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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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 없다. 출판된 당시와 내가 읽은 지금과의 시차 때문인가? 출판 당시 전 세계의 학자들이 주목했다는 서평들이 허풍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책 뒤에 서평을 쓴 후쿠야마의 경우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읽기 전부터 김이 빠졌다. 책을 읽다 후쿠야마의 책이 인용된 것들을 발견하면서 헌팅턴 역시 후쿠야마의 밑도 끝도 없는 싸구려 논리를 되풀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무엇보다 책의 내용은 냉전이 끝나고 세계의 대립과 갈등은 이념이 아닌 문명 간의 갈등이라 주장한다. 그 문명은 크게 서구, 이슬람, 중화,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일본 등을 들었다. 그리고 각 문명들은 그간 세계의 영향력에서 서구의 입김은 약해지고 비서구 문명의 입지는 높아진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서구와 비서구 간 갈등이 있을 거라는 예측이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과연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문화와 문명 간의 차이를 부정하는 듯 보이는 것 같고 심지어 때로는 둘 다 동의어로 보는 듯 싶기도 한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 중화와는 별도의 독립된 문명이라는데 사실 그것이 근거가 의심스럽다. 후쿠야마가 트러스트란 책에서 밑도 끝도 없이 세계에는 고신뢰 국가와 저신뢰 국가가 존재하고 앞으론 고신뢰 국가만 살아남고 세계를 주도할 것이란 전망을 했었는데 고신뢰 국가를 미국, 일본, 독일 저신뢰 국가를 프랑스, 한국, 중국으로 예를 들었다. 물론 그 논리에는 어떠한 근거나 증거도 없이.. 마찬가지로 <문명의 충돌> 역시 문명에 일본을 든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반면 한국은 중화 문화권에 주변국으로 전락시킨다. 중화 문화권이라는 것에 한자와 유교, 대승불교 등의 공통점은 있으나 언어가 다르고 체제가 다르며 역사가 다른데 일본 역시 마찬가지임에도 일본은 독자적 문명국으로 한국은 중화 문명국의 소국으로 설명한 대목은 의아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문명 간 충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문명 간 충돌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같은 문명 내 충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타 문명 간 충돌만 예를 들고 그것을 보편적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타 문명 간의 관계에는 충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도 있으며 배척도 있고 또는 교류라는 중요한 관계도 있다. 타 문명 간 충돌을 설명하지만 동남아의 예를 들면 다양한 문명권. 헌팅텅이 제시한 이슬람, 서구(필리핀 등), 중화(베트남), 불교, 힌두교 등의 여러 문명권이 있으나 자국 내 정치적 불안에 의한 반군 간 갈등은 있지만 문명 간의 갈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관찰되지 않는다. 반면 같은 서구 문명권이라고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내 각국의 전쟁과 갈등, 미국과 멕시코, 혹은 쿠바 등등과의 갈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헌팅턴이 문명 간 충돌한다는 것이 잘못되었거나 문명에 대한 정의가 잘못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충돌>은 중요한 저서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각국의 충돌에 대한 설명으로 이념이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 잡다가 냉전이 끝난 후 증가되는 각국 간의 분쟁과 긴장고조가 설명되어지지 않았던 것을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리로 제법 명쾌하게 설명하는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그 시도 및 의도가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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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우리 나무
박상진 지음 / 눌와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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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부턴가 난 항상 무언가 고민거리가 생기면 경복궁에 가곤 했다. 우리나라의 정궁이었으나 그것의 슬픈 역사로 무언가 횡한 느낌을 주는 궁궐. 물론 아름답기로는 창덕궁이 제일이지만 경복궁이 주는 아름다움은 우직함과 함께 고독함에서 주는 그런 감흥이 유독 애착이 가게 만든다.

