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초지로 - 고양이와 집사의 행복한 이별
고이즈미 사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콤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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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녕, 초지로 / 고이즈미 사요 글, 권남희 옮김, 콤마 펴냄

 

 

  고양이와 집사의 행복한 이별, 어떤 이별이든 슬프지만 그 이별하는 순간까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충분했기에 행복한 이별. [안녕, 초지로]는 고양이 초지로와 보낸 142개월의 기뻤던 순간을 기리며 고이즈미 사요가 쓴 글이다. 어느 만남이든 한 눈에 딱 서로에게 이끌리는 만남이 있다. [안녕, 초지로]의 화자인 글쓴이가 그랬고, 그날 한 어미의 한 배에서 한 날에 태어난 초지로와 라쿠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가족이 되어 함께 한 시간들. 더 긴 시간, 더 오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았겠지만 함께했던 시간만큼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 충분했기에 아름다운 이별로,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


  애묘가 가 아닌 나는 고양이의 특성을 잘 모른다. 그럼에도 소소하게 고양이들로부터 얻은 위안과 삶의 평온함이 느껴진다.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고양이를 키우면서-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표현하는데 키운다, 돌본다고 해야 할까. 도움을 준다고 해야 할까- 웃음이 끊이지 않은 그들의 삶과 초지로의 죽음을 맞이하며 보여준 사랑을 저자는 슬픔을 간직했지만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정'이라는 것이 온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기에 쉽게 불타오르고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켜켜이 쌓아온 '정'이 애틋함이 되고 고마움이 되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은 마음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손끝, 눈빛에서 느껴진다. 그 대상이 생명을 가진 동물이든 식물이든 온전히 마음을 주고 최선을 다해 돌봤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종양이 생겨 언제 떠날지 모르는 초지로를 보며 느꼈을 슬픔은 비단 사람에게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말 못하는 대상이라도 서로의 교감이 통했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한 것임을 저자는-이젠 떠난 보냈으나 그 이별의 순간이 더디게 다가오길 바랐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면 주저앉게 될까 봐 애당초 초지로의 아픔이 없기를 바랐을 것이고, 초지로가 처한 상황을 인지하니 후회가 남지 않도록 돌보고 싶었을 것이고, 이별 후에도 초지로를 기억하고자 쓴 글이 저자에게도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고양이보다 몸집이 큰 초지로가 점점 작아지고 야위어가며 끝내 혼자의 힘으로 버티지 못한 시간까지 늘 곁에서 따듯한 눈으로 바라봐 준 저자의 가족이 있었기에 초지로의 마음도 편안했을 것이다.

  고로롱 고로롱 거리는 초지로의 낮은 소리, 앞발 가지런히 모으고 바라보는 초지로의 모습, 라쿠와 때때로 다투면서도 늘 함께였던 초지로,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저자의 품에서 잠든 초지로. 어느 순간이든 귀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집사에게나 초지로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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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세트 - 전2권
이광수 지음, 방남수 엮음 / 시간여행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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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 이광수 지음 / 방남수 엮음, 시간여행 펴냄

 


  춘원 이광수, 난 이 저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한국 최초 장편 근대소설인  [무정]을 썼고, 친일작가라는 정도. 솔직히 무정도 안 읽었다. 친일이라니. 그런데 이번에 [원효대사] 서평을 신청하면서 고민했다.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독립운동을 했던 문인이지만 변절함으로써 친일작가로 돌아선 그를, 독립문을 힘차게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닌 일본을 위해 붓을 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독립을 위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많은 독립투사들과 많은 이들의 울분을 배신하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러나 이번에 서평을 신청하면서 이광수의 번뇌-친일에 대한 번뇌-가 원효대사의 번뇌로 작품에 드러나지 않을까, 본인이 한 선택에 후회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 작품을 오롯이 그 작품으로만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작가의 사상이 들어 있을 터이니 외면해야 하는가. 책 한 권 읽기 위한 번뇌의 연속이다.

