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을유세계문학전집 36
베네딕트 예로페예프 지음, 박종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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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누군가의 낯선 아파트 입구에서 잠을 깬 베니치카는 모스크바의 쿠르스크 역 광장으로 간다. 그는 모스크바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크렘린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쿠르스크 역 구내 식당에서 해장술을 찾다가 쫓겨난 베니치카는 상점이 문을 열자 각종 술과 아들에게 줄 호두와 사탕을 사 들고 페투슈키행 열차에 오른다.

베니치카의 직업은 전화 케이블공으로 작업반장을 맡고 있었는데 다섯 명의 동료와 더불어 매일 술을 마시고 시카 라는 카드 놀음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니치카는 동료들과 자신이 마신 알코올 소비량을 그래프로 그렸는데 이 보고서가 실수로 관리국에 보내지는 바람에 쫓겨나고 만다. 그래서 그는 아들과 애인이 있는 페투슈키에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기차가 출발하자 승강구를 들락거리면서 술을 먹고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가 자신의 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미트리치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손자, 검은 콧수염의 사내, 데카브리스트 등과 담화를 나눈다. 그들은 문학과 철학, 종교 등에 관해 이치에 닿지 않는 대화들을 나눈다. 검표원이 등장해서 그들과의 대화가 끊기지만 베니치카의 환상이 계속된다.

문득 베니치카는 기차가 페투슈키로 가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고, 반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는 사탄과 스핑크스, 그림 속의 공작부인을 만나 환상 속에서 그들과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베니치카는 페투슈키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골목 안에서 베니치카에게 네 명의 괴한이 접근하는데 그들은 베니치카가 절대 페투슈키에 갈 수도, 쿠르스크 역으로도 갈 수 없고 '왜 갈 수 없냐'는 베니치카의 질문에 '그냥' 이라고 답할 뿐이다. 그들에게서 도망쳐 광장으로 나온 베니치카는 그곳이 페투슈키가 아니라 다름 아닌 크렘린임을 깨닫는다. 네 명의 사나이는 베니치카를 쫓아와 목을 송곳으로 찔러 죽인다.

 

내가 밥벌이를 하는 곳에서는 몇년 전 부터 생일 날 자신이 원하는 책을 선물해 준다. 그래서 1년에 한번 책을 고르는 내밀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선물받은 책은 특히나 애착이 간다.

2010년에는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를 받았고, 2011년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는 을유문화사에서 국내 초역한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를 받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베니치카가 네 명의 남자에게 추격 당해 살해당하는 부분을 읽다보니 예전에 EBS에서 본 영화 생각이 났고, 그 영화가 이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마지막 장면과 해설만을 별로 집중하지 않고 봤는데 카프카 얘기가 자주 나와서 나는 그 영화가 카프카의 작품을 영화화 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당시 내가 얼핏 보았던 영화가 독일에서 제작된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카프카의 <성>과 같이 닿을 수 없는 <페투슈키>로 가는 여정이다. 페투슈키는 애인과 아이가 있고 자신이 돌아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베니치카는 2시간 30분 남짓한 페투슈키에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역들을 거쳐가면서 거듭 의심이 들고, 거꾸로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으며, 급기야 도착한 페투슈키에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알고 보니 그곳은 크렘린이었다.

페투슈키로 가는 부조리한 여정에 알코올 중독자의 중언부언과 환상이 결합하고 성서적 알레고리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작품 자체가 난해하고 모호한 면이 많다. <작가의알림>을 보면 초판이 단 한부였던 덕에 빠르게 다 팔려 나가고 말았다고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이 당의 공식적인 문학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사미즈다트(자기출판,지하출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미즈다트는 작가가 직접 타이핑한 작품 한 부를 지인들에게 돌려 읽히면 읽은 사람은 한 부 더 타이핑 하는 식으로 보급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서방 세계에까지 전파되어 프랑스와 독일에서 먼저 정식 출간이 되었고, 소련에서는 198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판이 되었다.

