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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딸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3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평점 :
1부 1843~1848
칠레 발파라이소에 영국인들이 이주해서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영국인들은 인디오들의 거주지와 떨어진 곳에 모여 살았고, 영국 본토의 생활 습관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 영국인 거주지에 소머즈 남매가 살고 있었다. 맏이 제레미 소머즈는 <대영제국 수출입 회사>의 지점장이었는데 신중한 성격이었고, 둘째 존 소머즈는 선장으로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으며, 막내 미스 로즈는 아리따운 여성이었다.
1832년 3월 15일, 그들의 집 앞에 누군가가 갓난아이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놓아두고 사라진다. 미스 로즈는 자신의 집 앞에 아이가 버려진 것은 운명이라 생각하여 엘리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애지중지 키운다.
사실 미스 로즈는 과거에 빈 출신의 테너 가수 칼 브렛츠너와 염문을 뿌린 일이 있었는데, 그 애정행각이 좋게 끝나지 않았고 그때의 소문과 기억 때문 자기 인생에서 '결혼' 이라는 통과의례를 없애버린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제이컵 토드라는 젊은이가 열열히 구애하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어쨌든, 미스 로즈는 엘리사가 자기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그럴싸한 남편감을 만나 결혼한 뒤 그 남자를 적절히 조정해 가면서 비교적 독립된 삶을 꾸려가길 원했다. 그래서 마이클 스튜어드라는 어리숙해 보이는 장교를 엘리사에게 짝지워주겠다는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하지만, 그 남자가 미스 로즈에게 반하는 통에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그리고 정작 엘리사는 호아킨 안디에타라는 이름을 가진, 다소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인디오 청년에게 몸과 마음을 내주고 만다.
2부 1848~1849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아메리카 대륙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든다. 호아킨 안디에타 역시 금이 발산하는 마력에 사로잡혀 엘리사를 버리고 훌쩍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다.
그가 떠난 뒤에야 엘리사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과, 호아킨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엘리사는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뒤 항구로 가서 밀항을 알아보고, 타오 치엔이라는 중국인 의사이자 선원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런데 당시 칠레에 중국인은 흔치 않았는데 타오 치엔은 어떻게 흘러들어오게 되었을까? 타오 치엔은 본래 중국의 가난한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부모가 빚에 쪼들리자 다른 한의사 집안에 팔려간다. 그런데 이 한의사가 꽤 양식 있는 사람이어서, 타오 치엔에게 의술과 시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 된다. 타오 치엔은 그가 치매에 걸려 사망할 때까지 의술과 학문을 스펀지 처럼 빨아들인 뒤, 홍콩으로 건너 가 자신만의 진료실을 차려 꽤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그때 사귄 친구가 에버나이저 홉스라는 영국인 의사로, 그와의 교류 덕에 타오 치엔은 서양식 의술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된다.
얼마 뒤 돈이 생기자 타오 치엔은 어렸을 때부터의 소원, 즉 전족을 한 여자를 색시로 맞아들인다. 하지만 아내 린이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으로 죽자 상심한 타오 치엔은 폐인처럼 생활하며 돈을 탕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술집에서 골아떨어진 타오 치엔이 납치되어 배를 타게 되는데, 그 배의 선장이 존 소머즈였다.
하여간 배 밑바닥에서 사산과 멀미, 고열로 시달리는 엘리사를 타오 치엔이 극진히 보살펴 살려낸다. 이들은 1849년 4월 어느 화요일 오후 2시에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게 된다. 엘리사는 동양 남자아이처럼 의복과 머리를 바꾸고 타오 치엔과 함께 생활하는데, 이때 둘 사이에 다소 미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다른 인종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시기였고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기에, 둘은 서로에게서 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따뜻함을 갈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엘리사가 없어지자 소머즈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이 과정에서 엘리사가 사실은 존 소머즈 선장의 친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엘리사가 발견될 당시 그녀를 감싸고 있던 조끼는 존이 하룻밤을 함께 보낸 칠레 여인에게 벗어준 옷이었다.
