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공룡 스페셜에디션
올리브 스튜디오 글.그림 / 킨더랜드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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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 방영된 한반도의 공룡이라는 faction 다큐가 ‘기준’이라고 소리치자, 여기에서 어린이용 그림책 ‘한반도의 공룡’과 영화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이 뒤를 잇는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영상물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우호적인듯하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근 5년 만에 영화관을 찾았었다. 수준 높은 CG에 가슴 벅찼고, 점박이의 가족과 ‘푸른눈’의 죽음에 눈물이 흐를뻔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다만 스페셜 에디션으로 출간된 ‘한반도의 공룡’이라는 글과 그림으로 된 책에 대해서도 이런 호의적인 평가가 가능한가는 어린이용 서적들이 가져야 할 요소인 시제, 관점, 운율, 스토리라인 등이 조화로운가 하는 것으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 네 가지 요소들 모두가 엇박자를 낸다. 이 책이 영상의 CG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어서 그림으로 족하다고 말하면 더 이상 왈가왈부, 가타부타할 것이 못되지만, 읽는 책으로서 접근한다면 좋은 평가는 내랄 수 없다. 이것은 한반도의 공룡을 사랑하는 아이의 아버지로서 절절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8천만 년 전 공룡들이 살던 백악기 한반도에는 건기와 우기 두 계절만 있었습니다. 햇볕만 내리쬐는 건기에는 많은 공룡들이 물을 찾아 먼 길을 떠납니다.’ 한 페이지에 두 개의 시제가 혼동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먼 길을 걸어 친타오사우루스들이 물을 찾았습니다.’ 라고 되어있다. 현장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매 페이지마다 친밀감이 없는 시제들이 형제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읽기에 적당한 운율도 없다. ‘8천만 년 전 공룡들이 살던 백악기 한반도에는 건기와 우기 이렇게 두 계절만 있었습니다. 햇볕만 내리쬐는 건기에는 수많은 공룡들이 물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먼 길을 걸어온 친타오사우르스들도 드디어 물을 찾았습니다.' 로 수정하면 보다 낫지 않을까.

 

‘몸길이 13미터의 거대한 맹수 타르보사우루스 점박이입니다. 15살의 점박이는 한반도에 사는 공룡들 중 가장 무서운 공룡입니다. 아주 세게 무는 힘과 강한 꼬리를 갖고 있어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면 ‘점박이는 힘껏 잡은 먹이를 암컷 타르보사우루스에게 자랑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생뚱맞다. 1페이지에서 7페이지까지만 살펴보아도 관점과 스토리라인이 억지스럽게 연결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듣는 이나 읽어주는 이에게 치명적이다. 멋진 삽화에 어울리는 잘 다듬어진 글을 개정판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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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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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RK OF GENIUS, 원제이다. 출판사 입장이 되어보면 ‘천재의 불꽃(기폭제)’이나 ‘천재가 되는 법’, ‘천재처럼 생각하기’라고 제목을 붙이기엔 지나치게 평이하고 촌스럽다. ‘생각의 탄생’은 그나마 고전적인 늬앙스를 발산한다. 그렇다고 참신하지는 않다. 책 제목으로 탄생이라는 단어를 검색입력해보면 수많은 제목들이 나열된다. 패션, 성격, 제국, 아버지, 성경, 인민, 캐릭터, 논증, 모델, 신자유주의, 경영, 혁명 등등 생각의 자리에 무엇을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요즘 구설의 최고자리를 차지한 김총수의 화법대로 한마디로 ‘실패’다. 그런데 왜 책을 샀을까? ‘실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있다 라는 게 평소의 신념이었고, 온라인 구매라고 할 지라도 실패의 경험이 극히 적었다는 자신감과 책의 표지와 차례, 요약, 다른 여행자의 리뷰만으로도 충분히 시공을 뚫고서 서점에서 실물을 구경한 것과 동일하다는 경험치와 약 300권의 구매 중에 발생할 수 있는 헛다리짚기의 확률적 수렴 이벤트 발생이 실수의 변명이 됨직하다. 물론,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일 뿐이다. 책은 언제나 거울과 같아서 그 앞에 비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책의 주제는 마지막 장에 서술된 統合교육, 全人교육에 있다. 생각하는 방법론의 다양함과 사례들은 기술과 기능적인 측면의 설명이 중점인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것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여러 자질들을 전면적으로 골고루 발달시키자는 슬로건을 꺼내 든다. 이 순간 여행자는 病이 든 봉지와 藥이 든 봉지를 모두 들고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착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인이란 단순히 나열한 기술들의 연계과 통합을 갖춘 사람이고, 그것이 천재(창작)라고 말하는 것인가? 한자사전에서는 기술이나 재능만을 중요시 하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을 전인으로 정의한다. 사회적 의미가 들어간 전인과는 다른 의미의 전인임은 의역의 과잉이거나 오역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깊숙이 들어가보면 각 장의 생각도구들만으로도 이 책의 요약은 가능하다.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이다. 사례들은 보통의 인간들과는 괴리감이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들이다. 그걸로 ‘끗’. 생각도구의 의미는 각 장의 앞부분에 설명되어 있다. 잉여력이 딸리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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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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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경에 초판이 발행된 책이 이제사 다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드라마의 재미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줄이 끊어져 산을 넘어간 연처럼 이미 잡을 수 없을만큼 날아가버린 상태이다. 채윤이 출상술을 부리며 하늘을 나는 순간 현실의 연결고리는 단절되었고, 채윤은 이미 과거도 아닌 무림 속으로 세종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어서 따르는 집현전 학사들과 끄트머리에 등장할 한글까지도 극작가의 내공을 넘은 신공 무리수에 엮여 줄줄이 끌려나올 심산이다. 이 책이 한글창제에 관련된 비화들을 소설화한 것임에도 그것을 기초로 한 드라마는 초반의 진중함을 잊어버리고 경망한 소품들을 집어넣어 소설이 지향하고자 했던 주제를 일거에 탈탈 털어버리는 과욕을 부린다.