어쨌든 창덕궁이든 경복궁이든 창경궁이든 조선의 궁궐은 우리에게 많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그 건축양식뿐 아니라 주변 자연경관과의 조화는 서울 시민의 안식처일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마음을 의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궁궐은 또 한편으로 도심지에 있는 생태섬이라고 한다. 도시화되면서 많은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는 판에 궁궐은 도심지에 갈 곳을 잃은 동식물의 오아시스다. 특히 조선 궁궐은 우리나라 나무의 자연 식물원이라고 할 만큼 과거 흔한 나무였으나 지금은 멸종의 위기에 빠진 나무들이 잘 서식하고 있는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책은 각 궁궐마다 장을 나눈다. 그리고 각 단원마다 하나의 나무씩 에세이를 적고 있는데 위치하는 곳을 궁궐 지도와 함께 첨부해 놓아서 후에 궁궐을 찾아갔을 때 해당 나무를 쉽게 찾아갈 수 있게끔 배려하고 있다. 책은 도감같이 딱딱하지 않다. 물론 나무의 종이라던가 특성 등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것은 하나의 첨부 설명에 불과할 뿐 나무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있다. 해당 나무의 쓰임새, 해당 나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또는 문학에 등장하는 나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나무에 대한 지식들을 쉽게 써 붙여 나무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재미를 느끼게 한다.

책을 다 읽고 내가 궁궐에 가서 얻었던 것은 궁궐 자체뿐만이 아닌 우리 나무들이 주는 내 마음속 깊이 각인된 기억들이 나에게 심리적 안정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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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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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 즉, 근대 사회로의 진입이 이루어지던 때. 그러나 그 근대 사회로의 진입이 너무 늦었다. 우리나라가 봉건성을 탈피하고 역사적 발전에 합류하기엔 이미 세계의 열강은 너무 발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단지 이씨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고통을 온 민족이 함께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비극성이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정책 실패의 혹독한 고통은 정책 참여와 무관했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던 사람에게 가중된다는 사실이다.

<검은 꽃>은 바로 그 구한말에 멕시코로 간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다. 이 땅에서 소외받던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아웃사이더라 할 것이다. 그들은 주류에서 항상 벗어나 있음에도 주류의 가는 기침에도 벌벌 떨어야 했던 존재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땅이 아닌 멕시코에 또 다른 희망을 품고 떠난다. 일부는 이곳에서는 찾을 수 없던 희망을 찾기 위해서.. 일부는 이곳에서의 일들을 잊기 위해서..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한갖 사기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희망을 찾고자 했으나 그들을 억압할 또 다른 기득권은 어리석고 게으른 이주 노동자로밖에 안 보았다. 그들은 고통받았고 처참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인동덩굴과 같이 험난한 그곳의 환경에 적응해 간다.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던 조선은 망하고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던 나라를 그들은 다시 세우고자 했다. 아이러니..

슬픈 역사.. 작가는 그 슬픈 역사를 쓰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그는 그 슬픈 역사 속에서 우리의 근대성에 대한 통찰을 하고자 한다. 멕시코 이주 노동자들의 사회에서 우리의 사회를 보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잘 쓰여졌다. 절대 흥분하지 않고 빠른 속도감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작가가 창조한 이야기에 오히려 작가가 묻혀 소설이 엉망이 되는 것은 스케일이 큰 소설에서 자주 보는 흠이다. 그러나 어설픈 민족주의적 입장을 주장하지 않고 절제된 목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다는 점이 좋았다.

단, 많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반면 너무 이야기가 짧아 요약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거기에 여러 이야기가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바오로와 만수무당과의 관계에서 종교와 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 이정과 연수의 미묘한 사랑 이야기. 이정과 요시다의 동성연애 등과 같은 여러 이야기를 한꺼번에 드러냄에 반하여 지면이 너무 적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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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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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30일부터 2005년 1월1일까지 읽었으니 분명 2년에 걸쳐 읽은 책..

생물학이라곤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것 외에는 전혀 문외한인 나에게 있어 한편으로 흥미로웠던 책이었다. 특히 진화론의 대표주자라는 저자 리처드 도킨스를 통해 알게 된 진화론의 실제 이론과 또한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 이기주의 이론에 대해 흥미롭게 쓴 점이 마음에 든다.

