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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실의 추억
이해경 지음 / 유아이북스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황실의 추억] / 이해경 지음 / 유아이북스 펴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딸 이해경의 기억을 통해 대한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인생을 돌아본다. 급변하는 정세에 휘말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와 영친왕의 이야기는 많이 접했으나 그 이외의 일원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일부분이겠으나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기에 작은 부분도 채울 수 있었다. 왕녀 이해경의 입장에서 바라본 대한 제국이었기에 주로 의친왕과 그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한제국 말기 이름뿐인 황실이었겠으나 그럼에도 황실의 위엄을 지키고자 무단이도 의연함을 유지하고자 했던 의친왕비의 꼿꼿함이 돋보인다. 자신의 친자는 없으나 후궁과 측실의 12남 9녀의 자식들과 그 집안을 굳건하게 지켜낸 의친왕비의 고뇌가 엿보인다. 한 여자로서 쉽지 않은 삶이었을진대 정실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을 눈 감고 받아들여야 했던 여인의 삶이 안타깝다. 이해경의 친모가 재가하여 홀로된 저자를 직접 훈육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그 누구보다도 많이 거론되는 것이 의친왕비이다.
황실의 이름하에 지켜야 할 법도가 많아 당시의 또래보다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행동의 제약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황실의 일원이었기에 다른 이들보다는 분명히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고종황제의 적통자인 덕혜옹주의 삶에 비하면 이혜경 왕녀는 그보단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 그 또한 축복일 것이다. 호적에 오르는 것조차 일본의 간섭이 있었다. 실제로 의친왕의 자손들 중 이름만 가진 이들이 있고, 의친왕의 자식이나 다른 황실의 일원의 양자, 양녀로 등록되기도 했다. 이해경 또한 다른 호적에 올랐기에 자신을 낳아준 친모, 길러준 의친왕비, 호적의 어머니까지 총 3명의 어머니와 삶을 공유했다. 그중 자신이 오롯이 어머니라 부르는 이는 바로 의친왕비이다. 그만큼 일생에 있어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관심을 두었으며 영향을 준 어머니가 의친왕비이다. 그렇기에 나는 의친왕비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어찌 쉬운 삶이었을까.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저물어 가는 황실 의친왕의 정비로서 법도를 지켜야 했으며, 의친왕에서 군으로 강등되고 결국은 모든 직위를 빼앗기는 그 세월을 살피는 것이 어찌 쉬웠을까. 같은 여성으로서 의친왕비를 대하게 된다면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힘들었을 삶을 묵묵히 견뎌낸 그녀를 위로하고 싶다.
1부는 일제강점기의 궁 안팎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고, 2부는 6.25 전쟁으로 얼룩진 인생을 풀어내고 있다. 3부는 기회를 부여잡고 미국에서 공부하여 정착하고 귀국하여 부친인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묘소를 합장하는데 노력했던 일, 4부는 독립을 염원한 의친왕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5부는 정비로서 법도에 자신을 묶어두어야 했던 의친왕비의 마지막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른 이가 받드는 것에 익숙한 황실 일원들이 감시와 억압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피란 통에 힘겹게 살았던 그네들, 그 시절을 떠올린다면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을 이가 있을까. 나라를 위해 묵묵히 삶을 이끈 사람들은 배척 당하고, 자신의 이익을 바란 이기적인 사람들은 아직도 부를 누리며 살아가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는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뿐이다. 독립 유공자의 후손이 아니고, 일본을 손을 비비던 매국노의 자손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아픔을 모르는 제 3자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삶을 유린당한 이들의 아픔을 공감한다.
본문에 언급되는 안국동의 풍문여고(옛 안동 별궁 터)는 현재 강남으로 이전되었으며 공예 박물관으로 자리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그렇기에 안국동의 풍문여고는 이전된 곳과의 차별을 두기 위해 해당 부분에 간략한 주석을 달아 놓아도 좋을 것 같다. 얼마 전 풍문여고 근처를 방문했다. 굳게 닫힌 교문 사이로 보이는 교정, 이전을 했다는 팻말을 보았다. 학창시절의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안국동이기에 잠시 그 자리에서 회상에 젖었다.
세월은 변한다. 삶의 모습은 흐르고 추억은 쌓인다. 아흔의 나이에 황실의 기억을 조심스레 펼쳐 보인 책 한 권을 통해 나는 묵묵히 한 발짝씩 걸어나간 이들에게서 마음의 울림을 전해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