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박상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자정, 30여평 정도의 실내. 록음악과 담배 연기가 가득 차 있다. X표시가 그려진 셔츠를 입은 남자, 보랏빛 립스틱, 샛노란 헤어밴드, UCLA 티셔츠를 입은 외국인, 검은선글라스, 물빛 원피스, 그리고  Ω 목걸이를 한 남자가 한 테이블에 모여있다. 이들은 메모패드에 펜으로 글씨를 써 의사소통을 하는데, 종잡을 수 없는 감각적 언어들을 맥락 없이 주고 받는다. 성적욕망, 쿠데타, 살육, 카니발... 그런 내용의 말들을 주고 받던 끝에, 카타콤으로 가자는 데 의견이 일치된다. 저주받은 영혼이 안식할 수 있는 지하 묘지, 그곳은 종말을 뜻하는 곳이 아닌가.

카타콤에는 뭉크의 그림이 기괴한 형상으로 변조되어 벽에 걸려 있었고, 그곳에서 물빛 원피스 입은 여자 - 오늘 자신의 아이를 유산시킨- 가 약을 먹는다. 검은 선글라스는 자신의 친구를 살려달라며 외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녀는 모두 사라지고 Ω 만 남았음을 깨닫는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빛이 아니라 소리로 다가오는 아침, 구원이 아니라 재앙을 알리는 불길한 경고음 같다.


<내 혈관 속의 창백한 詩>


손바닥에 검은 구멍이 나 있다. 뼈와 피와 혈관들이 들여다 보인다. 잠시 후 검은 물체가 손바닥에서 빠져나온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검은새다. 대략 그런 꿈을 꾸다 깨어난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386컴퓨터, 중형냉장고 등이 보인다. 동거하던 은지의 방을 떠난 지 사십구일만에 되돌아와서 잠이 들었다 깨어난 터다.

형이 오토바이에 다쳐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술을 마시고 은지의 방에 왔다. '엄마'와 '어머니'는 엄연히 다르다. 생모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에게 형의 성공을 위해 대학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형은 고시공부를 준비했고, '나'는 비뚤어졌다. 내가 잠이 들면 '어머니'는 형에게 영양보충을 시켜줬다. 형은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러다 은지를 만나 동거했다. 은지는 언제나 돌발적이고 기습적이며 일방적으로 성행위를 요구했다.

은지가 방으로 돌아온 나를 발견하고 발작적으로 화를 내며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갔다. 은지에게도 형제가 있었다. 희진이라는 여동생이었다. 희진을 찾는 남자가 찾아왔지만 은지는 모른다고 답변하며 남자를 돌려보냈다.

다음 날, 은지가 손을 다쳐 붕대를 친친 감고 방으로 돌아온다. 그 손으로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동안, '나'는 은지를 형으로 착각한다.

은지가 지쳐 잠이 들자 '나'는 그녀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24시간 영업하는 해장국집으로 간다. '견딜 만하다고 하니까/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뭐' 따위의 시를 읊조리며.


<붉은 달이 뜨는 풍경>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난 것은 4월 말경이었다. 최근 잘나가는 여성 시나리오 작가 인터뷰 자리였다. 시나리오 작가는, 후배 시나리오 작가를 남자에게 소개키켰다. 남자는 다소곳한 후배 작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후로 만남이 있었고, 육체관계가 이어졌다. 여자도 남자가 좋은 눈치였다. 그녀는 남자 경험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여자가 작업을 위해 저수지가 있는 시골의 별장으로 간다. 남자와 여자는 음성메시지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녀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만남을 유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가 보고 싶었다. 음성 메시지에 '만나러 가겠다'고 남긴 뒤 일방적으로 그녀의 별장을 찾아간다. 가는 동안, 남자는 여섯 명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여자를 갈아치웠고, 여자가 더럽다고 했다. 그녀의 생모는 동성애자였다.