 

  듣그럽다. 번뇌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그 점을 주목해서 작품을 읽었다. 파계승이라는 오명 아래 '대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거사'라 불리길 자청했던 원효. 신라 불교에 있어 그의 업적은 실로 놀랍다. 깨우침이란 무엇인지 끝없이 고뇌했던 그이기에 이광수의 글 솜씨가 아니라, 단지 '원효'를 바라보기로 했다. 그 옛날 요석공주와 아사가의 원효를 향한 일편단심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을 읽는 동안은 나도 원효대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요석공주와의 짧은 삼 일간의 인연이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며 번뇌케 하니 파계승이 된 자신을 스스로를 복성거사라 칭하며 탁발을 하고 떠돌아다니며 이치를 깨닫고자 고행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전염병이 돈 마을을 구휼하고, 어느 절에서 불목하니로 겨울을 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거지들과 지내며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주고 도적 소굴에 들어가 보살의 마음을 살피게 한 그는 본래 화랑이었다. 신라의 화랑은 아름다운 청년-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바른 가짐, 지식 등 모든 면에서 아름답다 여겨지는 이들이 화랑이 되었다. 그만큼 원효는 무예도 뛰어났다. 그런 그가 화랑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하여 설파한 것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일찍이 화엄경을 주석하고 왕실에서조차 원효대사의 덕력을 높이 칭송하였으나 진덕여왕의 죽음과 요석공주의 구애로 인해 번뇌에 쌓인다. 그 인연의 끈을 공고히 매듭짓지 못해 파계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끝없이 번뇌하는 원효대사는 스스로 머물던 곳을 떠나 끝없이 정처 없이 떠난다. 아는 것과 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편히 두고자 아니하고 스스로 자처하는 고행이 결코 고되지 아니한 것은 모든 것은 마음에 그리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무엇에나 거칠 것 없이 바르다 생각이 들면 '行(행)'하였고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는 이가 있으면 기꺼이 경배했으며, 부처의 마음으로 중생을 돌봤으니 '원효대사' 그의 이름이 후대까지 칭송을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기하는 자들이 있고, 헐뜯는 중생들이 있기 마련. 그러하면 어떠하리, 저러하면 어떠하리. 스스로를 낮추고 오욕을 떼어버리고자 끊임없이 번뇌한 그를 어찌 귀인이라 부르지 않을까.


  세상을 향한 번뇌를 벗었을까. 그저 한 인간으로, 지아비로, 아비로 살고 싶지 않았을까. 모든 것은 마음에서 연유한다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깨달음 또한 때때로 세상사에 편승하여 마음을 어지러이 하니 끊임없이 원효대사는 갈구한다. 마음에 연유한 극락을... 인연이란 길고 긴 끈을 단단히 매듭짓고 중생을 위한 길, 나라를 향한 충정을 위해 불경을 읊은 원효대사를 칭송함은 과하지 않다. 그저 입으로만 떠드는 자들과 자신의 몸을 마다하지 않고 낮은 곳에서 어울린 그와 어찌 비교할까.


    소설 [원효대사]는 문체가 예스럽다. 2차 대전, 일제 치하에서 매일신보에 쓴 것이고 이광수의 문체가 그대로 묻어나는 것을 새로 엮었을 뿐이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문장들이 있다. 옛 신라의 언어들을 빌어 원효대사가 수련하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참 낯설다. "강아라 강아라 강강 상아라."(본문 발췌)


  이 세상을 인토(忍土)라고 한다. 참을 만한 곳이란 뜻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났던 보람을 찾아야 한다."(2권 p72 본문 발췌), "힘들고 아프지 않고 되는 일이 어디 있소."(2권 p83 본문 발췌) 번뇌는 끊임없다. 잠시 생각을 멈추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에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을 수 있도록 시련을 견뎌내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다. 어마당아다.(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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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목욕탕
나카노 료타 지음, 소은선 옮김 / 엔케이컨텐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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湯, 행복 목욕탕.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하얗게 쌓인 눈 속에 온천 여관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가보지 않았으나 언젠가 접했던 이미지는(예전 박신혜 주연의 천국의 나무라는 드라마에서 봤을 것이다.) 설원의 온천이다. 이 책도 목욕탕이 배경이니 그러려니 하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툇마루에 앉아 있는 듯한, 그 햇살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보이는 풍경이다. 아련함이 있는, 그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 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눈을 감고 오롯이 느껴보고 싶은 풍경이다.  


