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4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윤진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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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 아담 폴로는 작가가 스스로 밝히듯 성경의 아담과 신화의 아폴론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의 의식과 편지, 대화를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믿고 유추해본다면 그는 아버지와 다툰 열 두어살 즈음에 집을 나가려고 했던 적이 있고, 신이 창조하신 형태를 거꾸로 거슬러 오르다보면 신에 도달한다는 믿음을 가진 친구가 있었으며, 군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이 군에서 탈영한 것인지,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여름 휴가로 비어 있는 집을 찾아내 그곳에서 살고 있다.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그 집에서 아담은 때때로 미쉘이라는 여성에게 편지를 보내고, 만나기도 한다. 둘 사이의 대화로 추측건데 아담은 미쉘을 강간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미쉘을 다시 만나려는 아담의 노력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고, 미쉘이 한 미국인과 만나고 있는 것을 아담이 발견하고 그들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자 미쉘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이로서 미쉘이라는 여성이 특정된 한 여성인지, 아니면 불특정 다수 혹은 실체 없는 여성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게다가 강간을 했다는 대목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상적인 의미의 강간 행위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때로 아담은 바닷가에서 개를 쫓아 간다. 그는 자신을 개와 동일시한다. 아담이 남긴 쪽지를 본 어머니가 아담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 글이 소설 속에서는 몇 안되는 정상적인 글이다.

집 주인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아담은 언덕 위의 집에서 나오게 되고 어떤 필연성 없이 길거리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연설을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떤 이는 예언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는 경찰에 고발되고, 신문에 실리게 된다. 신문에는 그의 기사와 더불어 긴 기사가 하나 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행동에 어떤 개연성이 있는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호했지만 신문 기사로 옮겨진 그의 행동은 '정신병자의 이상 행동으로 경찰이 출동하였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는 논리적인 말로 옮겨져 있다. 반면에 숨진 두 명에 관한 기사는 그 둘이 죽었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의문들로 가득하다.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아담은 그를 인터뷰하려는 대학생들과 대화를 한다. 그는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나, 대학생들은 이를 형이상학적인 유희, 수사학적인 장난쯤으로 치부한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소설은 독자에게 보내는 작가의 글에서 기대하는 바, 즉 추리적 요소, 를 배반하며 일정한 줄거리가 없이 전개된다. 그리고 독자는 몇 번쯤은 책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까지 읽고 이해한 것에 대해 수정을 해야만 한다. 문제는 책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도 명확한 인상은 없다는 것이다.

대학 입학하던 해, 카프카의 <성>을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었을 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후에 <변신> 등을 읽고 난 연후에야 독자의 당황이야말로, 카프카를 읽은 후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반면 <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울한 분위기와 결락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카메라 기사가 자신이 찍고 싶은 것만 일정한 기준 없이 찍어댄 필름을 편집 없이 보고 난 느낌이다.

르 클레지오의 초기 소설에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고 하는데, 그는 방콕에서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선(禪)을 체험하였고, 남미 인디언들의 삶에도 매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에는 방한하여 화순 운주사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받은 인상을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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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구) 문지 스펙트럼 9
박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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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 한 채 구보씨는 집을 나와 천변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간다. 한낮의 거리에서 격렬한 두통을 느낀 구보는 '삼바스이'라고 하는 효험이 의심스러운 약을 떠올린다. 그는 귀 기능에도 의혹이 간다. 종로 네거리에서 몸 가는대로 걷는다. 전차를 탔다가 소개로 만난 여성을 우연히 본다. 객쩍은 마음을 느끼다가 조선은행 앞에서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다방에 들어가 가배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다 어정쩡한 관계인 남자를 보고 불편한 상황에 처한다. 골동점을 경영하는 친구를 찾아갔다가 허탕을 치고 다시 걷는다. 옛 동무를 우연히 만나는데 그는 자신의 영락한 처지를 의식한 듯 서둘러 구보를 떠나버린다.

남대문을 안에서 밖으로 나가던 구보는 황금광 시대에 관해 생각해본다. 이번엔 금전적으로 출세한 친구를 만난다. 그는 애써 나를 다방으로 이끈다. 곁에 있는 예쁜 여성과 성공한 친구가 서로 황금과 육체를 소비하는 공상을 한다. 친구를 떠나 조선은행 앞에까지 간 구보는 다시금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방으로 간다. 마침내 벗을 만나고, 둘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논하는 등 담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급한 약속이 있어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난 둘은 대창옥에서 식사를 한다. 구보는 과거 연애하였던 여성에 관하여 생각한다. 벗과 여급이 있는 술집에 가서 상념에 잠기던 구보는 상복을 입은 여성이 생활에 쫓겨 여급을 모집하는 광고에 접하여 당황하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오전 2시. 구보는 생활인으로서 좋은 소설을 쓰리라 다짐한다.

