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원석영 옮김 / 열음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1.

진정 자신이 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여럿사람이 했다고 우길 경우 자신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했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자신은 그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곤란에 빠진다. 그래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겠지만, 세상의 강요는 그리 녹록치 않다.

 

이 책은 크게 네가지의 주장이 혼재되어 있다.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지가 환상이나 착각이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꿈으로써 역할하며 삶의 행복과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 이것의 현재적 지적은 중세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그것를 통해 국민의 자기결정권에 따른 책임을 부과하고 처벌을 실현함으로써 체제와 기득권 수호를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는 점, 이렇듯 자유의지의 실재는 부정되지만 사회의 다른 구성원을 보호하고 사회질서와 체제유지를 위해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요약으로 들 수 있다. 

 

20세기 구조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했던 프로이드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개척하여 인간이 생각의 주체라는 고정관념을 거부하여 피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푸코, 레비스트로스, 라캉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은 그 고유한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요소와의 관련 속에서 인간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구에서는 인간일지는 몰라도 즉응의 시간의 빼앗고 달이나 화성으로 옮겨놓는 순간 인간은 이미 인간이 될 수 없다. 보환경이 낱생명을 받쳐주지 않는한 인간은 결코 온전한 생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인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맹목적이고 근시안적으로 환경과 타협하고 적응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진화론적으로 사람의 뇌는 생리·존기능이 주가 되는 파충류뇌(약 3억 년 전에 진화), 사회적 행동기능이 주가 되는 포유류뇌(약 2억 년 전에 진화), 그리고 이성적 사고기능을 담당하는 인간뇌(이성뇌, 약 20만 년 전 진화)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비상시에 있어 인간을 지배하는 뇌의 우선순위는 파충류뇌 > 포유류뇌 > 인간뇌(이성뇌)의 순서를 따른다고 한다. 매뉴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특기가 뒷북을 치는 것임을 상기해보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도 모르는 그 무엇이다.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과연 인간인가 아니면 생물학적 프로세스인가. 혹 우리를 추동하고 있는 것은 유전자, 뉴런과 시냅스, 호르몬 같은 것은 아닐까. 왜 우리의 뇌는 동물원을 뛰쳐나온 원숭이마냥인가. 우리는 누군가가 결정해놓은 것을 나중에서야 우리가 결정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자율신경프로세스의 작동을 우리는 자유의지의 작용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우리를 마음속에서 끌어내는 것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문화든 이성이든 결국 한가닥 찾기도 힘든 실핏줄같은 원초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이라는 것에 질질 끌려다니며 맥못추는 광경과 마주하지 않던가 말이다. 

 

TV속의 걸그룹은 완전히 벗지는 않았지만 이미 성을 파는 셈이다. 어리고 건강하고 섹시한 몸매는 더욱 더 선정적인 동작들을 연출하는데 열을 올린다. 그리하여 그들의 몸매와 동작은 어느새 우리의 시선을 훔친다. 이미 그들의 기획사는 알고 있다. 인간의 동물성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경제적으로 이용하기에 쉽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돌은 각진 돌이 되었다가 다시 매끄럽고 날카로운 돌이 되었다. 인간의 환상은 도구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것은 인간의 번영과 문화를 가능케 했다. 지금 인간은 해저와 우주로의 이민을 준비중이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로는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정확히는 환상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인간은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호모 메타지쿠스다.

 

 

2.

책등을 향해 구부렸던 책의 덧표지 날개는 진정으로 날개처럼 모양을 잡았다. 저자인 부케티츠의 프로필이 그 날개 위로 새겨져 있다.『빈 대학의 교수이며 국제적으로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이며 진화론, 진화론적 인식론, 진화론적 윤리학, 사회생물학, 생물학의 역사와 이론』등에 능하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자유의지의 환상을 깨부수겠다며 독자들을 이끌고 나서지만, 어디쯤엔가 이르러 엉뚱하게도 그래도 환상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며 원고측 입장으로 돌변해버리는 엔딩을 선물한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가감산하고 나면 남을 게 없는 소위 힘만 뺐다는 포도당 소모론을 내세우며 이 책의 가치를 절하하기도 한다.  

 

부분의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운신한다는 것에 강한 믿음을 부여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 축적을 통해 자율적인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그다지 자신에게 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교육과 사회화란 경험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즉 법과 종교(기독교), 윤리, 도덕, 질서, 교양있음 같은 통제에 따를 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다는 법칙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신의 선한 의지 아래 있을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듯이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책임지우고 지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제 종교의 교리는 법망으로 변질되었으며, 법망은 자본주의 질서로 변질되었다. 동서양을 통틀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만큼 인간을 속절없는 나약체로 만드는 문장이 있던가 말이다. 월터 리프만과 에드워드 버네이스, 요제프 괴벨스 같은 사람들이 선동질로 인간을 요동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인간의 무기력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해서 사회가 달라지거나 주변이 달라지지 않는다. 운명이나 결정론에 비중을 둠으로써 경중의 실수들을 매달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발걸음에 대한 극히 개인적인 특템의 행복감이 순간 일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으로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여력은 상실될 것이다. 제로섬게임이란 이런 것이다. 여전히 인간이 동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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