존과 미스 로즈가 백방으로 엘리사의 행방을 수소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없었다. 엘리사가 밀항했기 때문에 배에 탄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이들은 엘리사가 죽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엘리사가 캘리포니아로 밀항할 때 자신을 간호해준 창녀에게 터키석을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이 터키석을 우연히 알아본 존 소머즈 선장이 창녀를 추궁하자 창녀는 그녀가 죽었다고 진술해버린 것이다.
3부 1850~1853
수십만명이 휩쓸고 지나간 캘리포니아에서 예전처럼 금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진짜 돈을 번 사람들은 금을 발견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배로 실어 날라준 선박 주인과, 그들이 먹을 신선한 음식을 공급한 상인, 그리고 창녀들을 관리하는 포주들이었다.
엘리사는 타오 치엔과 헤어진 뒤 조와 바발루가 이끄는 무리에 껴서 호아킨 안디에타를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대신 호아킨 무리에타라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악당의 이름만 간간히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엘리사는 그가 틀림없이 자신이 찾는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신출귀몰하는 범죄자였기에 찾을 길이 막막했다.
그런데 당시 그에 관한 기사를 간간히 써내는 기자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제이컵 토드였다. 미스 로즈에게 고백했다가 거절 당하고, 선교자금을 유용했다가 들통 나 혼쭐 났던 그는 존 소머즈의 도움으로 영국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캘리포니아에 와 기자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허풍은 여전해서, 호아킨 무리에타에 관한 기사는 모두 그가 지어낸 기사였다. 물론, 어느 정도 풍문과 아주 약간의 사실은 있었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보면 거짓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엘리사는 제이컵 토드를 찾아가서 호아킨 무리에타에 관해서 질문을 한다. 제이컵 토드는 얼버무려 남자아이를 쫓아낸 뒤에야 사실은 그가 변장한 엘리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존에게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몇 년이 흐른 뒤 엘리사는 자신이 호아킨을 찾는 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관성 때문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의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엘리사는 그제서야 자신이 사랑한 것은 타오 치엔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만난 엘리사와 타오 치엔은 창녀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해 그녀들을 구해 독립된 삶을 살도록 지원하는 일에 매진한다.
어느 날, 호아킨 무리에타가 치안대에 사로잡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의 목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 전시되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시체를 확인하고 나오는 엘리사에게 타오 치엔이 그 사람이 맞는 지 묻는다. 엘리사는 '나는 이제 자유로워요' 라고 답한다. 죽은 것이 안디에타였기 때문에 자유로워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안디에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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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페루 리마에서 출생한 이사벨 아옌데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칠레 작가로, 의붓아버지가 외교관인 덕택에 어렸을 적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고 한다. 17세에 칠레 산티아고에 정착한 뒤에는 저널리스트, 편집자, 희곡 작가로 활동했다.
그녀의 삼촌이 바로 저 유명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인데,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그녀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통에 1975년 베네수엘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망명지에서 완성한 소설이 바로 <영혼의 집(82)>이다. 이후 미국에 정착한 뒤 발표한 소설이 이 <운명의 딸(99)>이고, 2000년에 발표된 후속편 <세피아 빛 초상화(00)>와 함께 3부작을 이룬다.
마술적 리얼리즘과 에로티시즘, 페미니즘이 조화를 이루는 그녀의 소설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는 것은 소설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이사벨 아옌데는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천연덕스럽게 풀어내는데 천재적이다.
<운명의 딸> 역시 그런 매력이 한껏 발휘된 소설인데, 특히 삼남매라는 구도가 재미있다. 책임감 있는 큰오빠, 자유분방한 작은오빠와 천진난만한 여자 막내동생이라는 설정은 드라마나 소설에서 자주 사용하는데 큰오빠를 피해 나머지 두 동생들이 벌이는 소소한 모험들은 독자의 응원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큰오빠가 되기 보단, 막내동생이 되고 싶은 기질이 있지 않은가? 피노키오, 허클베리핀, 톰소여 등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낮동안 자켓을 벗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다. 나주에 있는 정보센터에 출장을 갔다 집에 돌아오니 6시였다. 문득, 저녁이면 일찍 퇴근해서 딱딱한 침대에 누워 책이나 보고 싶다던 장정일의 독서일기 한 구절이 생각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