서평-------


 

행복 목욕탕 / 나카노 료타 지음 / 소은선 옮김, 엔케이컨텐츠 펴냄


  목욕탕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좋아한다. 그 따뜻함이 좋고 목욕탕 굴뚝으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삶이다. 그 모든 것이 행복 목욕탕이 주는 '다행'이라 여기던 '幸'이 잠시 멈칫 한 것은 아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빠의 부재가 1년이나 되었지만 엄마(후타바)와 딸(아즈미)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목욕탕의 굴뚝에는 더 이상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엄마 냄새에 안심을 하고, 딸의 홀로서기를 응원하며 든든하게 곁을 내 주는 엄마이고 그렇게 둘의 유대는 아빠의 부재를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엄마는 자신의 시한부 삶을 진단받는다. 다시 아빠를 찾고 새로운 가족과의 유대를-한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저녁을 챙기는- 쌓아가며 주변을 챙기는 후타바와 가족, 가족은 아니지만 마음을 연 이들이 함께 펼치는 행복한 이야기다.

 

  [幸湯]의 색은 어떤 빛일까, 슬픔과 행복이 공존하는 것일까. 속지의 색이 오렌지이니 내 나름대로 행복 목욕탕의 색을 정해 버렸다. 태양을 품은 색이다. 타오르는 붉은 태양을 넘어서 어슴푸레한 낙일(落日)을 품은 색이다. 파란 하늘에 석양이 물들 듯이. 다시 태양은 떠오를 것이라 희망을 품는. 프롤로그는 사라진 아빠로 인해 멈춰버린 목욕탕에서 시작한다. 입을 굳게 다문 굴뚝은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피어오른다. 함께 한 이들의 고마움과 함께. 행복 목욕탕이 위치한 마을에 색을 입혀 보았다. 파란 하늘, 오래되어 빛바랜 목욕탕, 무채색의 도시. 어느새 그들이 다시 모여 색색을 갖추는 [행복 목욕탕]이 그려진다.

 

  비록 '죽음'이라는 전제가 묵직하게 깔려 있어 나를 못내 슬프게 했지만 '나는 지금 딸에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을 전력을 다해 해두고 싶다'(본문 발췌)라는 엄마의 독백처럼 엄마의 자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딸 아즈미에게 피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남편의 딸일지도 모르는 열 살의 아유코를 감싸 안으며, 말없이 사라진 남편 가즈히로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온 마음으로 사랑한 딸 아즈미의 친모인 기미에를 향한 배려, 누구에게나 특유의 에너지로 다가서며 주변을 밝게 해주는 후타바의 밝음과 타인을 향한 시선을 배우고 싶다. 그녀의 자리가 비록 힘들었을지라도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그녀의 강인함을 동경하게 된다. 그런 그녀의 죽음이 나는 슬프다. 행복 목욕탕에 더 이상 없을 그녀의 자리가 못 견디겠다. 나의 마음을 알듯 그의 가족은 그녀가 늘 곁에 머물도록 죽음이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하는 방법을, 그들의 방식으로 준비한다. 가족이었으되, 어찌 보면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그녀의 가족들은 여타 다른 가족들보다 더 하나인 듯, 여전히 그녀는 그들을 걱정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모두, 고마워."(본문 발췌) 


  '엄마가 좋아했던 굴뚝은 듬직하게 "물씬물씬"하고 빨간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본문 발췌) 그녀가 좋아하는 빨간 연기가 피어오른다. 행복 목욕탕의 굴뚝은 언제까지나 피어 오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연기와 함께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제 새로이 자리를 채운 그녀의 가족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좋은 날, 기쁜 날, 그녀가 그리운 날 샤부샤부를 먹으며 외칠 것이다. "샤~부, 샤~부."


  역시 진한 커피보다는 티슈 한 통을 준비했어야 했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이 어디서 연유된 것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울면서, 가슴 먹먹하면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행복 목욕탕]은 주어진 삶에 잠시 어긋남이 있어도 다시 그 자리에서 묵묵히 삶을 빛내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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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는 책
장바이란 지음, 김정자 옮김 / 정민미디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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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로부터 잠시 벗어나 내면의 평화를 일깨워주는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는 책]을 보았다. 마음의 커튼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일까. 책 표지 커튼의 반짝이는 효과는 마음이 위안을 받아 반짝였으면 하는 바람은 아닐까. 각 챕터마다 마음을 위로해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바라는 대로만 된다면 세상이 어찌 어지러울까. 내 마음은 오늘 평온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관계에 대해, 세상의 이치에 관해, 무엇보다 내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편안함.

