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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맛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매우 기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아마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와 신화들의 구조를 따왔기 때문이리라. 라푼젤, 판도라의 상자, 헨젤과 그레텔, 인어공주...등등.
하지만 이 책 속 단편들은 마냥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만 한 동화의 콩깍지를 한꺼풀 벗겨낸 양, 시리도록 차갑기만 하다.
예를 들어 <상추, 라푼젤>에서는 아내의 명령으로 옆집 여자의 상추밭에서 상추를 훔쳐오던 남자는 옆집여자와 바람이 나고, 그 둘 사이에 나온 여자아기 라푼젤은 '왕자'라는 이름의 애송이와 혼전임신을 하게 되어 왕자의 집에 당당히 입성하지만, 왕자는 바람이 나고 라푼젤의 속을 썩인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헨젤과 그레텔의 집>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 지체장애아인 동생을 모두 부양하고 있는 여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폭풍속에서 침몰의 위기를 맞은 배와 같은 그녀의 집에서는 결국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내쫓기로 결정한다. 놀이동산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데려다주며, 저녁때쯤 되면 미아보호소에 가서 길을 잃었다고 말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라고 한다. 하지만 결국 잃어버리게 된 것은 지체장애아인 동생 보배였다. 한참을 동생을 찾아다니던 주인공은 이내 포기하고 출구를 향해 도망친다. 눈가에 밟히는 노란색의 미아보호소를 애써 모른척하며 달려가는 그녀는 '보배야, 돌아오지마. 절대로'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렇듯 이 책 속 이야기들에서는 약한 자에 대한 배려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현실과 닮아있는지 이젠 그 이야기들을 읽고 있는 내 눈과 마음도 시리다. 아직은 동화 속 환상에서 깨어날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아프고, 때론 그 잔인함과 냉정함에 몸이 으스스 떨렸다.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들이 동화라는 화려한 색동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이 책은 내겐 또 하나의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