 

o 딱한 사람들

순구가 잠을 깨어보니 진수는 이미 방을 나갔다. 순구는 다섯 개 있어야 할 담배가 두개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진수를 탓한다. 끼니 거르기가 일쑤인 요사이 둘은 대화도 줄어들고, 서로를 원망하는 마음마저 인다. 순구는 신문에서 구인광고를 보고 적당한 일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득 자신은 애초에 일할 의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인광고를 보는 행위를 지속함으로서 자기 방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진수 역시 배를 곯다가 집으로 돌아가 따로 떼어둔 담배 한개비 순구와 나눠 핀다.

 

o 방란장 주인

변변한 집기도 없는 다방 방장장은 개업 첫 달에는 손님이 많았지만 다음달부터 손님은 줄어들고 이년여 경영하는 동안 빚만 쌓인다. 화가인 주인장은 미사에라는 점원을 쓰고 있는데, 그녀는 월급이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일과 가게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주인이 미안한 마음에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주려 하면 도리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여 쫓겨나나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였다.

주인은 수경 선생의 처지를 부러워하며 그를 방문하였는데, 실상 수경선생은 부인의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떠나는 주인은 문득 고독을 느낀다.

 

o 성탄제

영이와 순이 형제는 사이가 좋지 못하다. 순이는 카페 여급인 영이를 불쾌해 했으며 몸까지 파는 것을 비난하였다. 한편 영이는 순이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가족들이 밥술이나 뜨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희생 덕분이며, 몸까지 파는 것을 모르는 척 하는 집안이 미웠다. 영이가 손님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카페에 나가지 않자 집안의 벌이가 끊긴다. 급기야 순이 역시 여급이 되자 영이는 순이를 한껏 비웃어 주고 싶다. 하지만 순이가 몸을 파는 날 방을 비우고 다른 방에 누운 영이의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o 최노인전 초록

최노인은 매약행상을 삼십여년 다닌 이다. 그는 본래 관비 유학생으로 동경에 유학하였으나 학업을 중도 작파하고 이런 저런 보잘것없는 일을 하다가 딸과 사이가 틀어진 후 결국 매약행상으로 낙착된 이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탄하며 얼른 죽어야 겠다고 하면서도 실은 윤치호 옹의 영구를 자신이 따라나설 것이라는 말을 자꾸 하며 내심 유치호 옹보다는 오래 살 것을 궁리하는 것 같다.

 

o 춘보

어느 날 임신한 아내가 모시조개를 넣은 냉이국을 먹고 싶다고 한다. 춘보는 모시조개를 사겠다고 벼르지만 벌이가 없어 겨우 쌀말이나 사댈 뿐이고, 몸까지 다쳐 며칠 벌이마저 끊기고 만다. 게다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궐 밑의 집들을 죄다 헐어낼 계획이라는 말까지 돌자 더욱 불안을 느낀다. 씨름씨름 앓고 있는 그에게 아는 이가 미장이 일을 따라 나서겠냐고 권하자 춘보는 몸은 고될 망정 안정적인 벌이가 낫겠다 싶어 그러기로 작정한다.

아내는 맹서방이 관을 욕했다가 잡혀간 이야기를 하며 춘보에게 술을 과하게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춘보 역시 술에 취해 관을 탓하는 말을 했다가 잡혀가고 만다. 포청으로 끌려가 간 속에 갖힌 춘보는 잠이 들었다가 자신을 흔드는 기색에 잠을 깨니 꿈이었다. 미장이 일을 나가면서 춘보는 딸아이에게 산에 가서 냉이를 많이 해오라고 일러둔다. 오늘은 기어코 모시조개를 사올 결심인 것이다.

 

최혜실의 해설이 정갈하여 여기 발췌해 둔다.

 

모더니즘은 원래 현실을 추상화한다는 개념에서 나왔으나 현대에 이르러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대체로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모더니즘 문학은 인간의 정서를 중시 여기면서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나 덧붙이면 모더니즘은 근대 산업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바, 현대 사회는 기술과 산업의 복합체로 개인은 사회를 파악하지 못하고 낯설게 느낀다. 이에 작품에 나타나는 사회는 추상적이며 등장인물들은 상실감과 소외감을 드러낸다.

이런 징후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이 도시와 군중의 관계이고,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잘 포착하고 있다. 경성은 1930년대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이는 한국인들의 생활 방식과 수준을 무시한채 진행된 것이었다. 지식인의 실업률이 심각하였고, 그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전반에는 '행복'과 '고독'이라는 두 대립축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바, 도시 생활에 열중하는 평범한 군중들의 의식이 '행복'인 반면 식민지 지식인인 자신은 '고독'으로 대비된다. 하지만 '행복'은 산업 발전이 가져다 준 제도적 운용 방법을 배움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누리고 있으나, 그 제도 속에 빠져 진실한 의미와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폐쇄성 속에 빠져버린 평균인에 불과한 행복이다.