예로페예프는 브레즈네프 체제에 대해 풍자를 했다고 하는데, 이 대목에서 예전에 읽었던 <러시아 혁명사>가 생각이 났다. 내가 읽었던 <러시아 혁명사>가 다름아닌 브레즈네프가 쓴 <소련 공산당사>였고, 3권 후반에 접어 들면서는 이것이 역사인지 신화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이야기가 펼쳐져 4~5권은 '그 사회를 미화한다면 이럴 것이다' 하는 수준으로 참고만 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은 좋은 평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만큼 작품이 산만하다는 평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받은 느낌은 산만하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평을 내린 이유에는 예로페예프가 거부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쪽이 내 정서에 더 맞다는 이유도 있다.

 

선물로 받은 책들을 꺼내 보니 매년 생일 선물을 준 청장님이 바뀌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가능하다면 오랫 동안 밥을 벌어 먹고,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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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하드 럭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요시토모 나라 그림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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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여자가 생겨 오래도록 집을 비웠던 아버지가 '나'에게만 비밀리에 유산을 남기고 죽었다.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제법 사이가 좋았던 엄마는 유산이 탐이 나서 인감과 통장을 훔쳐 도망갔다. 엄마가 이사간 곳에 찾아가 빈집에 들어가 어이없을 정도로 순조롭게 인감과 통장을 되찾은 후 천만엔은 엄마 앞으로 보내고 천만엔은 '나'의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한다.

한동안 비즈니스 호텔에 머물다가 친구의 친구인 치즈루의 권유로 함께 살게 된다. 치즈루는 유령을 보기도 하고, 그 존재를 느끼기도 했으며, 동성애자였다. '나'는 치즈루가 원했기 때문에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함께 살아가던 어느 날 슬슬 혼자 생활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마침 싸고 좋은 집을 발견했기 때문에 치즈루에게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 치즈루는 떠나는 '나'를 보고싶지 않아 먼저 내렸고, 그렇게 헤어졌다.

치즈루와 통화한 후 다른 친구와 전화한 '나'는 치즈루가 화재로 숨졌고, 내가 통화한 것은 숨진 이후 유령이 된 치즈루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후로 '나' 역시 치즈루 처럼 죽은 영혼이라든가 어떤 기운이라든가 하는 것을 보거나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여행 중 호텔에서 여자 유령을 보는데, 그녀는 유부남과 동반자살 하려고 계획했지만 남자를 살리고 싶어서 자기 몫보다 더 많은 수면제를 먹어 홀로 죽은 여자였다. 호텔 종업원은 유령의 출현에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며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자기가 거처하는 방에 '나'를 재워준다. 다음 날 아침이 되고 전날 있었던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이 든다. '나'는 <이거야 말로 원나잇 스탠드......>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웃는다.

 

<하드 럭>

결혼을 위해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려고 매일 철야를 해가며 인수인계 작업을 하던 언니가 뇌출혈로 쓰러진다. 대뇌에 심한 손상을 입고, 부종의 압박을 받은 뇌간이 점차 제 기능을 잃어가서 식물인간보다도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만다. 약혼자였던 남자는 충격을 받아 집으로 내려가 버렸고, 그의 형 사카이 씨가 언니의 병상을 찾는다. 사카이씨는 태극권 중에서도 특수한 유파의 선생으로 그 사상과 실천을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머리를 기르는 괴짜같은 남자이다.

괴짜에 약한 나에게 언니는 사카이씨를 소개시켜주지 않았고, 이제는 사카이씨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사카이씨도 나를 보기 위해 병문안을 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언니의 위중한 상태와 그런 상황에서의 연애가 부담스럽다. 그리고 '나'는 곧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얼마 후 언니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인공호흡기를 떼어 내고 사망을 확인한 후 장례를 치른다. 언니의 남편이 될 사람은 장례식에 참석해서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후 장례를 거들었다.

'나'는 언니가 편집한 MD에 수록된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와 아라이 유미(마츠토야 유미)의 <길 떠나는 가을>을 사카이와 함께 걸으며 듣는다. 사카이는 나중에 이탈리아로 놀러 가겠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이다. 자신이 떠난 뒤 불의의 화재 사고로 죽어버린 치즈루와 그녀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첫번째 이야기 <하드보일드>. 몸은 죽어버렸지만 영혼은 아직 죽지 않은 언니, 그리고 그 언니가 죽고 있다는 사실로 지금 이 시간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두번째 이야기 <하드 럭>.

