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리스트, 마음을 해킹하다
김덕성 지음 / 조이럭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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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물과 관념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어떤 식으로 시작되는 것인가?  그리하여 궁금증과 호기심은 왜 마천루처럼 높게 쌓이는가?

어느날, 한 연예인의 학력논란을 마주하면서 고구마나 더덕을 캐내던 자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심각한 상황를 연상해냈다.  교묘한 언론플레이로 이미 그의 학력인증은 마치 캐내다 뿔어진 고구마나 더덕 같았다. 잔여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기에 그것에 대한 수고를 하느냐 아끼느냐의 갈등은 밭이랑의 길이에 비례하여 짧아질 것이며, 방치에 더 무게중심이 실릴 것이었다. 깊숙히 박힌 잔여 덩이를 캐내기 위해서는 현재 파놓은 구덩이의 두배 이상으로 그 폭을 진전시켜야 했지만, 곁눈질 하지 못하는 일꾼은 파놓은 흙더미를 삐대며 지나가는 것 같았고, 밭이랑의 길이가 얼마인데 쪼잔한 생각을 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듯했다. 잔여가 땅 속 깊숙이 틀여박혀 흰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에 대한 방치의 여부는 잔여분의 크기의 미지만큼인 것이었고, 그것의 전체를 파내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경험에 물려있다 보니 그것을 크기를 과도하게 측정한 개인의 호기심이 이 책과의 인연으로 발전된 사소한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면 능히 장신구를 삼을만한 구멍을 연출해내겠지만, 그 오랜 시간동안을 우리의 삶이 허락해줄지는 비관적이므로, 그 연예인에게 분명한 거짓을 노출할 시간을 내어줄만한 여유가 없다.
결국 직관적인 지각을 응용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쏠렸다. 몇 년간이었지만, 텔레비젼을 통해, 뉴스를 통해 그를 만나면서 왜 우리는 그의 언변과 행동에서 중요한 시그널을 뽑아올리고, 그것에 대한 허위를 벗겨내지 못했을까?  저자가 운영자로 있는 까페에 그 누군가가 올린 바로 그 연예인의 표정과 손동작에 주목한 사진과 해석이 내게 던진 미끼였고, 그것을 덥썩 물었던 사람은 뜻하지 않게 물 위의 허공과 하늘과 육지의 단단함을 느껴볼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이 책의 능동적 욕구는 단순한 차이의 발견과 인지에 있지 않고 인간의 신경에 대해 언어를 부여하고 대화와 행동을 통한 조절이나 제어를 목적하고 있었다.

멘탈리스트(MENTALIST)란  정신적인 예리함, 최면 제안을 이용하는 사람, 남의 생각과 행동을 능히 조정하는 사람이라 한다. 특히 이 책은 미드 멘탈리스트의 분석을 통해 그것을 현실화하는 연구가 선진국에서는 진행중이며, 드라마상의 극적요소를 배제시키더라도 앞으로 신경언어(NEURO LINGUISTIC HACKING)연구분야로서 의미있는 자리매김을 할 것이라 역설한다. 또한 이를 통한 광고, 선전, 통제, 조절 등이 이미 우리사회 깊숙히 침투해 있으며, 이를 간파하고 이에 이용당하지 않는 것도 신경언어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목적 중에 하나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산식처럼 반드시 어떠한 조건을 주면 어떠한 행위를 유발한다는 식의 정립은 확언하기 어렵다. 이는 많은 계발서나 심리서적이 갖는 특징이며, 어떤 식의 조절이나 통제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수 많은 모르모트(인간)가 필요한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직업은 정신과 의사, 심리상담사, 프로파일러 같은 종류에 특정될 것이다. 또한 개념의 옷을 입지 못했던 심리파악이나 인지 및 대화들이 턱시도를 입고 나왔을 때 보여지는 천양지차는 마치 옴므 같은 프로그램에 스타일 쇄신을 신청한 시청자가 보여주는 BEFORE/AFTER 같은 느낌을 준다.

다만, 『최면은 반드시 침상에서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마인드에 기초하고 있는 이 책은 상대 주변의 사물을 통해서, 상대 심리에 동감함으로서, 신체접촉이나 강한 주시를 통해, 상대의 심리에 잠입하는 방법(대화) 등이 있음을 친절히 설명한다.
특히 최면의 진실에 관한 부분이나 자유의지에 관한 환상이나 착오는 이 책의 수렴과 확장성을 외연外延한다. 