한편 경성역은 근대화와 식민 통치의 양면적 의미를 띠고 있는 곳으로, 이곳은 물자와 문명이 들어오는 통로이자 몰락한 농민과 도시 실업자들의 집합소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이중적 위치를 잘 드러내고 있는 룸펜 인텔리겐차이다. 이런 유형의 지식인상은 <딱한 사람들>에서 순구와 진수로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방란장 주인>은 일종의 예술가 소설로 구인회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모델소설이며, 소설 전체가 쉼표만 사용 한 문장으로 처리되는 모더니즘적 실험이 드러나 있다.(방란장 주인의 모델은 소설가 이상이다) <성탄제>는 생활고로 자매가 여급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그린 소설인데, 박태원은 여급의 문제를 다룬 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한편, <최노인전 초록>은 훗날의 역사소설의 싹이 보이는 작품이고, <춘보>는 비록 단편이나마 그의 후기 역사소설의 출발점이 된다.

박태원은 일제 말기 친일 행위에 가담한 적이 있었으나 해방 이후에는 좌익 활동으로 돌아 선다. 이는 그가 친일 행위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하였다는 정황과,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하던 대다수가 좌익 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에 참가하였고 친구 이태준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데서 원인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후 그는 리얼리즘 쪽으로 창작 방법을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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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감사가 끝나고 본감사가 이번 주 월요일 시작되었다. 감사가 시작되니 요청하는 자료의 양도 많아졌고,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책을 읽을 경황을 만드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일제 강점기 소설을 읽다 보면 당시의 엘리트들이 얼마만큼 비상한 인물들이었는가 감탄하는 경우가 많다. 박태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에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일정한 주기로 리메이크 되며 현 세태를 반영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과연 박태원의 소설을 읽고 보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내가 읽었던 버전은 최인훈의 것이었고, 박태원은 오히려 나중에 읽게 되었는데 읽던 중 구보가 친구와 더불어 <율리시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과연 당시에 번역은 누가 했을 것인가, 번역이 아니라면 원전을 읽었을까 여러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율리시즈>에 도전했다가, 그 난해함에 두 손을 들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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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기억한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근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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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쓰는 올리버 부인이 문인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을 버튼콕스 부인이라고 소개하는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올리버 부인의 대녀(代女)인 실리아 래븐스크로프트 이야기를 불쑥 꺼내며 과거에 대해 묻는다.

실리아 래븐스크로프트의 부모는 십여년 전에 불행한 사건으로 사망했는데,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녀의 아버지인 엘리스테어와 어머니인 마거릿은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그 둘 사이에는 권총이 놓여져 있었다. 권총에는 두 명 모두의 지문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쏜 것인지는 판명할 수가 없었다. 지금 버튼콕스 부인은 그때의 사건을 이야기하며 누가 누구를 쏜 것인지 올리버 부인은 혹시 알고 있지 않느냐고 질문해온 것이다. 버튼콕스 부인은 실리아가 자신의 아들인 데스몬드와 결혼할 예정인 바, 과거의 일을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며 물은 것이지만 올리버 부인은 몹시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코끼리는 무척 기억력이 좋아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말을 듣게 되고, 호기심이 이에 더해지자 과거의 사건을 조사해보고 싶어진다. 올리버 부인은 포와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둘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코끼리에 관해 조사를 시작한다.

올리버 부인과 포와로는 엘리스테어와 마거릿을 아는 사람들을 조사하던 중 아래와 같은 사실들을 알아낸다.

 

  - 마거릿은 죽기 전 4개의 가발을 남기고 죽는다

  - 마거릿에게는 쌍둥이 언니인 도로시아가 있었다

  - 엘리스테어는 처음엔 도로시아와 약혼했으나 이후 동생 마거릿과 결혼한다

  - 도로시아는 정신 이상 징후를 보였고, 그녀의 소행으로 짐작되는 유아 살해(미수) 사건이 있었다

  - 도로시아는 마거릿이 죽기 얼마 전 몽유병 증세로 절벽을 걷다가 떨어져 죽는다

  - 마거릿은 죽기 전 얼마 동안 몹시 불안한 증세를 보였다

  - 마거릿은 죽기 얼마 전 기르던 개에게 물리는 일이 있었다

  - 마거릿의 가정부는 몹시 눈이 좋지 않았다

  - 데스몬드는 실리아와 어렸을 때 알던 사이였다

  - 데스몬드의 어머니 버튼콕스 부인은 친어머니가 아니다

  - 데스몬드의 친어머니는 데스몬드에게 스물 다섯이 되면 찾을 수 있는 신탁유산을 남겼다

 

