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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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 있어 鍊金術연금술이라는 주제는 오랫동안 그들이 흥미로워 했던 것 중에 하나인 듯 하다. 움베르트 에코의 책에서와 같은 묘묘妙妙한 기술들이나,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환상적인 술법들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놀라움을 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화적 상상력을 돋구는데만 관심이 있다. 현자의 돌이나 위대한 업, 납으로 금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은 그것 자체로 이 책에서 대단함을 발휘하기 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소망과 희망의 화체化體인 끊임없는 究道구도정신에 관한 산티아고와 연금술사, 늙은 왕과의 대화 및 생각들이 묻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테디셀러의 표면적인 이유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야 하는 구도자 - 연금술사의 모습은 그것과는 반대편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의 소망, 그것의 投影투영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실에 묻혀 꿈을 조금씩 접어가는 우리들의 삶은,  산티아고의 자유로운 날개짓에 비하면 지나칠만큼 초라하다. 그러하기에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에 초월한 영혼을 가진 산티아고의 정신세계는 영원토록 인간이 갈증내기에 필요충분한 요소이다.

   미지의 부분을 두려워하여 현실에 만족해버린 우리들은 오아시스에서 사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서 바라볼 때라야 오아시스는 오아시스이다. 미지의 사막속에서만 모든 새로움이 생겨나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우리들은 인색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오아시스에는 없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메마르고 텁텁한 모래와 바람, 태양으로 이루어진 사막 어딘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사막을 바라보는 것은 또한 꿈꾸는 것이 아니다. 꿈을 바라는 자의 간절함은 아니다. 사막 위로 발을 올려놓은 자만이 꿈을 이룰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덮고 있을 쯤에는 아마 꿈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생각과 행위들을 다시 한번 차분하게 진행시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꿈을 향한 간절한 바램들의 총합總合에 몸서리칠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고, 자아를 변화시키는 우리라면 벌써 연금술사의 칭호를 받아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덧 : 커피의 효능이 무시된 하루였다. 4잔이라도 꺼풀밴드가 아니였다. 쏟아지는 잠과 몽롱해지는 현실감각은 눈을 뜬 채로 만들어준다는 꺼풀밴드로서도 감출 수 없었다. 돌잔치를 다녀와서 연금술사의 후기를 적기 시작했다. 텁텁한이라는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산티아고가 가졌던 생각들과 연금술사가 가끔 던졌던 의미심장한 몇마디도 후기에 넣고 싶었으나 몇 페이지인지 그 작은 책 속에서도 찾아내질 못한다. 찾다가 지쳐서 던져버렸다. 아마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번 일어난 일은 또 다시 일어날 것이다" 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 삶에 있어 몇가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파티마를 만나지 못한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그렇다고 젊은 산티아고마냥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범죄신호에서와 비슷한 삶의 표지標識,직관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에 사뭇 놀랐다. 비록 희미하지만 그들 모두가 느꼈던 명현明賢한 길 위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자아의 신화를 찾아나서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가 그대를 위한 하나의 표지임을 눈치 채라고 채근했다.



- 2005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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