두 이야기 모두 화자가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듯 진쟁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슬픈 예감> 이후 두 번째다. 두번 다 잔잔한 느낌 외에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요시모토 나라의 귀여운 그림이 책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점은 고맙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책을 사는 이유 중 반은 요시모토 나라의 귀여운 그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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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가득히 동서 미스터리 북스 87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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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의 톰 리플리는 야심만만한 젊은이지만 실제로는 탈세를 돕고 편지사기로 수표를 부정하게 취득하는 등 자잘한 사기나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하버드 그린리프라는 조선회사 사장이 찾아온다. 하버드는 자신의 아들 리처드 그린리프(디키)가 이탈리아에 간 후 그림과 여자에 빠져 귀국할 생각도, 사업을 이을 생각도 없이 살고 있다며 그를 설득해 돌아오게 해 줄 것을 부탁한다. 유럽여행을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톰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적지 않은 사례금을 받아 이탈리아의 몬지베로로 떠난다.

그곳에 도착한 톰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디키를 만난다. 하지만 디키는 톰이 누구인지 잘 기억해내지 못했고, 그다지 반기는 눈치도 아니었다. 디키는 매달 미국으로부터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있고 부모의 지원도 있었기 때문에 그림과 놀이에 열중해서 지내고 있었으며, 머지 셔우드라는 미국인 여성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디키와 머지의 관계는 좀 묘했는데 디키는 머지를 여성으로 진지하게 생각지는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녀의 집과 자신의 집을 오가면서 스스럼 없이 지냈고, 머지는 디키와 좀 더 발전된 관계를 원하고 있었다.

톰은 특유의 재치와 언변으로 디키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하고 숙소를 호텔에서 톰의 집으로 옮긴다. 함께 살기 시작하자 디키를 사이에 두고 톰과 머지의 신경전이 시작된다. 디키가 톰과 단둘이 보내는 생활이 많아지자 머지는 톰이 동성애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톰은 디키와 함께 언제까지나 이런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머지가 자꾸만 방해가 되었고, 어느 날 머지의 집에서 디키가 그녀와 포옹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게다가 디키의 옷을 몰래 꺼내 입어보다가 디키에게 발견되어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고, 하버드 그린리프로 부터는 디키를 데려올 수 없는 것 같으니 이제 여행 경비를 대줄 수 없다는 편지를 받는다. 디키는 이제 노골적으로 톰이 자신의 집에서 나가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고, 산레모로 가는 여행을 끝으로 톰은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톰은 문득 자신의 체격과 외모가 디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를 살해한 후 디키 행세를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톰은 보트에서 디키를 살해하여 가라앉히고 보트 역시 돌을 집어넣어 가라앉힌다. 몬지베로에 혼자 돌아간 톰은 디키가 머지와 다시 만나고 싶어하지 한는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디키의 부재를 설명하고 그의 물건과 집 등을 처분해버린다. 디키의 행세를 시작한 톰은 매달 배달되는 수표에 위조서명을 하여 현금을 확보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디키의 친구 프레디 마일즈가 나타나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톰은 프레디마저 호텔에서 살해한다. 며칠 후 프레디의 시체가 발견되자 경찰은 그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디키(실제의 톰)에게 주목한다. 게다가 가라앉힌 배가 떠오르고 톰 리플리라는 청년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을 알게 된 경찰은 디키(실제의 톰)이 프레이돠 톰 리플리를 살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또한, 두 번에 걸쳐 위조서명을 한 수표의 서명에 대해서도 은행쪽에서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에 톰은 계속 디키 행세를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톰은 디키의 타자기를 이용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톰에게 남긴다는 유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톰으로 다시 돌아온 후 경찰에 출두한다. 살해되었을 것으로 짐작했던 톰이 멀쩡히 나타나자 경찰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톰은 디키가 프레디의 살해 사건 이후로 의기소침했었고 자살을 하려 했었다며 머지와 하버드 그린리프, 그리고 그가 데려온 탐정까지 모두 속여넘긴다. 그리고 몇달 지난 후 자신이 맡아 두었던 디키의 편지가 유서였음을 발견했다며 하버드 그린리프에게 통보하여 디키의 유산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톰은 디키의 돈과 자유 모두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디로 가든 자신을 쫓는 경찰의 환상을 볼 것 같다고 생각하지는 순간 어디로 갈 것인가 묻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톰은 제일 좋은 호텔로 가달라고 말한다.