포와로는 먼저 데스몬드의 어머니인 버튼콕스 부인이 과거의 일을 캐고 다니는 이유는, 데스몬드가 스물 다섯이 되면 찾을 수 있는 신탁유산이 탐이 나서였다는 것을 알아낸다. 만약 데스몬드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유언장을 고쳐 써서 유산 상속인을 아내로 변경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과거의 추문을 들추어 실리아로부터 데스몬드의 마음이 멀어지게 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도로시아의 정신병적인 증상을 알게된 엘리스테어가 마음을 동생쪽으로 돌려 마거릿과 결혼하자 도로시아는 쌍둥이 동생을 증오하였고, 이런 증오와 정신병적인 증세가 겹쳐 동생 마거릿을 절벽에서 밀어 사망케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마거릿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엘리스테어에게 언니를 경찰에 고발하지 말 것을 호소했고, 엘리스테어는 마거릿의 시체를 도로시아의 시체로 위장하고 도로시아를 마거릿처럼 꾸며 몇 주간 지내다가 도로시아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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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작품 해설에 의하면 <코끼리는 기억한다>는 몇 가지 오류를 드러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올리버부인을 1939년에 처음 만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1936년에 발표된 <테이블 위의 카드>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또, 마거릿이 35~36세에 죽었고 그 후 12~14년이 지났으니 올리버 부인의 현재 나이는 50세 정도여야 하는데, 1936년의 <테이블 위의 카드>에서의 올리버 부인은 15~19세 정도여야 하지만 중년 여인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나는 수작을 기대하지 않는다. 반면 졸작도 아직까지는 만나보지 못했다. 그저 중상이나 중중을 기대하고 읽는데, 그런 '기대 없음'이 의외로 편안한 독서를 제공해준다. <코끼리는 기억한다>는 사실 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라면 언니의 존재가 등장함과 동시에 트릭을 눈치챌 정도로 구성은 느슨하다. 특히나, 개가 마거릿을 물었다는 대목에서는 독자가 눈치 채지 않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크리스티는 올리버 부인으로 하여금 "코끼리는 기억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린 인간이에요. 자비롭게도 우리 인간은 잊어버릴 수가 있죠." 라고 말하게 한다. 나는 인간이 잊어버리는 쪽보다는 왜곡하는 쪽을 선호한다고 생각한다. 기억의 미화와 덧칠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능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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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한수산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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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바람이 찬 이월 하순, 잠시 단체를 떠났던 윤재가 돌아온다. 그는 일월곡예단 초창기 시절부터 마술을 해왔는데, 돈을 보고 약장수를 따라 나서는 다른 마술사들과 달리 자기 재주를 높이 사는 곳에서만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돌아온 노쇠한 윤재를 하명 등은 반갑게 맞아주면서도 노년에 이으러서까지 단체를 떠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공중그네를 타는 하명은 윤재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고, 하명은 어느덧 청년이 된 윤재의 모습에 놀란다.

겨울 동안 써커스는 남쪽 지방을 도는데 농사를 짓는 관객들이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일로 바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추운 동안은 좀 따뜻한 지방을 도는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원들은 공연을 하는 재주꾼과 장비를 맡는 후견으로 구분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손님이 들면 일당을 받지만 어느 수준 이하일 때는 반일당, 혹은 담뱃값밖에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줄을 타는 지혜와 하명이 좋아 지내면서 둘은 단원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만난다. 하지만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몰라 괴로워한다. 배운 재주로 써커스를 하여 돈은 번다지만 결혼을 한다 해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닐 일이 걱정이었고, 단체 내에서 가정을 이룬 선배들의 모습을 볼 때 자신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사회로 나가자니 기술도,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영 자신이 없었다.

남자쪽 집안에서 '써커스하는 여자는 창녀만도 못하다'는 반대에 어쩔 수 없이 헤어져 혼자서 석이를 키우는 석이엄마에게 일 년에 두 번 남자가 찾아온다. 그들은 석이라는 끈을 매개로 여름과 겨울 두 번을 만난다.

석이 엄마가 남자를 만나기 위해 방을 비운 사이 수상한 그림자가 지혜의 방을 침입하고 그녀의 몸을 버려 놓는다. 지혜는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으며 하명을 피하기 시작한다. 그날부터 지혜는 칼을 품고 다시 침입할 남자를 기다리는데, 어느날 밤 윤재가 여자 숙소에서 뛰어나오는 남자와 부딪힌다. 윤재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다음 날 지혜가 타던 줄이 끊어져 크게 다치고, 윤재는 줄에 장난질을 친 자는 바로 규오라고 지목한다. 규오의 손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단원들은 규오에게 몰매를 주고, 얼마 후 병원에 입원해있던 지혜가 홀연히 사라진다. 하명은 술과 여자로 한동안 세월을 죽인다.

단체를 잠시 떠났던 난쟁이 칠룡이가 돌아오고, 써커스는 잠시 활기를 되찾는듯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과 쇼에 밀려 인기는 예전과 같지 못했고 단장인 준표가 풍을 맞아 쓰러지기까지 한다. 준표의 동생 광표가 단장직을 떠맡는데, 그는 단체의 생리를 잘 몰랐고 전에 노가다판에서 사람 다루듯이 단체 사람을 다루려 했다. 욕심이 많은 그는 사사건건 총무인 명수와 대립했는데, 표를 판 돈을 속여 일당을 온전히 주지 않거나 돈이 궁한 단원에게 이자놀이를 하여 종속시키려 한다. 그만 두는 단원 대신 자기에게 충성할 단원을 모집하여 결국 단체는 둘로 갈리고 만다.