사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어떤 평을 받고 있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쪽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모든 생명체가 심지어 우리 인간까지 객체로서 존귀함이 있다기보다 유전자를 전달하는 단순한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큰 충격이었다. 예를 들어, 동물들의 모성조차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다. 가령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이라면 자식은 나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개체이고 따라서 그를 살려야 유전자가 전달되는 것이다. 만약 자식이 없다면 자신의 유전자는 그 대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때 모든 행동양식은 유전자의 복제와 생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가령 약한 새끼가 있다면 그를 죽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새끼를 키우기 위한 투자보다 그 새끼를 죽이고 다른 튼튼한 새끼를 낳는 것이 유전자를 전달하는 데 더욱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물들의 이타적 행동들조차 실상은 각자 유전자들이 생존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차분히 증명해 나간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수학이나 경제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게임이론과 게임이론의 한 부분인 죄수의 딜레마란 논의로 이기적 유전자의 효과적인 전략선택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죄수의 딜레마를 경제학적 혹은 경영전략의 이론이 아닌 생물학의 이론에 사용한다는 사실이 놀라웠을 뿐 아니라 어찌 보면 명쾌하다 할 정도로 딱딱 들어맞는 설명이 흥미를 끌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계속된 사례의 설명이 지루한 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방면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으로는 다 중요한 이야기이겠지만 나처럼 교양 수준의 입장에서 읽는 사람에게는 대표적 사례 한두가지면 충분했다는 판단이 든다. 물론 이것 역시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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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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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이 책을 SF 소설이나 환타지 소설로 분류하는 것으로 안다. 내가 이런 장르에 관심이 있는 것도 또 지식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니기에 뭐라 할 처지는 아니겠지만 이런 장르 분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내가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이다.

왜냐하면 장르란 소설의 소재나 분위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르란 좀 더 본질적인 그 무엇의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나 <어린왕자>는 분명 쉽게 쓰여졌고 주인공과 이야기의 소재가 어린이지만 그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어른으로 향해 있다. 따라서 이런 소설을 동화라 하지는 않는다. 설사 동화로 구분한다치더라도 분명히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설명이 곁들여지기 마련이다.

<갈라파고스>는 분명 이 책의 표지에서 선전하듯 생태학의 진화론과 자연선택 이론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를 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 이 이야기의 초점은 현재 우리 인류에 대한 반성과 비평이다. 그래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런 이론을 도입했고 이야기의 전달자를 100만 년이나 이 지구를 떠돈 유령으로 설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을 SF 소설이나 환타지 소설이 아니라 문명 비판 소설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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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mm 2006-07-20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F로 분류되면 문명비판소설이 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자고로 SF의 여명기부터 헉슬리, 쟈마찐, 베르느, 웰즈 등이 보여주었듯이 과학소설은 문명비판소설과 한몸이었습니다. 설사 30년대 이후 번창한 미국의 펄프SF소설조차 거죽으로는 문명비판을 포장하고 있었죠. SF의 본질과 추구하는 바를 이해하신다면 문명비판을 별도의 잣대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입니다.

RAJAH 2006-07-2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르 구분은 구분의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명비판소설이라는 장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장르라고 한 이유는 소설의 분류 기준을 소설의 주제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느냐로 구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물론 SF의 소설이 문명비판적이다란 말에는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SF의 약자부터 과학소설이듯 SF의 구분의 기준은 소재에서 찾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소설의 대다수 특징들이 문명비판적일 뿐 문명비판이라는 기준이 SF로 분류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까마귀의 생물학적 분류는 색깔이 까만 것에서 찾지 않습니다. 까마귀가 까만 것은 사실이지만 까만 것이 까마귀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저는 갈라파고스가 과학을 소재로 하는 것도 사실이고 SF에 분류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갈라파고스의 소재가 과학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인 것은 그 주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한 소재에 이야기가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는 소재가 하나의 주제로 향하는 부수적인 요소밖에 안 된다고 감상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어차피 장르의 분류는 진정 소설을 감상하는 것에 무의미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문명비판소설이냐 SF냐 라고 감상평을 작성한 것은 그냥 소설을 읽고 단순한 저의 감상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코멘트를 남기는 것은 좋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또 한 번 생각하게 한 코멘트에 감사합니다. 단, 코멘트를 남길 때에 있어 매너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심코 쓰신 것일 수도 있지만 '짓'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은 행동이나 행위 등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 아닌가요?

 단순한 감상평을 쓴 행동이나 행위에 '짓'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야말로 매너없는 '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