例)는 정조시대의 수원행차를 전반적으로 정리한 것인데, 정리의궤만큼 자세하지는 못하다. 모든 것을 자료로 남겼으며 모든 것이 실명제이다. 저자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정치의 투명성, 책임성에 자신이 있었던 정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정조를 위대한 군주라고 처음부터 못박으며 과연 현재의 최고통치자 중 어느 누가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지를 묻고 있다.

정조가 즉위한 시기는 이미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고 화폐경제도 발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광역수도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실학 운동이 일어났고 근대를 향한 움직임들이 여러 분야에서 발견된다. 정조는 이런 시대 상황을 적절히 파악하여, 서울시전상인(市廛商人)들에게 부여했던 난전금지권(亂廛禁止權), 즉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혁파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했다. 이것은 사상(私商), 즉 난전(亂廛)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으로 독점에서 자유경쟁체제로 이행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정조의 이러한 통치 스타일이 마치 대기업 총수 같다(p.88)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정조는 과학기술과 고급학문을 융통성 있게 수용하는 한편, 주자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정립해서 부정적인 상업·대중 문화를 배제하여 학문의 발전에도 힘썼다. 이 같은 정조에 대한 평가 위에서 정조의 화성행차를 바라본다면 앞 뒤 맥락 속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이 가능할 것이다. 정조는 왜 화성(華城)을 건설하였는가?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어머니 회갑을 기념하는 화성 행차를 기획한 것은 상당히 큰 사업이었다. 화성을 군사 요지에 있는 군사 도시로 키우고 부수도(副首都)로 만들며 대도회(大都會)로 키워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려는 의도는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황제'의 나라로 승격하겠다는 야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은 여러 모로 치밀하게 기획된 계획도시였는데, 우선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실학 도시였고, 도덕적으로는 성인의 도시였으며, 행정적으로는 수도의 역할을 분담하는 부수도였고 군사적으로는 서울 남쪽을 방비하는 요새 도시였다. 도시 공사하면서도 노동자의 이름, 주소, 근무일수, 품값 등을 일일이 기록하는 등 민을 최대한 배려하려 했다. 정조는 화성을 자주 방문했다. 가는 도중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을 처리하고 지방 경제를 활성화하는 등의 부수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특히 1795(정조 19)의 현륭원 방문은 단순한 어머니의 회갑 잔치가 아닌 정치적 시위였다.

역사의 결을 따라가면서 내부 논리에 따라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는 글쓴이의 방식은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정조에 대한 개인적 칭찬에 함몰되어 비판적인 글쓰기에 실패한 것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렴하고 현명하며 침착한 지도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를 뽑을 수 있을 만큼 유권자들이 똑똑해지는 것이나 선거 제도가 잘 정비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분산시키고 우리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우리 손에 쥐는 일이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은 글쎄, 필요하긴 하지만 절박한 문제는 아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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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가사노동
루스 슈워츠 코완 지음 / 도서출판 신정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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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학자인 코완이 쓴 이 책은 역사책처럼 많은 자료들을 동원해서 큰 줄기를 엮어 나간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사기술의 변화를 살피면서 구체적인 주부들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서구(특히 미국)에서의 변화사를 추적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변화의 양상은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 현실과의 괴리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수많은 가전제품들과 주부 대상의 여성지, 그리고 그 안의 광고들과 부록들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이렇게 적절한 이론의 틀을 짜냈을까 싶어지면서 '맞아, 맞아'하고 맞장구까지 치게 된다.

코완이 제시하는 가사기술 전파과정에서의 핵심 개념은 '죄책감'이다. 끊임없이 높아지는 깨끗함, 아름다움, 영양, 고급스러움 등의 기준으로 여성들은 가사기구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높은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석. 그러나 그것이 노동계급 여성들에게는 분명 긍정적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대안적인 기술-사회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해결책은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다. 하지만 결론 부분이 좀 미진한들 어떠랴. 탁월한 분석을 해낸 작가에게 해결책까지 제시하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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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거다 러너 지음 / 평민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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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성, 집단 기억. 이 두 단어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아주 오랜 기간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았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어머니, 할머니가 이루어놓은 그 어떤 사상도 연계받지 못하고 연장부터 다시 만들어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자매와 어떠한 공동 작업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했다. 시지프스의 끝없는 반복노동처럼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종적으로 단절되고 횡적으로 고립되어 단순한 남성중심성 비판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저 원점만 맴돌 뿐이었다.

남성들이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누적된 학문 체계를 나날이 발전시켜갈 때에도 여성들은 이 비극적인 순환 덫에 잡혀 있었다. 게다가 학문에 접근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조건은 매우 매우 까다로웠다. 귀족이고, 아버지가 학문을 하고 있어야 하며, 그가 여성의 학습에 호의적이어야 하고, 수녀가 되든지 독신이든지 해서 결혼에 묶이지 않아야 하고,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혹은 남편이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학자이라면 과부가 된 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서구에서의 일이다. 한국에서 여성들은? 생각할수록 절망적이다. 가부장제 사회 제도 때문에 여성의 재능과 인생이 소모되어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나 체계 수립자가 나올 수 없었다는 문제 의식으로 장장 15년에 걸쳐 역사 속에서 탐구하여 이루어낸 과업이 담긴 여성학의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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