윤재가 쓰러진 준표를 찾아가 좋안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지혜를 만난다. 지혜는 술집에서 손님들 앞에서 재주를 보여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 윤재의 꾸짖음에 지혜는 '고무신이 잘 팔렸다고 고무신만 팔아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구두를 신으니 구두를 팔아야 한다'고 항변하고, 윤재는 적당한 답변을 못한 채 단체로 돌아온다. 얼마 후 쇠약해진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윤재가 사망한다. 명수는 총무직을 그만두고, 하명 등은 광표에 대항해 들고 일어났다가 새로운 단원들에 밀려 단체를 떠난다. 석이를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술로 세월하던 석이엄마가 어느 날 술에 취해 붙인 성냥불이 의상에 옮겨 붙어 써커스 천막이 모두 불에 타버린다. 하명과 연희, 칠룡은 버스정류장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한수산은 <부초>를 쓰기 위해 곡예단을 2년간 쫓아다니며 소재를 분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초>가 시작될 무렵 텔레비전의 보급이 확산되자 사람들이 볼거리를 어렵지 않게 취할 수 있게 되었고, 이와 함께 써커스의 호시절은 끝나고 있었다.

"돈이 있으면 강아지도 멍사장"이 된 시절에 배운 것은 재주밖에 없고, 뒤늦게 사회에 뛰어들 깜냥도 되지 못하는 단체 사람들은 좋았던 옛날을 되풀이해 이야기하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한다. 하지만 시대의 조류는 단체를 비껴가지 않는다. 과거를 대표하는 인물인 단장 준표는 풍을 맞고 윤재는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지혜는 단체를 나가 '더 잘팔리는 상품'으로 자신을 개조하고, 돈으로 사람을 다루는 광표는 끝내 하명 등을 몰아낸다.

 

"난 우리가 무대 위에 있고 남들은 다 구경꾼이라고 생각했었지......그건 잘못이야......사람들이란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아간다는 거야. 못난 놈도 제딴에는 자기가 가진 거 남김없이 다 털어서 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래......이 세상 바닥도 써커스 바닥이나 똑같아......어디엘 가 있는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256-25p)

 

단체를 나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뱉는 하명의 이 말은 <고리오 영감>에서 라스티냐크가 "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둘의 대결이다"하고 외치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소재에 대한 기초적으로 정확해 보이는 연구를 바탕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안에서 솟아나오는 인간적 필연성을 어김없이 현실의 큰 상황속에 뚜렷이 자리잡게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풍속의 한 제시이자,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바르게 풀어나가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성과가 뚜렷하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 이유에서 발췌한 이 글을 읽으며, 35년의 세월 저쪽에서 소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생각해본다. 소설을 쓰기 위해 그 삶을 직접 경험해보던 장인적인 과정이 근래에는 말재간으로 대치되어 가는 듯 하다. 1977년 제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부초>와 2011년 제35회 수상작 <철수사용설명서>가 같은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은, 일월곡예단의 쇠망사를 보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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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코 너구리 타이완 현대소설선 1
리앙 외 지음, 김양수 옮김 / 한걸음더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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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흰 코 너구리 - 정칭원(鄭淸文)  

 

화자인 '나'는 20년 만에 대학동창을 만났는데 그는 말 조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말조각상을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조각품을 둘러보는데, 유독 한 조각품이 눈길을 끈다. '나'는 친구에게 절름발이 말을 조각한 장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장인은 60여세가 된 사나이였는데 '나'에게 타이베이 근교의 쥬전(舊鎭) 지역을 아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의 미간에서 코까지 흰 반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기억해낸다.

장인의 이름은 쩡지샹(曾吉祥)으로 소학교 졸업 후 타이베이의 삼촌 식당에서 일을 한다. 그는 자신의 코에 흰 반점이 있는 것 때문에 도박꾼들에게 놀림을 받자 경찰에 밀고했다가 린치를 당한다. 이 사건으로 사람은 업신여기는 부류와 업신 당하는 부류가 있다고 생각하고, 경찰서 소사로 취직한 후 정식 경찰 시험을 본다.

일본이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던 시점에 쩡지샹은 우위란(吳玉蘭)과 결혼한다. 위란의 집에서는 일본식 결혼을 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지샹은 내지인과 같은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일본식으로 결혼하고, 황민화 운동에도 적극 동참하고자 한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자 상황은 급변하여 쩡지샹은 도주하고 위란은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빈다. 도망친 지샹은 본가로 도망치지만 아버지는 뜻밖에도 일본식 예식을 치룬 자신을 아들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두 달 후 위란이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샹은 자신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대신 용서를 빌어준 위란을 생각하며 자신이 저지른 민족반역 행위를 부끄러워 한다. 지샹은 사람들이 일본인을 다리 넷 달린 개라 부르고, 그 일본인의 주구(走狗)를 다리 셋 달린 놈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쥬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통과 수치심을 띤 절름발이 말을 조각한다.