 

소설의 원제목은 <재주꾼 리플리 The Talented Mr.Ripley>(1956)로 르네 클레망 감독이 톰 리플리 역에 알랭 들롱을 캐스팅하여 <태양은 가득히>(1960)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하여 성공하였다. 또한 <길>, <대부>의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니노 로타의 OST가 대단한 인기를 얻어 우리나라에서도 <영화음악>이니 <무드음악>이니 하는 제목의 테이프에 반드시 수록되기도 했었다.

2000년에 안소니 밍겔라 감독이 <태양은 가득히>를 다시 리메이크하여 <리플리>라는 이름으로 제작하는데 톰 리플리역에는 맷 데이먼이 분했다.

영화에서는 리플리가 디키를 살해한 후 머지를 유혹하는 설정이지만 원작 소설을 읽어보니 이는 불가능하다. 페트리시아 하이스미스는 톰 리플리를 다분히 동성애적 성향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톰이 디키의 옷을 몰래 입어보는 것이라든가, 디키를 살해한 후 디키가 머지와 성적 접촉을 한 것이 잘못이라고 탓하는 점, 그리고 의자 등에 걸려있는 머지의 속옷에 대해 대단히 불쾌해 하는 점, 야심과 욕망 가득한 톰이 머지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여성에 대해서도 관심 없어 하는 점 등은 다분히 이를 뒷받침한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주인공 리플리는 뛰어난 머리의 소유자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두 명을 살해하고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의 범죄는 완전범죄로 마무리되기까지 한다. 게다가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악의 화신인 리플리의 성공담과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은 묘한 대비를 주어 아이러니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우리 세계를 시사하는 것 같다.

페트리시아 하이스미스는 톰의 행동에 비난을 가하지도, 톰을 죄책감에 몰아넣지도 않는다. 단 한번, 마지막에 자신이 경찰의 환상을 보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재에는 최고의 호텔로 가겠다고 외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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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살인 사건 - 상 - 개정판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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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의 나이에 무과 별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가 된 이명방(李明房)은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매설가(賣說家) 청운몽(靑雲夢)을 잡아 들인다. 살인사건 현장에 어김없이 청운몽의 방각소설(坊刻小說)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의심하여 그를 문초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끝내 범행을 부인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범행을 자백한다. 범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수법 등을 자세히 실토했기 때문에 청운몽이 진범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고,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관에서는 청운몽을 부랴부랴 능지처참에 처한다.

사건이 종결된 후 이명방은 마상 무예의 달인인 야뇌 백동수 소개로 백탑(白塔) 인근의 실학파 학자들과 교우하게 된다. 연암 박지원, 형암 이덕무, 낙서 이서구, 담헌 홍대용, 초정 박제가 등은 청나라의 새로운 지식을 도입하고, 계급 질서를 완화하여 능력에 따라 등용할 것 등 과격하면서도 진취적인 의견을 주장하며 백탑 인근에서 모였기 때문에 백탑파라고도 불리웠다.

그런데 백탑파의 구성원들은 청운몽과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를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가 연쇄살인범 청운몽의 초상화를 그리고 이를 정표로 서로 나눠가지려 하자 이명방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꽃에 미친 화광(花狂) 김진을 만나면서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지는 않은가 의구심을 품게 된다. 게다가 살인사건이 또 다시 벌어지기 시작하자 정조와 체제공, 홍국영 등은 저마다 이명방에게 사건의 빠른 해결을 기대하게 된다.

김진과 사건을 다시 살피게 된 이명방은 연쇄살인이 방각소설을 필두로 대두되는 새로운 기운을 억누르려는 수구파 세력과 형의 명성을 자기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비뚤어진 욕망의 청운병 소행임을 밝혀낸다.

