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양장)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여기 매우 이상한 소설이 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몸에 밴 채로는 성공할 턱이 없다. 아니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쯤 되면 책 제목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가 있는가? 그런데, 가르치는 교사도 없고, 배움도 없으며, 이곳을 거치면 인내와 복종을 내면화한 미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데, 이런 학교에 왜 가는 것일까? 야콥 폰 군텐 이야기라고 했으니 주인공은 귀족이 분명한데...


이러한 의문들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증폭된다. 주인공 야콥은 주의회 의원의 아들로 뛰어난 가문을 버리고 가출하여 벤야멘타 남매가 운영하는 하인학교에 몸을 의탁한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공의 개념에서 한참 먼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야콥이 귀감으로 삼고 있는 급우 크라우스는 창의력이나 개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수동적인 인간이고, 굳이 미덕이라는 점을 꼽아 보려 해도 우직하다는 점 정도 밖에 없다. 야콥은 그런 크라우스의 성실함을 한껀 빈정대는 행위를 일부러 반복함으로서 글를 화나게 만들고, 그런 상황에서 흡족함을 느낀다. 


벤야멘타 양은 생도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 그녀는 크라우스를 뛰어난 학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야콥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소설의 말미에 사망하는데, 자신의 사망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아 - 자세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지만 -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그녀의 자살은 크라우스라는, 한없이 복종적인 존재에 대한 찬양에 머물지 못하고 야콥의 자유분방한 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일까? 벤야멘타 학원에서 능동적인 행위는 곧 파멸로 이어지는 것일까? 알기 어렵다. 작가는 불친절하다.


한편, 학원의 원장인 벤야멘타 역시 거인과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야콥에게 약한 면모를 보인다. 그가 야콥을 대하는 태도는 동성애적 애정의 갈구로 해석될 여지마저 있다. 그러고 보니 야콥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해서만 간간히 꿈을 꿀 뿐. 야콥은 학원 원장을 자신의 아버지로 삼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일까?

벤야멘타 양이 죽자 벤야멘타는 야콥과 함께 사막으로 간다. 그들은 왜 사막으로 가는 것일까? 사막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명이 피어날 수 없는 곳.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곳을 목적지로 하여 떠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3월 14일과 15일 양일간, 운영리스크 점검 출장이 있었다. 춘천우체국에 들렀다가, 190km 떨어진 동해로 이동해서 엘리시안 호텔(이라는 이름의 모텔) 방에서 읽었다.

언젠가, 인간이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거대 프로젝트에 투신한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 처연함에 대해 찬사를 바치던 시기가 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단련되는지', '어머니'는 어떠해야 하는지, 해답이 다 있었고, 반박은 '대의'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 거대 프로젝트는 이해하기도 쉬웠다. '주요한 모순' 이 하나 해결되면, '나머지 모순' 이 저절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주요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싸움에 모두가 투신하면 되었다. 그때 문제가 된 것이 있었다면, '주요한 모순'이 무엇이냐에 대한 동의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을까.


당시의 기준대로라면,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반동 쓰레기 소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세계의 한복판에서 '그 무엇도 아닌 존재'가 되고자 열망하는 것. 이 얼마나 부르주아적인 사치인가. 하지만, 사람은 '무엇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부조리한 존재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다시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생기는 것 아닐까. 나는 여전히 처절한 부정으로부터 긍정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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