지샹은 뒷다리가 이미 부러진 말 조각상을 '나'에게 선물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말을 슬그머니 놓고 친구를 데리고 말 없이 그곳을 나온다.

 

o 정조대를 찬 마귀 - 리앙(李昻)

 

그녀는 "입법위원"으로 평범한 중학교 음악선생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의회에서 "대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대검거'로 15년형을 받고 투옥이 되었다. 남편의 구명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평범한 삶을 버리고 "입법위원"이 되었는데, 실상 구명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두 명의 아이들은 "폭도", "죄수"의 자식으로 차별을 받아 결국 이민을 가게 된다. 그는 "국민대회 대표"로 반체제 잡지 편집일을 하는 동료이다.

둘은 "블랙리스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으로 간다. 독제자가 사망하면서 "블랙리스트"는 헐거워지고, 회의는 단체관광과 명목상의 회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그녀는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게 되는데 그 사진 속의 남성의 허리는 가느다란 끈이 묶여 있고, 중요한 부위는 화살표로 가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화살표가 무엇인지 물었고, 그는 사진이 악마이고 화살표는 악마의 꼬리라고 말한다. 별 의미 없었던 질문과 답변은 그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면에서 대검거 이후 성장이 멎어버렸다고 느낀다. 남편과 사랑과 성(性), 그리고 가정과 결혼생활 모두를 잃었고 현재 맡은 배역만을 할 뿐이라고 자각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은방울꽃을 사서 선물로 주자 꽃의 관능에 취해 잠을 설친다.

독재자의 죽음으로 남편의 감형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남편은 자신은 원래부터 무죄이므로 감형이나 가석방이 아닌 무죄방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직까지 비민주적인 정부는 남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그녀에게 타이완이 민주화가 되면 모든 것이 붕괴되어 과거의 희생마저 의미 없는 것이 될까봐 두렵다고 말한다. 돌아가기 전날 그들은 사진에서 본 마귀의 조각상을 실제로 발견한다. 그는 마귀가 정조대를 찬 것같이 보인다면서 "마귀는 정조대를 차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을 한다.

만약 반체제쪽에 가까운 여류작가가 이런 내용을 글로 쓴다면 대체 정조대를 찬 마귀는 그인지, 그녀인지 물을 것이다.

 

o 내 친구 손목시계 - 위엔저성(袁哲生)

 

어린시절 '나'는 슈차이(秀才)와 함께 편지를 부치러 가곤 했다. 슈차이는 사오수이꺼우(燒水溝)에서 손목시계를 찬 몇 안되는 소수에 속했다. '나'와 슈차이는 항상 집배원 오는 시간 맞추기 내기를 했는데 번번히 내가 승리했다. 슈차이는 자신이 시계가 있음에도 매번 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는 청력이 비상해서 집배원의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맞추기 때문이었다. 집배원은 슈차이의 편지를 번번히 돌려주었는데 집배원은 슈차이가 쓴 것과 같은 주소는 타이완 섬에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점을 보러 가셨는데 점쟁이는 11월 19일과 29일에 대지진이 일어나 타이완 섬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집에서 놀라운 청력으로 이것을 듣고 지진이 나는 그림을 그린다. 할아버지는 점쟁이 말에 불안하던 차에 '나'의 그림에 더욱 놀라 그림을 찢어버리고 손목시계를 산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느리게 움직여 60번 움직이면 한 시간이 지나기 때문에 마치 시간이 더디 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할아버지는 진정되었다. 옆집 훠옌쯔씨도 시계를 사고 싶었으나 아주머니 반대로 못 사자 한 시간에 한 번씩 할아버지에게 시간을 물어보았고, 그 시간이 얼추 맞았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시계가 없는 훠옌쯔가 시간을 아는 것이 불로소득으로 돈을 벌어가는 것처럼 약이 오른다.

11월 16일부터 사흘간 지진이 계속되자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피난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기차길에 사람이 모여있었고, 그곳에 오토바이가 넘어져있고 슈차이의 시신이 있었다. 집배원은 슈차이에게 우체국 편지를 기차가 싣고 간다고 알려주었고, 슈차이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둘만이 아는 비밀 장소에서 손목시계를 발견한 '나'는 슈차이가 시계를 나한테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계를 차지는 않았지만 왠지 청력이 예전만 못한 것 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릴 적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사실 우리 모두의 몸 속에는 손목시계가 있어, 스스로 평온하기만 하면, 그 "째깍째깍" 소리들이 조금도 주저없이 앞으로 내달리는걸 분명히 들을 수 있다고 슈차이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o 푸른 말 - 차이이쥔(蔡逸君)

 

썬(森)은 매일같이 통근 기차를 타고 뻔한 풍경을 보고, 똑같은 차 안의 승객들과 마주치며 살아간다. 그는 승객들이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차에서 잠을 자던 썬은 부드러운 남색 실크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를 만나고, 잠시 후 푸른 말이 플랫폼을 거니는 광경을 본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말에 대한 환상은 썬이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게 만들었고 몇 년 동안의 조용하고 규칙적이던 생활이 흐트러지려 한다.