 

모리스 르블랑, 줄리오 레오니, 마가렛 두디 이런 작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명성이 자자한 누군가를 빌어 자신의 작품을 덧칠하는 쉬운 길을 택한다. 르블랑의 소설에서는 뤼팽이 셜록 홈즈를 깔아 뭉개고, 줄리오 레오니는 단테를 빌려왔고, 마가렛 두디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지 못하다. 반면에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은 뜻밖에 좋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역사 속의 성긴 부분에 작가가 적절히 개입해 들어가 그럴싸한 이야기 한 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방각본 살인사건>은 작가가 너무 여기 저기 집적거리다 이도 저도 아닌 소설이 되었다. 떡하니 역사 <추리> 소설이라 이름을 붙여 놓았으나 추리는 빈약하고, 실학파 학자들을 여기 저기 얹어 놓았지만 고명 역할도 양념 역할도 못하는 어정쩡한 '인용 인물'에 그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행동에 전혀 개연성이 없다. 동생이 자신을 시기하여 연쇄살인범으로 몰았다는 사실을 알자 즉시 모든 범행을 시인하여 기꺼이 능지처참 당하는 형, 형이 죽어도 그다지 이득이 돌아온다고 볼 수 없고 살인 자체에 탐닉하고 있지도 않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충실히 연쇄살인을 거듭하는 동생, 큰오빠를 무고하게 죽였지만 작은 오빠 역시 사랑하는 비정상적인 성격의 여동생, 두 명의 오빠를 능지처참 해놓고도 그 여동생에게 태연히 사랑고백을 해대는 정신 나간 주인공 이명방, 꽃에 미쳤다고 하면서도 수만권의 책을 모으고 기술과 악기에도 능한 누가 봐도 셜록 홈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탐정역할의 김진 등 소설은 매력 없이 삐걱거린다. <열녀문의 비밀>과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같이 샀는데,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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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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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개똥벌레

14,5년 전 나는 극우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정체 불명의 재단법인에 의해 운영되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기숙사의 하루는 나카노 학교 출신이라는 소문의 기숙사 관장과 그의 조수 노릇을 하는 학생의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된다. 룸메이트는 국토지리원에 들어가 지도를 만들고 싶어하고 병적일 정도로 청결한 것을 좋아했다. 룸메이트는 아침마다 6시에 일어나 라디오에 맞춰 체조를 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와, 친구의 여자친구까지 세 명이서 함께 만나곤 했다. 어느 날 친구와 네 게임쯤 당구를 쳤는데, 그날 밤 친구는 N360의 배기 파이프에 고무 호스를 연결해 자살한다. 유서도 없고 짐작 가는 동기도 없었다. '나'는 '죽음은 생의 대극(對極)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고 생각한다.

그 후 가끔 친구의 여자친구와 만나 데이트를 했다. 열 여덟이 지나고 열 아홉이 되었고, 2학년이 된다. 6월에 그녀가 스무 살이 되는 생일 날 그녀가 토하는 것 같은 자세로 울었고,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잤다. 그후 그녀에게서는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고 7월 초에 짧은 편지가 온다. 그녀는 휴학 후 교토의 요양소에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편지를 몇 백번이나 읽었지만 읽을 때 마다 슬퍼졌다.

그 달이 끝날 무렵, 룸메이트가 인스턴트 커피병에 넣은 개똥벌레를 준다. 옥상으로 올라가 병 뚜껑을 열고 개똥벌레를 꺼내 놓고 한참을 기다리니 개똥벌레는 뭔가 생각해낸 듯이 갑자기 날개를 펴더니, 어둠 사이로 떠올랐다. 나는 개똥벌레가 사라진 어둠 속에 살며시 손을 뻗쳐보지만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그 가느다란 빛은 언제나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o 헛간을 태우다

그녀는 팬터마임 공부를 하는 한편, 생계를 위해 모델일을 한다. 그녀는 '귤 껍질 까기'와 같은 팬터마임을 능숙하게 했는데,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고 한다. 그녀가 북아프리카로 훌쩍 떠났다가 남자친구와 함께 돌아온다. 그녀는 나에게 남자친구를 소개시켜 주는데, 그는 헛간을 태우곤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헛간들이 모두 그가 태워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 끝에, 내가 살고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헛간을 곧 태우기로 했다고 말한다.

