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녹정기 세트 - 전12권 - 개정판
김용 지음, 박영창.강승원 옮김 / 중원문화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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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다. 강희(康熙)의 아버지 순치황제는 본래 24세의 나이에 사망했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작가 김용은 순치황제에 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야사에 근거해 소설을 전개시킨다.

야사에 따르면, 순치황제는 후궁 동귀비를 몹시 사랑했는데 그녀가 급사하자 늦게라도 황후에 봉하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예법과 달라 될 일이 아니었고, 이 과정에서 문득 허탈함에 빠진 순치황제는 24세의 나이에 출가하고 말았다고 한다. 


어쨌든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강희에게는 아직 천하를 확실히 거머쥘 힘이 부족했다.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오삼계라는 막강한 군부세력이 외곽에 버티고 있었고, 오배라는 대간신 역시 막강한 권세를 틀어쥐고 강희의 권위에 수시로 도전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양주의 여춘원이라는 기생집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태어난 위소보(韋小寶)가 강희와 관계를 맺게 된다.

위소보는 천성이 게을렀고 배움을 귀찮아 했다. 다만 임기응변과 도박, 거짓말에는 능했는데 그 재주가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다 보니 왠만한 시련은 이러한 잔재주로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 위소보가 모십팔이라는 호걸과 사귀게 된다. 모십팔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가슴에 아로세긴 호걸로, 가는 곳마다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싸움이 반복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황제가 기거하는 성에까지 들어가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상대는 태감(내시) 해로공이었는데 그의 무공은 가히 천하무적이었다. 위소보는 해로공과 그를 수발드는 소계자를 정식으로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독약을 써서 소계자는 살해하고 해로공은 눈을 멀게 만든다. 하지만 모십팔이 해로공에게 당해 생사를 알 길이 없게 되자 위소보는 어쩔 수 없이 눈이 먼 해로공에게 자신이 소계자라고 사기를 쳐서 목숨을 연명한다.

그런데 해로공은 눈이 멀어서 그런지 위소보를 소계자라고 믿고 특이한 일을 시켰다. 그것은 매일 같이 도박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도박을 해서 돈을 따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해로공의 목적은 도박 상대인 도서관 관리인에게 환심을 사서 <사십이장경>이라는 책을 훔쳐내는 데 있었다. 도박이라면 밥 먹는 것 보다 좋아하는 위소보는 신이 나서 도박을 하러 다녔고, 그러다 우연히 소현자라는 또래 친구를 사귀게 된다. 둘은 만날 때마다 무술을 겨루고 맛있는 것을 나눠 먹었는데, 얼마 뒤 위소보는 소현자의 정체를 알고 충격에 빠지고 만다. 그는 다름아닌 청나라 황제 강희였던 것이다.

강희는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밝히고 난 뒤에도 위소보를 친구처럼 대했고, 위소보 역시 강희가 스스럼 없이 대하는지라 그를 위해 몇 가지 부탁도 들어주고 바깥에서 겪은 모험담도 들려주며 신뢰를 쌓아 간다.

한편, 해로공 역시 진짜 정체는 따로 있었다. 그는 순치황제의 충복으로 밀명을 받아 단경황후와 그의 아들 영친왕이 화골면장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궁 안에 잠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낸 범인은 태후였다. 해로공이 태후에게 사실관계를 추궁하며 다툼을 벌일 때 위소보가 이 내용을 듣게 된다. 태후는 위소보를 어떻게든 죽여 없애려 하지만, 위소보는 임기응변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강희의 신뢰를 얻어 계속 벼슬은 높아만 간다.

위소보가 강희를 위해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간신 오배를 찔러 죽인 일이었다. 그런데 오배는 강희도 죽이고 싶어했지만 천지회 사람들도 오배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위소보는 자연 천지회 사람들로부터도 추앙을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위소보는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고, 청목당의 향주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이로써 위소보는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건 조직 천지회의 중요 인물이면서, 강희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그야말로 명나라와 청나라 양쪽 모두로부터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된다. 궁에 들어서면 온갖 시위 대신들이 위소보에게 아첨했고, 밖을 나서면 각지의 영웅호걸들이 위소보의 영웅됨을 칭찬했다.