썬은 정신을 차리고 푸른 말 따위는 잊어버린 후 늦잠을 자서 지각했다고 말하기로 하고 열차에서 내린다. 하지만 가방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열차를 바꿔 타려 하는데, 아까 보았던 여자를 다시 만난다. 썬은 그 여자와 같은 기차를 타게 되고 차장의 차표 검사로 당황하는 썬에게 여자는 차비를 빌려준다. 썬은 여자가 내리자 뒤따라 내려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다. 여자는 썬을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썬이 자신을 안다면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자 엉뚱한 이름을 대고, 그제서야 썬이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썬은 여자의 집을 나오지만 길을 잃고 놀이공원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회전목마들의 부서진 잔해를 보게된다. 열차의 기적소리를 듣고 다시 기차를 타고 종점으로 간 썬은 유실물센터에서 자신의 가방을 찾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가방은 오늘 잊어버린 것 같지 않게 먼지가 쌓여 있고, 역무원은 그 가방이 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방 안에서 나온 지갑에는 여자가 말한 남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돌아가는 마지막 열차는 사고가 나는데 경찰에게 열차장은 푸른 말을 보았다고 말한다. 썬은 미소를 지으며 차문을 뛰쳐나와 세찬 바람이 부는 광야를 질주한다.

 

o 대통령의 자판기 - 황판(黃凡)

 

주인공 뤄쓰(羅思)는 이름 때문에 "나사"라는 뜻의 뤄쓰(螺絲)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뤄쓰는 이렇다할 직업도 없이 미용실에 근무하는 여자친구 쑤쑤(素素)의 방에 얹혀 지내던 어느 날, 담배를 사러 자판기에 갔다가 동전이 부족해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때 개가 대문에 오줌을 누는 것을 보고 저렇게 계속 오줌을 눈다면 대문에 구멍이 나버리겠다고 생각한다. 이에 착안하여 뤄쓰가 자판기에 물을 부으니 동전 십여개가 쏟아져 나오고, 집에 돌아온 쑤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쑤쑤는 남의 것을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편취했다며 사소한 일에 커다란 "정의감"을 보인다.

다음 날 쑤쑤는 친구 샤오위(小渝)의 남자친구가 검거되면서 샤오위에게 블랙스타 권총을 남겼다면서 권총을 처분하는 일에 도움을 주라고 부탁한다. 뤄쓰는 막상 승낙은 했지만 버리러 가던 길에 겁에 질리고 자기도 모르게 경찰에 밀고하고 만다. 쑤쑤가 뤄쓰를 친구를 팔아먹었다며 탓하자 뤄쓰는 쑤쑤를 때리며 '아무리 가난해도 법을 어길 수는 없다면서 돈 몇 푼 빼낸 나를 욕해 놓고 이제는 증거인멸을 도와주라는거냐'고 욕을 해댄다. 뜻밖에도 쑤쑤는 뤄쓰가 자기를 버릴까봐 두려워하며 용서를 빈다.

그 즈음 뤄쓰는 집으로 전화를 했다가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집으로 돌아간 뤄쓰는 타이베이에서 뭘 하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자판기 사업을 한다고 말한다. 거짓말이었지만 말하는 사이 꽤나 괜찮은 사업으로 여겨졌고, 쑤쑤와 더불어 '나가요' 언니들의 돈까지 끌어모아 자판기 사업을 시작한다. 뤄쓰는 나이든 노인이 인사를 하면 대통령이 노인들을 못 본체 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이용해 조깅하던 대통령과 자신이 설치한 자판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이를 광고에 이용한다. 자판기 사업은 날로 번창했는데, 시국이 어수선해지면서 시위대들이 자판기에 붙어있는 대통령의 사진을 곱게 보지 않았고 뤄쓰는 자판기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돌격대원으로 보이는 시위대 일원이 대통령 사진을 떼어내 내팽개치며 사진을 밟아 대통령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강요하고 사진을 밟는 뤄쓰는 발바닥에 아픔을 느낀다.