 

북방의 전쟁에서 김종서 장군의 눈에 띈 강채윤은 장군의 추천으로 궁궐의 겸사복이 된다. 그리고 어느날 집현전 학사가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에 빠져죽으면서 그 의문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이후로도 학사들의 죽음은 계속된다. 끈질기게 뒤를 캐던 채윤은 그것의 연원에 '고군통서(억울하게 죽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에 대한 애도와 조선이 자주적으로 일어서야  함을 울분으로 토한 이도의 글)'라는 책이 있음을, 또한 연쇄살인은 오행 상극(水克火-火克金-金克木-木克土-土克水, 첫번째 피살자 장성수는 우물에 빠져죽음)의 순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세종의 경세치용, 격물치지 추구를 잡학으로 치부하던 경학파(주자가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하여 이기론의 체계를 세움, 그래서 오행 상극에 따라 잡학을 추구하는 학자들을 처단한 것임) 학자 대제학 최만리와 최만리를 통해 권력을 꿈꾸는 직제학 심종수에게 분노의 불을 지핀 것은 한글 창제였다. 표면적으로 경학은 명과 조선을 이어주는 매개체였으며 그것의 절단은 국가의 존폐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한자 독식 기반의 기득권(사대부, 성균관, 서원, 명과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등등)이 한글의 영향으로 그들의 관직과 부를 나누거나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극도의 불안과 초조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한자만이 통용되던 시대에 한자는 사물 하나에 한자 하나가 대응되는 상형이었고, 그것의 짜임이었다. 따라서 무엇을 표현하는 데에는 많은 글자가 필요했고, 그것을 익히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단지 자음과 모음 28자만으로 모든 말과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한글이 일상화된 현재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을 더이상 새삼스러워 하지 않는다. 한자와 영어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한글의 빈속(의미)를 채우기에 바쁜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글의 진정은 처음부터 높은 곳을 향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자를 안고 태어난 한글은 새로이 의미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글의 확산, 저변화를 통한 백성과의 소통, 경세치용, 이용후생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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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원석영 옮김 / 열음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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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정 자신이 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여럿사람이 했다고 우길 경우 자신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했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자신은 그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곤란에 빠진다. 그래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겠지만, 세상의 강요는 그리 녹록치 않다.

 

이 책은 크게 네가지의 주장이 혼재되어 있다.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지가 환상이나 착각이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꿈으로써 역할하며 삶의 행복과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 이것의 현재적 지적은 중세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그것를 통해 국민의 자기결정권에 따른 책임을 부과하고 처벌을 실현함으로써 체제와 기득권 수호를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는 점, 이렇듯 자유의지의 실재는 부정되지만 사회의 다른 구성원을 보호하고 사회질서와 체제유지를 위해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요약으로 들 수 있다. 

 