위소보는 이후 강희의 명을 받들어 순치황제를 라마들로부터 구해내고, 몽고와 서역의 반란을 지혜로 무력화시킨다. 또한, 나찰국(러시아)과 손 잡고 청나라를 치려한 신룡교를 무력화시키고, 나찰국 소비와 여왕과 관계를 맺어 외교적 성과도 거둔다. 태후가 가짜라는 것을 밝혀내어 적절히 조치했고, 오삼계의 반란 평정에도 도움을 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인들을 희롱하는데, 목왕부의 방이와 소준구 목검병은 목숨을 구해줌으로써 사랑을 얻고, 쌍아라는 여인은 오배를 죽여 과부들의 한을 풀어준 덕에 하녀로 하사받게 된다. 이자성과 오삼계 모두의 눈을 멀게 한 진원원의 딸 아가는 정극상에게 홀딱 반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소보가 계략을 써서 몸을 빼았고, 홍교주의 부인 역시 혼란한 틈에 몸을 탐해 애를 베게 만든다. 건녕공주는 소설 속에서 마조히스트로 그려지는데, 어쨌든 그녀도 위소보에게 몇 대 얻어맞은 뒤 위소보의 여자가 되고, 증소저 역시 별다른 개연성 없이 위소보의 아내가 된다. 


하지만, 위소보의 위태로운 줄타기는 강희가 위소보의 정체를 파악하면서 끝이 나고 만다. 하지만 강희는 위소보가 자신을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던진 것은 거짓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위소보의 목숨을 살려주고, 위소보 역시 강희가 훌륭한 왕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사십이장경>에 씌여진 곳을 허물어 청나라의 명맥을 끊는 짓은 하지 않는다.


녹(鹿). 사슴은 들짐승으로 덩치는 크지만 성질은 온순하여 단지 풀이나 나뭇잎만 먹고 살면서 다른 동물을 해치는 법이 없다. 맹수가 잡아먹으려고 덤비면 사슴은 단지 도망칠 수밖에 없고, 만약 도망치지 못하면 맹수의 밥이 되고 만다. 옛사람들은 종종 사슴을 천하(天下)에 비유하곤 했다. 세상의 백성들은 온순하고 선량하여 남에게 압박과 박해를 받기만 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정(鼎). 옛날 하(夏)나라 때의 우왕(禹王)은 구주(九州)의 금을 거두어들여서 9개의 커다란 솥을 주조하였다...후세에 천하의 주인이 된 자는 <좌전(左傳)>에서 보면 9개의 솥(鼎)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 두 글자가 합해진 녹정(鹿鼎)은 천하의 패권을 뜻한다.

녹정기(鹿鼎記)는 장편 12부와 단편 3부를 남긴 김용의 마지막 작품으로 1969년 10월 24일부터 명보(明報)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1972년 9월 23일 탈고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김용은 절필을 선언하였고, 몇 차례 새로운 소설에 대한 구상을 발표한 적은 있지만 실제 작품이 씌여진 적은 없다. 따라서 녹정기 이후에 김용의 이름을 달고 나온 소설은 모두 위작이다.


녹정기의 결말은 위소보가 자신의 아버지가 한인, 만주인, 몽고인, 회족사람, 서장인 중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서 끝이 난다. 김용의 초기 작품이 한족 정통성에 기대어 씌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크나큰 변화이다. 시대적으로 <벽혈검> 바로 다음 시대를 다루고 있어 <벽혈검>의 인물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중원문화 편집부가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 놓고 있어 이야기 진행을 따라가는데는 무리가 없다.


첨언.


1. 중원문화 편집부가 소설 속 사건을 편리한대로 해석해서 80년대말 사회과학책에나 나올 법한 주석들을 달아 놓은 것은 못내 거슬린다. 그냥 되는대로 진보적 해석을 가하는 식인데, 소설 속에서 약을 먹이는 부분이 나오면 "미제국주의자들이 제3세계 민중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것을 빗대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그것도 자주, 반복적으로.

중원문화는 예전에 <형식논리학과 변증법적 논리학>이니,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따위의 책들을 펴내던 출판사인데, 특이하게도 김용의 무협지도 포트폴리오로 구성하고 있다. 역자 박영창도 프로필에 민주화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루었노라고 쓰고 있다.


2. 그런데, 김용의 대표적 위작 중 하나가 <장백산맥>이다. <장백산맥>의 역자 서문을 보면, 역자가 중국에 갔다가 서점에서 김용의 신작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서 단번에 번역을 하여 책으로 내었노라는 식으로 써놓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장백산맥>의 역자 중 한 명이 박영창이다.


3. 녹정기 말미에는 중편 <백마소선풍>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카자흐 지역에 숨겨진 보물지도를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지는데,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문화가 뒤쳐지는 카자흐인들에게 당나라가 선물했던 일상용품이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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