 

 

서평-------------------------------------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는 책 / 장바이란 지음/김정자 옮김, 정민미디어 펴냄

 


  세상의 온갖 소란스러운 소리로부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는 책].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조용히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다한 문장이 마음을 위로해준다. 바삐 살아가는 세상에서 남들보다 조금 천천히 가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인생을 마주하기에 이 세상은 여유가 없는 편이다. 그럴 때 곁에 두고 하루에 한 챕터씩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책이다. 좋아하는 커피를 내리고, 차를 우려내는 시간에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문장이다.


  잠시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글귀는 청명한 하늘을 닮았다. 따스한 햇살 아래 자유롭게 노닐어도 좋고, 비 오고 갠 뒤 맑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아도 좋을 투명한 하늘빛이다. 하늘색이라 하던가. 쨍한 파란색이 아니라 하늘만이 가지는 고유의 색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머리말에서도 강조하는 말이 있다. '마음이 편안해야' 모든 일에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편안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러 선례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여유를 주는 여행이다.


  위기는 찾아올 수 있다. 승승장구하며 인생을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어디 인생이 뜻대로만 되던가. 그럴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쉼표를 얻을 수 있다. 알면서도 위기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면 조급해지는 마음을,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뒤돌아 보며 결정을 할 수 있는 쉼표를 준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 실패의 순간에도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 이상과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굳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다독이고 있다.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현실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이 책의 글귀는 힘을 준다. 한 번에 다 읽어내려갈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손 가는 대로 읽어도 좋을 동반자이다.