1960년대 만성 두통에 시달려오던 앨리스란 여성은 심리상담을 받던 중 최면치료를 행하게 된다. 그런데, 최면술사와 그 여성은 그녀가 겪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의 아버지를 어린이성폭행범으로 경찰에 고소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3심에서 무죄로 석방된다. 그녀의 아버지를 변론했던 변호사가 그녀가 겪었다고 했던 이야기들이 실린 과거의 신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린시절 그녀는 그 신문을 읽고서 그것을 정신적인 충격을 내적으로 감수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과 혼동하며 그것을 두통으로 표출하고 살았던 것이었다. 물론 최면을 통해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에 접근해볼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p.161~p.162)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프란츠 M. 부케티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환상이 인류 문명에 많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다준 하나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의 뇌과학자 이케가야 유우지는 운동지령 반응이 선행하고 나서 의사결정의 반응이 후행한다고 한다. 즉 자신의 의지로 행했다고 자위할 뿐인지 이미 신경계에서 자동반응으로 그것을 처리한 것이라고 한다.(p.208 ~p.209,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열음사,2009 , 『교양으로 읽는 뇌과학』- 은행나무, 2005)
 

 아쉽게도 미드『멘탈리스트』를 보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 책의 매력은 반감된다. 이 책은 미드 『멘탈리스트』의 주석에 가깝기 때문이다.
신경언어해킹의 입문서 내지 소개서에 가까운 이 책을 넘어 실습서가 나온다고 하니 저자의 새로운 연구가 담긴 신간을 학수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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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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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은 놀랄만큼 솔직하다 못해, 상대에게 험담 소재꺼리를 제공해주기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시종일관 차분한 어투로 진행되는 서술은 가감없이 이어지고, 어떤 울컥거림마저도 전혀 거부하고 있다. 노무현이라는 향기에 심취해 훔칠 눈물조각과 감동을 기대한 것이라면 실망감만 안고 걸음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대가 그의 정치테크닉이라든지 이면에 숨겨진 나름의 논리와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자서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것은 그의 성품에 매우 합당한 글임을 인정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많은 글의 모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한 장이 주는 여운을 당해내지 못한다.  노란색의 물결 속에서, 시골로 되돌아간 촌부의 모습에서 깊은 바다를 안은 잔잔한 파도가 일렁인다. 그의 소박한 변명은 대통령과 바보 노무현 사이의 고뇌의 바다가 얼마의 짙푸른 깊이로 흐르고 있는가를 회귀하여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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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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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여느 높은산들을 무참하게 깍되, 평범한 동산이 되는 것조차 싫은 듯하다. 높은산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없음에 공을 꽤나 들이긴 하는데, 몇 페이지 넘어가지 않아 자신의 높은 산은 절대 깍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술 한잔 마시자가 꺽자로, 밥 한번 먹자가 쏠께로 변했다고 거칠다고 푸념하고서는 몇 페이지 넘어가지 않아 친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개새끼로 들리지 않고 개쉐끼로 들리는지 모르겠다.

순진무구한 처자에게 자니 대신 자지를 보내고서는 물음표를 치는 것이 익숙치 않다며 기계치 같은 폼을 잡는 것은 트위트 고수가 토해낼 말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분께서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마냥 순진한 척하시는 것도 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테다.   

얕은 사랑을 하는 젊은이를 까고, 자신에게 기어오르는 젊은이를 폄하한다. 그러면서 한켠에서는 인생의 DEL키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글밥을 단순히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조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감성과 반전의 코드가 혼재된 문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될 수도 없다. 아하, 오호로 끝나버리는 에세이를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처럼 다시 꺼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글쟁이의 권위가 겨우 이런 식의 글밥이며, 글을 대면하고 있었던 시간의 높이에 의존해서, 경륜의 나이에 의지해서 실존한다고 자아만취되어 있는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최근에 저자의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어느 방문객이 이외수씨라고 화두를 꺼냈다고 저자는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방문객이 무례하다고 나무라는 글을 본 일이 있다. 누구씨라는 표현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방문객이 댓글을 달았다. 왜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시오? 당신보다 어린지 아닌지 당신은 보지도 않고 왜 함부로 말하시오? 쯤이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자본주의의 중심을 향해 달리는 홍콩레옹같은 글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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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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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 있어 鍊金術연금술이라는 주제는 오랫동안 그들이 흥미로워 했던 것 중에 하나인 듯 하다. 움베르트 에코의 책에서와 같은 묘묘妙妙한 기술들이나,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환상적인 술법들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놀라움을 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화적 상상력을 돋구는데만 관심이 있다. 현자의 돌이나 위대한 업, 납으로 금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은 그것 자체로 이 책에서 대단함을 발휘하기 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소망과 희망의 화체化體인 끊임없는 究道구도정신에 관한 산티아고와 연금술사, 늙은 왕과의 대화 및 생각들이 묻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테디셀러의 표면적인 이유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야 하는 구도자 - 연금술사의 모습은 그것과는 반대편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의 소망, 그것의 投影투영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실에 묻혀 꿈을 조금씩 접어가는 우리들의 삶은,  산티아고의 자유로운 날개짓에 비하면 지나칠만큼 초라하다. 그러하기에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에 초월한 영혼을 가진 산티아고의 정신세계는 영원토록 인간이 갈증내기에 필요충분한 요소이다.