목적지 부근에서 남자는 여자의 음성 메시지를 듣는다. 그녀는 무작정 자신을 찾아오는 남자가 무책임하다고 했다. 그날, 남자는 여자가 설명한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별장을 찾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어둑어둑한 밤하늘 아래, 두 여체가 알몸으로 서로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두 명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 그림자를 위한 산문시>


남자가 십구일만에 여자의 집에 방문한다. 남자는 포도주를 찾은 뒤, 햄과 치즈가 겹쳐진 안주에서 치즈만 먹는다. 여자는 '오늘은 햄까지 먹으라'고 말한다.

여자는 오늘 '푸른 소리' 레코드점에 임시휴업 게시판을 건 뒤 산부인과에 갔다 왔다. 두번째 중절이었다.

남자는 구질구질한 말들을 한바탕 늘어놓으며 술을 먹는다. 그는 "그만 갈게"라고 말한 뒤, "따라오지 마"라고 덧붙인다. 여자는 왜 그가 "따라나오지 마"라고 하지 않고, "따라오지 마"라고 하는지 궁금하다. 얼어붙은 그녀의 맑고 투명한 영혼에 소복이 눈이 내려 쌓인다.


<내 마음의 옥탑방>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형의 소개로 취직을 해 마음에도 없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백화점을 상대로 하는 레포츠용품 영업 일이었다. '나'는 영업실적 확인을 위해 백화점 '위'에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일에 정신적 공황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의 안내 데스크 직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가방을 맡겼던 일을 빌미로 그녀와 차를 한잔 마셨고, 그녀와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 이름은 주희였다.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귀던 어느 날, '내가 주희에게 어떤 존재'인지 묻는다. 그녀는 별다른 설명 없이 '나'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 간다. 옥상 위에 위치한 그 방을 그녀는 '옥탑방'이라 불렀다. 그녀는 옥탑방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며 '지상의 주민이 되어 미물스럽고 속물스러운 세계에 안주하는 꿈'을 꾼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옥탑방 마당에 레포츠 용품을 펼쳐 아담한 별장을 만들어 주었고, <시지프의 신화> 책도 선물해 준다. 그녀는 그런 '나'의 행동에 무척이나 기뻐한다. '내'가 그녀의 방에서 자고 오는 날이 많아지자, 형과 형수는 은근히 '나'의 독립이 실현되려나 하고 기대하는 눈치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충만한 시간들은 지나가고, 그녀와 나의 삶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5일간의 휴가를 갔다온 주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소아마비 동생은 이모집에 맡겼다고 했다. 그녀가 옥탑방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나'는 그녀가 없는 옥탑방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해보았지만, 그녀는 옥탑방에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시를 한편 남기고 옥탑방을 떠난다.

그녀가 백화점을 그만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그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편지에 '평생 옥탑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과 나의 인생을 상상하기 싫었다'고, 그리고 '옥탑방에서의 당신과 나의 기억을 영원이 간직하는 길은 떠나는 길 밖에 없었다'면서 '내가 사랑했던 시지프여 안녕' 이라고 끝을 맺는다.

얼마 뒤 '나'는 형의 중매로 결혼을 한다. 가끔 '나'는 그녀의 편지를 떠올리며, 혹시라도 그녀를 마주치게 된다면 '자기 운명에 당당하게 맞설 줄 아는 행복한 시지프의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말무리반도>


주인공 '나'는 순수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생계 때문에 건축도면 따위를 그려왔다. 건축경기가 좋던 실절이라 사업은 번창했고, 아내는 '몇년만 더 건축도면을 그리고 뜻대로 하라'며 '나'를 설득했다. 그게 몇차례 반복되는 동안 10년이 흘렀고, 건축경기가 사그라 들면서 사업 역시 쪼그라든다. 모아둔 돈은 아내가 처남과 사업을 벌이다가 모두 탕진해버렸고, '나'는 아내와 이혼한다.

이혼한 뒤 친구의 별장을 찾아간다. 강원도 깊숙한 곳에 위치했는데 마을 이름이 바다윗말이었다. 부근에는 금강산 건봉사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우연히 아름다운 용모의 마을 처녀와 조우한다. 그녀는 선선히 나와 술을 마셨고, 자기 얘기를 털어 놓았다. 그녀의 부모는 실향민이었는데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원도 산골에 정착한 것이었고, 그녀의 언니는 그런 부모 밑에서 답답해 하다가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을 우물에 투신하는 것으로 풀고 만다. 