  책에서 권유하는 대로만 살면 번잡함 없이 마음을 다스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온갖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지만 사실 인간의 마음은 그리 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세상을 향한 외침, 나 자신을 향한 연민이 마음 한구석에 내내 남아 먹먹함을 유발한다. 그러나 괴로워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군자의 현명한 가르침이나 선인들이 살아온 세상의 이치를 되새기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세상에 알려진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를 필요는 없다. 내 주변에는 소소한 일상에서도 현명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터이니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탈피하면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을 채워가는 '여유'이다.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어지러이 돌아가는 삶 속에서 책을 볼 수 있는 작은 '여유',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여유', 은은한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여유'. 그 여유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바로 저자가 말하는 '마음이 편안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라도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바람에 흩날리는 한 방울의 비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누려보기를 바란다. 그것을 행복이라 일컫을 수 있다면 인생의 여유를 향해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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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산다는 것 - 조선의 리더십에서 국가경영의 답을 찾다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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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으로 산다는 것 / 신병주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국가 경영이라는 막중함을 조선왕조 각 왕들의 업적과 치세를 통해 리더십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하는 책이 있다. [왕생, 왕으로 산다는 것]. 책의 제목만큼이나 '왕'의 자리가 가지는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얼마큼 큰 것인지, '王生'이라는 두 글자가 품은 무거움이 느껴진다. 그렇다. 그 자리는 생명을 다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한 나라의 리더가 된다는 것, 민생을 위한 정책이 무엇인지, 또한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지 조선 왕들의 모습을 통해 살펴본다. 그동안 역사저널을 너무나 흥미롭게 본 터라 신병주 교수의 저서가 발간되었다는 소식에 냉큼 받아 읽었다. 요즘 우리나라의 리더십의 부재가 많은 국가적 손해를 끼치고 있는 만큼 과연 무엇이 리더의 참 모습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된 조선 왕조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왕족의 마지막 후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를 개혁하고자 한 태조 이성계의 뜻은 누구에게는 시작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끝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정책을 끝내기보다 정책의 변화를 꾀하고자 했던 정몽주를 정적으로 삼고 제거한 이방원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성계는 함흥에서 돌아오지 않고 설득하려고 오는 차사마다 돌아가지 않는다. '함흥차사'는 오랫동안 소식 없음을 이야기하는 단어가 되었다. 어떤 유래가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실록이 아닌 야사를 정리한 <연려실기술>에서만 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왕위를 둘러싼 부자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던가. 그 이후로도 '왕'이란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자식을 멀리하고 죽이며 정적으로 삼는 왕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왕위는 정통성에 얽매이며 가족이라는, 핏줄이라는 연민을  가질 수 없는 자리였다. 비운의 왕으로 남아 있는 단종과 광해군, 넓은 식견과 애민사상을 지녔으나 왕이 되지 못한 채 세자로서의 삶 또한 위태롭게 끝내야 했던 소현세자와 효명세자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청계천이 태종이 수도 한양의 홍수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만든 개천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태종은 비록 왕에 대한 욕망은 가득했으나 백성의 삶 또한 돌아볼 줄 알았던 왕이었다. 장자가 아닌 셋째 아들인 충녕을 왕으로 삼은 것만 봐도 적통성을 따지기보다도 누가 더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왕이 된 세종의 업적은 실로 놀랍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를 비롯하여 과학을 발전시켰고 인재를 등용할 줄 알았다. 왕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이 있었으나 가족사의 비극은 오히려 세종 때 심화되었다고 본다. 똑똑한 세자였으나 허약한 왕이었던 문종을 거쳐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성공하여 어린 조카인 단종을 패하고 왕이 된 세조의 이야기는 각종 사극을 통해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세조가 양날의 검인 공신들과의 유대관계를 위해 역대 왕들이 벌인 술자리보다 월등하게 많은 연회를 가졌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성종과 한명회의 관계를 통해 왕위에 군림함으로써 온갖 특혜와 권력을 탐한 한명회가 어떻게 나락으로 빠지게 되었는지, 연산군의 폐비 윤 씨 복수 사건인 갑자사화와 독재정치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등을 서술하고 있다. 불통의 시대, 단절된 리더십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고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와 측근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이익을 채우고자 하는 욕심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볼 수 있다. 과연 이 나라의 리더로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쓴소리도 내뱉을 수 있는 참모진이 필요함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방계 출신으로 왕이 된 선조의 임진왜란 시 백성과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사건은 리더십의 부재로 대표된다. 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왕을 향한 민심은 들끓었다. 흡사 6.25 전쟁 당시 국민들을 안심시켜 놓고 본인은 도망간 이승만 정권과도 유사하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자신만의 안위를 위할 것이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선조는 끝내 자신을 대신해 민란을 수습한 광해군을 견제했다. 자신 외의 리더십은 결코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깨우치지 못한 군주가 바로 선조이다. 광해군이 제대로 인정을 받았다면 그의 정책이 제대로 실행되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는 '만약'은 없다고 한다. 그때가 현실이었고 지금이 현실이다.


  군주로서 탁월한 정치를 펼친 왕도 있고, 뜻은 있으나 당파에 휘말려 올바른 길을 택하지 못한 왕도 있다. 고루 인재를 등용한 시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첨하는 자들만 곁에 두어 왕권 몰락과 백성들의 삶을 저버린 왕도 있다. 시대별로 각 왕의 치세를 살펴보면 지금의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리더란 무엇인가. 과연 리더로서 지녀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과거와 현실의 괴리는 크지 않을 것이다. 왕은 늘 경계했을 것이다. 언제든 자신을 대신할 리더십이 있다는 사실에 수련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며 자리에 연연하기 보다 이상을 향해 도약하는 리더는 '성군'이라는 칭호로 후대에도 길이 칭송을 받고 있다. 한발 앞서 행동하지 못한 탓에 이 나라는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서도 외압에 시달리고 전쟁과 약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리더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조선왕조는 사라져 갔다. 힘없는 나라가 된 것은 국민의 탓이 아니다. 외압을 견디고 압박을 헤쳐온 백성, 국민은 여전히 이 나라의 힘이다.


  국민을 대변하는 리더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지하지 못한다면 실로 통탄할 일이다. 리더는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더욱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리더들은 어떠했는지 돌이켜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과거를 거울삼아 이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자. 잘못을 받아들이고 개혁으로 어려움을 타계할 수 있는 리더를 국민은 바란다. 이제 소통하는 대한민국을 위해, 국민의 힘을 위해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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