   미지의 부분을 두려워하여 현실에 만족해버린 우리들은 오아시스에서 사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서 바라볼 때라야 오아시스는 오아시스이다. 미지의 사막속에서만 모든 새로움이 생겨나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우리들은 인색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오아시스에는 없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메마르고 텁텁한 모래와 바람, 태양으로 이루어진 사막 어딘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사막을 바라보는 것은 또한 꿈꾸는 것이 아니다. 꿈을 바라는 자의 간절함은 아니다. 사막 위로 발을 올려놓은 자만이 꿈을 이룰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덮고 있을 쯤에는 아마 꿈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생각과 행위들을 다시 한번 차분하게 진행시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꿈을 향한 간절한 바램들의 총합總合에 몸서리칠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고, 자아를 변화시키는 우리라면 벌써 연금술사의 칭호를 받아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덧 : 커피의 효능이 무시된 하루였다. 4잔이라도 꺼풀밴드가 아니였다. 쏟아지는 잠과 몽롱해지는 현실감각은 눈을 뜬 채로 만들어준다는 꺼풀밴드로서도 감출 수 없었다. 돌잔치를 다녀와서 연금술사의 후기를 적기 시작했다. 텁텁한이라는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산티아고가 가졌던 생각들과 연금술사가 가끔 던졌던 의미심장한 몇마디도 후기에 넣고 싶었으나 몇 페이지인지 그 작은 책 속에서도 찾아내질 못한다. 찾다가 지쳐서 던져버렸다. 아마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번 일어난 일은 또 다시 일어날 것이다" 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 삶에 있어 몇가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파티마를 만나지 못한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그렇다고 젊은 산티아고마냥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범죄신호에서와 비슷한 삶의 표지標識,직관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에 사뭇 놀랐다. 비록 희미하지만 그들 모두가 느꼈던 명현明賢한 길 위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자아의 신화를 찾아나서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가 그대를 위한 하나의 표지임을 눈치 채라고 채근했다.



- 2005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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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을유세계사상고전
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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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쓰임새는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판타지 게임, 영화 등 광대한 범용성을 갖는다. 그것은 유토피아라 지시되지 않으면서도 결국 한 단어로 귀결되기도 하는데, 움베르트 에코의 책, 바우돌리노를 찾아 나섰던 길에 요한사제와 맞물려 있던 것은 유토피아였다.
주경철 교수님의 편안한 번역과 해제, 참고자료들은 그대로였으면 마냥 심심할 책, 유토피아의 숨어있는 풍성함을 찾아내 준다.
만족은 기대한 곳에서 기대한 것을 찾아냈을 때이고, 감동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기대한 것 이상을 찾아냈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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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씨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가 설명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하게 보였다."(p.155)
저자 본인도 이 책의 부조리를 알고 있듯이 유토피아를 읽으면 마치 사회복지에 이르지 못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제국주의의 냄새들이 진하게 베어나옴을 알 수 있다. 16세기 현실에서 바라보는 것이기에 당연한지도 모른다.  자국을 위해서는 간첩, 음모와 배신, 전쟁, 노예를 불사하는 유토피아는 세계와는 동떨어진 제국주의의 논리를 갖고 있고, 개인소유의 부정이나, 여행허가, 전쟁이나 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필수제공을 표현한 부분에서는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예단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관리를 뽑기 위한 대의제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민주주의 공화정 같기도 하다. 타국과의 선교善交가 있지만, 결국 자국만의 복지와 문화 선양煽揚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모두를 끌어안고 갈만한 여력이 부족한 세상에 남겨진 하나의 땅에라도 유토피아가 있기를 희망하였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발견되지 않는 나라, 유토피아는 자신보다 뛰어난 문명을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고, 보다 정의롭고, 공평하고,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개선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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