20세기 구조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했던 프로이드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개척하여 인간이 생각의 주체라는 고정관념을 거부하여 피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푸코, 레비스트로스, 라캉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은 그 고유한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요소와의 관련 속에서 인간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구에서는 인간일지는 몰라도 즉응의 시간의 빼앗고 달이나 화성으로 옮겨놓는 순간 인간은 이미 인간이 될 수 없다. 보환경이 낱생명을 받쳐주지 않는한 인간은 결코 온전한 생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인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맹목적이고 근시안적으로 환경과 타협하고 적응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진화론적으로 사람의 뇌는 생리·존기능이 주가 되는 파충류뇌(약 3억 년 전에 진화), 사회적 행동기능이 주가 되는 포유류뇌(약 2억 년 전에 진화), 그리고 이성적 사고기능을 담당하는 인간뇌(이성뇌, 약 20만 년 전 진화)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비상시에 있어 인간을 지배하는 뇌의 우선순위는 파충류뇌 > 포유류뇌 > 인간뇌(이성뇌)의 순서를 따른다고 한다. 매뉴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특기가 뒷북을 치는 것임을 상기해보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도 모르는 그 무엇이다.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과연 인간인가 아니면 생물학적 프로세스인가. 혹 우리를 추동하고 있는 것은 유전자, 뉴런과 시냅스, 호르몬 같은 것은 아닐까. 왜 우리의 뇌는 동물원을 뛰쳐나온 원숭이마냥인가. 우리는 누군가가 결정해놓은 것을 나중에서야 우리가 결정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자율신경프로세스의 작동을 우리는 자유의지의 작용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우리를 마음속에서 끌어내는 것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문화든 이성이든 결국 한가닥 찾기도 힘든 실핏줄같은 원초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이라는 것에 질질 끌려다니며 맥못추는 광경과 마주하지 않던가 말이다. 

 

TV속의 걸그룹은 완전히 벗지는 않았지만 이미 성을 파는 셈이다. 어리고 건강하고 섹시한 몸매는 더욱 더 선정적인 동작들을 연출하는데 열을 올린다. 그리하여 그들의 몸매와 동작은 어느새 우리의 시선을 훔친다. 이미 그들의 기획사는 알고 있다. 인간의 동물성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경제적으로 이용하기에 쉽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돌은 각진 돌이 되었다가 다시 매끄럽고 날카로운 돌이 되었다. 인간의 환상은 도구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것은 인간의 번영과 문화를 가능케 했다. 지금 인간은 해저와 우주로의 이민을 준비중이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로는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정확히는 환상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인간은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호모 메타지쿠스다.

 

 

2.

책등을 향해 구부렸던 책의 덧표지 날개는 진정으로 날개처럼 모양을 잡았다. 저자인 부케티츠의 프로필이 그 날개 위로 새겨져 있다.『빈 대학의 교수이며 국제적으로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이며 진화론, 진화론적 인식론, 진화론적 윤리학, 사회생물학, 생물학의 역사와 이론』등에 능하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자유의지의 환상을 깨부수겠다며 독자들을 이끌고 나서지만, 어디쯤엔가 이르러 엉뚱하게도 그래도 환상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며 원고측 입장으로 돌변해버리는 엔딩을 선물한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가감산하고 나면 남을 게 없는 소위 힘만 뺐다는 포도당 소모론을 내세우며 이 책의 가치를 절하하기도 한다.  

 

부분의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운신한다는 것에 강한 믿음을 부여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 축적을 통해 자율적인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그다지 자신에게 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교육과 사회화란 경험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즉 법과 종교(기독교), 윤리, 도덕, 질서, 교양있음 같은 통제에 따를 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다는 법칙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신의 선한 의지 아래 있을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듯이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책임지우고 지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제 종교의 교리는 법망으로 변질되었으며, 법망은 자본주의 질서로 변질되었다. 동서양을 통틀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만큼 인간을 속절없는 나약체로 만드는 문장이 있던가 말이다. 월터 리프만과 에드워드 버네이스, 요제프 괴벨스 같은 사람들이 선동질로 인간을 요동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인간의 무기력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해서 사회가 달라지거나 주변이 달라지지 않는다. 운명이나 결정론에 비중을 둠으로써 경중의 실수들을 매달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발걸음에 대한 극히 개인적인 특템의 행복감이 순간 일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으로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여력은 상실될 것이다. 제로섬게임이란 이런 것이다. 여전히 인간이 동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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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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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존재,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자기자신뿐인가. 바지춤을 잡아끌던 초반은 어느샌가 몽환 속으로 여행자를 밀어넣는다. 세계대전이 엮이고, 에바부인과의 사랑이 엮이고, 막스 데미안과 합체가 되는 압락사스는 작가에게조차 불투명한 대상처럼 보인다. 다만 적당한 수준의 餘地가 계속해서 노력과 시도를 불러오며, 가늠할 수 없는 곳의 행성에 대해 상상의 끈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달에 대한 우리의 낭만과 사랑이 계속되듯이, 성장통과 더불어 자기찾기라는 주제는 그것을 앓고 있는 이에게는 복상 방망이이다.

 

현실은 현실로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 현실을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해 현실은 결국 우리 안에서 보여지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어떤 것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을 가공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그것을 품은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천갈래 만갈래로 뻗치고 있고, 그 지점에서 우리의 갈등이 시작되고 초심자의 혼란은 증식되는 것이다. 일탈이나 방황의 가지치기가 된 기존의 세계는 청년기를 끝낸 자라고 해서 쉬이 뜨거운 해후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평생을 바쳐 알껍질을 깨고자 하는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들이, 멋쟁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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