얼마 후 쑤쑤가 집에 돌아와 대통령이 사임했다고 알려주자 뤄쓰는 자판기 사진을 마돈나 사진으로 바꾸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o 티벳의 연인 - 장잉타이(張瀛太)

 

주인공 '나'는 티벳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니마'라는 남자를 만난다. 그의 본래 이름은 한잉으로 텐진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2년간 일을 하고, 집에서 대학 가라고 준 돈을 가지고 19살 많은 여자와 멀리 도망을 쳤다. 4년의 시간을 떠돌면서 온갖 일을 다 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1년간 한다. 직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유화를 그리거나 시를 썼다. 그 후로 티벳에 온 후에 '니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나'와 '니마'는 티벳의 원초적인 자연 속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이제 와서는 서로가 함께 했었던 일이 진짜였는지, '니마'는 끊임 없이 변하는 어떤 것이었는지 아니면 실존하는 사람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어느 날 '니마'가 '나'를 떠나고 '나'는 티벳으로 여행을 계속한다. '나'는 그를 언제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못하지만, '나'의 탐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낀다.

 

o 나를 지휘하라 - 우진파(吳錦發)

 

아껀은 매달 두세차례 들르는 호텔로 가서 여자를 부른 후 회상에 잠긴다.

아껀은 신문기자로 얼마 전 편집국장과 사장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그들은 특정 회사에 대해 안 좋은 기사를 쓸 것을 주문하였으나 아껀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니우 주임이 아껀을 따로 불러내 압력을 가했다. 니우 주임은 전 이사장의 측근으로 "남을 지휘하려면 자기의 지휘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하며 소신 있게 행동하던 자였다. 그러나 사장이 바뀌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처신하라며 얼굴을 바꿨다. 주문한 대로 기사를 쓰지 않자 사측에서는 아껀에게 회사 주식을 팔고 그만둘 것을 종용한다. 아껀은 니우 주임의 얼굴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호텔로 간다. 그는 호텔에서 자신이 여자를 '지휘'하겠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운터에서 경찰의 임시검문이 실시된다는 전화가 걸려 온다. 여자가 화장실에 숨어 있는 동안 임시검문이 끝나지만 여자가 배변하는 모습을 본 아껀은 흥이 가시고 만다. 여자는 분위기를 다시 북돋워 보기 위해 아껀에게 자신의 '지휘'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말에 아껀은 흥분하여 여자와 다투게 되고 급기야 종업원이 방으로 들어와 싸움을 말린다. 아껀은 되는대로 돈을 집어던지고 비상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계단은 지옥 끝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o 금발 변색 사건 - 우진파(吳錦發)

 

여작가 뉴젠타이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자신의 머리카락이 온통 금발로 변한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자신이 몽유병에 걸린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집 안 어디에서도 염색약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자신이 인격 해리(解離) 증상일 가능성은 없는지 생각해 본다.

그녀는 미국에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정신병에 걸린 경험이 있었다. 타이완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익숙한 그녀에게 미국의 문화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학생이 교수에게 비판을 하며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모습 등에 충격받은 그녀는 환청을 듣기 시작하고, 정신분열 증세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지금의 남편 Peter를 만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곧 회복이 된다.

타이완에 교수 자리를 얻게 되어 돌아온 그녀는 신문에 칼럼을 투고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킨다. 대학생들은 그녀의 칼럼을 읽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부조리한 타이완의 질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하지만 보수 언론은 그녀를 창녀, 양놈 똘마니, 음모분자로 몰아부친다. 그런 와중에 머리카락이 노랗게 변하자 그녀는 칼럼 쓰기는 물론 수업 하러 나가는 것조차 포기한다. 그리고 아이를 끌어안은채 새벽에 목놓아 크게 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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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1895년 부터 무려 50년간 일제 강점기를 거치다가 1945년에 광복을 맞고, 1949년에 패전한 국민당 정부가 남하하여 국민당 독재 시기를 거친다. 40년간 계엄령이 지속되다가 1987년에야 해제되었다고 하는데, 그 궤적이 여러모로 남한과 흡사하다.

하지만 대만 하면 기억나는 것은 남한이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외교를 단절했던 사건과 영화 두 편이 거의 전부이다. 그 외에 뭐가 있나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중소기업, 컴퓨터 부품, 야구, 그런 단편적인 인상밖에 없다. 그만큼 대만에 대한 관심은 한정적이었다.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는 1994년도에 보았다. <씨네21>이라는 잡지를 동아리에서 구독했었는데 거기 롱테이크신이 소개되어 비디오방에서 봤다. 부동산업자인 여자와 묘자리를 파는 남자, 그리고 옷을 파는 남자 세 명이 한 집에 기거한다. 합의하에 기거하는 것은 아니고 남자는 여자가 없는 사이 몰래 숨어들어 산다. 대사는 어이 없을 만큼 적고, 마지막 즈음 여자가 우는 롱테이크신은 관객을 끝내 여자의 감정 속으로 우겨 넣는다. 보고 나서 느낀 허탈함과 단절감은 오랫동안 생각이 났다.

2010년에는 뉴청쩌 감독의 <맹갑>을 보았는데, 대만 애들은 저렇게 살고 저렇게 노는가 싶은 정도의 기억만 있다.

<목어소리>를 함께 샀다. 쉽사리 손이 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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