동네 지도를 사서 그가 태우고 싶어질만한 헛간을 표시하고, 표시된 헛간을 조깅하면서 관찰하지만 헛간은 언제까지고 그대로였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그를 우연히 만나, 헛간에 대해서 묻자 그는 이미 헛간을 태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후보지가 될 헛간 앞을 달리고 있고, 가끔 불에 타 허물어져 가는 헛간을 생각한다.

 

o 춤추는 난쟁이

꿈 속에서 나는 난쟁이를 만난다. 난쟁이는 북쪽 나라에서 왔는데 춤을 추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그와 함께 살면서 춤을 추는 것은 누구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한다.

춤추는 난쟁이에 대해서 노인에게 물어보자 춤추는 난쟁이는 혁명 전까지만 해도 매일 술집에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난쟁이는 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고 좋은 대접을 받았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난쟁이는 사라져버렸고 혁명군은 난쟁이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소문이 있었지만 정확한 것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코끼리 만드는 공장으로 간다. 코끼리는 좀처럼 새끼를 낳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코끼리를 잡아다가 1/5은 진짜이고 나머지 4/5는 가짜인 코끼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코끼리 자신조차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다른 파트에서 일하는 예쁜 아가씨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아가씨는 거절했고, 난쟁이는 자신이 나의 몸에 들어와 춤을 춘다면 아가씨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한다. 둘은 계약을 맺는데 아가씨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난쟁이가 몸 밖으로 나가지만, 한 마디라도 내뱉는다면 내 몸을 난쟁이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난쟁이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은 나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하지만 난쟁이는 이걸로 끝이 아니고 언젠가는 내가 패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경찰관들에게 쫓기고 있고, 난쟁이는 매일 밤 꿈속에서 내 몸을 준다면 경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제안하곤 한다.

 

o 세 가지의 독일 환상

- 겨울 박물관으로서의 포르노그라피

착각이 아니라면 나는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하기로 정해진 일들을 별다른 노력 없이 해내고, 관장의 지시사항이 쓰여진 편지대로 일을 마치고 나면 섹스가 밀물처럼 박물관 문을 두들긴다. 나는 섹스를 생각하면 언제나 겨울 박물관에 있으며, 우리는 모두 그곳에 고아처럼 웅크리고 앉아 온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 헤르만 괴링 요새 1983

점심 때 텔레비전 탑 근처의 카페테리아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나이가 나에게 헤르만 괴링의 요새에 관해서 설명해 준다. 동독 체제 비자가 12시에 끊기기 때문에 나는 S반 역으로 돌아가야 했고, 청년은 SS와 러시아군 탱크의 잔해를 보여주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나는 혼자 역으로 걸어가면서 1945년 봄에 헤르만 괴링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상상해본다.

- 헤르 W의 공중 정원

헤르 W의 공중정원은 세로 8미터, 가로 5미터 정도로 지상에서 15센티미터쯤 떠 있는 3류급 정원이었다. 그는 공중 정원을 더 높이 올린다면 동독 쪽 경비병들이 몹시 과민반응을 보일 것이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길 생각은 없다. 왜냐면 친구들도 그곳 크로이츠베르크에 살고 있고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름에 또 오라며 나를 초대하고, 공중정원은 여전히 그곳에 15센티미터만 떠 있다. 

 

<개똥벌레>는 <노르웨이의 숲>의 단편 버전이라 할 정도로 하루키의 장편과 단편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루키는 장편을 쓰고 나면 막연한 후회가 남아 그것으로 단편을 정리해서 쓰고, 단편을 몇 개 정리해서 쓰고 나면 그것은 그것대로 안타까워서 장편에 착수하는 패턴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말한다. <헛간을 태우다>는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작품이었다. 나와 헛간을 태우는 그, 그리고 팬터마임을 하는 그녀가 서로 성긴 느낌이다. <춤추는 난쟁이>는 <1984년>이나 <브라질>의 느낌이 나는 단편이다. 황제도, 혁명군도 아닌 미지의 난쟁이와의 관계는 전공투와 우익 모두를 외면한 하루키의 반영 같다는 느낌이 든다.

1982년에서 1984년 단편들로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의 긴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최근 <반딧불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내가 읽은 것은 <개똥벌레>라는 제목의 개정 전 판본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5448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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