그녀와 말들이 바다로 일제히 뛰어가는 형상을 한 말무리반도를 보고온다. 그녀가 '나'에게 자신을 데리고 멀리 떠나달라고 말한다. '나'는 그녀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

약속시간을 30분 남긴 밤 11시 30분, 안개가 자욱한 바다윗마을 풍광을 보며 '나'는 이것이 모두 허구는 아닌지, 깊은 환상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다 문득 여기가 원점이라는 생각이 들자 차를 출발시켜 바다윗말을 떠난다.  


<깊고 푸른 방, 깊고 푸른 빵>


어느 날 나는 '푸른 방'에서 깨어난다. 문은 바깥에서 잠겨 있었고, '나'는 나갈 수가 없었다. 바깥에는 幻이 있었는데, 幻은 '나'에게 빵을 제공한다. '나'는 빵을 먹지 못한다. 어렸을 적, 아버지를 속여 빵을 얻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거/짓/말/을/하/다/간/늑/대/한/테/물/려/죽/고/말/거/다. 라고 선언하고, 그 뒤로 '나'는 빵을 떠올리면 늑대의 이빨에 물어뜯기는 것이 연상되어 먹지 못한다. 

성년이 된 뒤에는 여자친구가 매번 만들어주는 빵을 먹지 않았다가 그녀가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결국 나는 어짜피 거짓의 세계로 고통을 받느니, 내가 직접 거짓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소설가가 된다. 그런데 푸른 방에 갇힌 지금 빵 외에는 먹을 것이 없는 것이다.

며칠을 굶다 마침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을 쓸 수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빵을 먹고 힘을 얻어 탈출에 성공한다. 여섯 밤, 일곱 낮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짓과 참, 현실과 환이 연결될 수 있으되, 그 연결고리가 전적으로 사랑에 힘입게 된다는 것을 이미 당신은 깨달았을 것이라는 환의 메모를 읽은 뒤, 나는 시간과 파국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 환의 세계를 등 뒤로 남기고 빵집을 찾아간다.


<어느 지하 생활자의 수기>


지하에는 '기록자', '침묵자', '명상자' 세 부류의 사람이 살았다. 그들은 해탈의 눈, 즉 제 3의 눈을 얻고자 했다. '나'는 거짓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허구적 방법을 추구하는 기록자였다. 어느 날, 팔부 능선의 마녀에 대해 들은 '나'는 그녀에게 도달하기 위해 진실한 기록물을 들고 간다. 기록물은 마녀가 원하는 기준을 충족했고, '나'는 마녀와 만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나'와 그녀가 교접하는 와중에 그녀가 금기를 깨고 소리를 내고 만다. 그제서야 마녀는 자신이 진짜 마녀가 아니고 기록물을 불편하게 생각하던 지상족들이 자신에게 마녀의 굴레를 씌웠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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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걸고 야만의 폭력과 맞선 80년대의 존재들'을 그려내던 작가가 세기말, 종말론적 분위기를 내뿜는 소설집을 냈다. 제목도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다.

이름조차 없이 특징들로 구분되는 자들이 모여 필담을 나누다가 카타콤을 찾아간다. 생명을 잉태한 여성이 스스로 그 생명을 지운 직후 찾아간 곳이 무덤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첫째, 거짓을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소설가의 사명에 대해, 둘째, 그 소설(혹은 순수)과 현실(혹은 속물적인 속세)의 관계에 대해 탐구한다.

명시적이지 않은 표현과 상징적 비유들로 막연한 인상에 그치는 작품도 있지만, <내 마음의 옥탑방>은 <마틴 에덴>이나 <위대한 개츠비>가 다룬 불멸의 모티프, 즉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욕망과의 관계에 대해 훌륭히 재해석하여 작품 속에 녹여낸다. 99년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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