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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김형경 외 / 현대문학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김형경의 <세상의 둥근 지붕>이 제일 처음 수록되어 있다. 주인공 승주는 결혼 뒤 두 번 유산을 한다. 언청이가 되는 유전 내력 때문에 고통을 겪던 어머니는 승주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그런 아픔과 두려움 때문에 승주가 유산을 하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타입이었고, 곧 '생산하지 못하는 승주'에게 별거를 통보한다. 그러다 기찻간에서 어머니 또래의 비구니를 만난다. 승주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 김형성은 여성성과 모성성에 대한 낡은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배수아의 <검은 저녁 하얀 버스>는 역시나 파격적이고 당돌하다. 작가의 문체는 어딘지 모르게 번역투를 띤다. 등장인물들도 <사촌>, <사촌의 오빠>, <사촌이 좋아하는 여자아이>, <사촌의 오빠의 여자친구>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촌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 작품에서도 배수아의 예민한 감수성은 돋보이지만, 작가의 소설은 다소 엽기적인 줄거리와 만날 때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성석제의 <이른 봄>은 야성성을 버린 대신 장수한 장끼가 젊고 매력적인 까투리를 만나는 내용이다. 성석제 특유의 해학은 있지만, 내용은 다소 상투적이다.
송하춘의 <갈퀴 나무꾼들>은 안정된 삶을 누리는 중년 남성 진백이 외도의 백일몽을 꾸는 내용인데, 작가가 이야기를 엮어 가는 솜씨가 능수능란하여 속된 느낌이 없는 담백한 작품이다.
신경숙의 <마당에 관한 짦은 얘기>는 20년 전 감수성이 예민할 때 읽었던 터라 감회가 남다르다. 소설속 짧은 문장 하나가 당시에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생이 송두리채 비껴가고 있어도 저 또한 한쪽으로 비껴서서 신발로 땅바닥이나 콕콕 찧고 있겠지.
그땐 왜 저 문장이 그렇게도 쓸쓸하게 느껴졌는지...
윤대녕의 <상춘곡>은 2017년에 읽기엔 불편하다. 여성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저열함이 느껴지고, 과장된 욕심 때문에 전체적인 줄거리가 작위적이다. 그리고, 전두환을 "단군이래 5,000년 만에 만나는 미소"로 칭송한 미당이 그의 문학적 스승인 듯 해서 뒷맛이 좋지 못하다.
이동하의 <젖은 옷을 말리다>는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데, 이동하가 훌륭한 소설가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비가오는 날,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의 묘를 이장하는 내용인데 주의깊게 읽어보면 작가가 이야기 뒤에 숨겨 놓은 것들의 무게가 보통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역사와 운명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왠지 긴 소설을 읽었다는 착각이 든다.
이한음의 <대화>는 사뭇 재기발랄하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로 추정되는 인물이 상대편을 이기기 위해 계략을 짜고 음모를 꾸미는 설정도 재밌고, 알레고리 수법으로 90년대 중반을 포착한 솜씨도 훌륭하다. 다소 생소한 이름이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현재는 주로 과학서적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고 소설은 쓰지 않는 듯 하다.
이혜경의 <불의 전차>는 무척 순진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과거 선생을 하다 관두고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하다 한 기업이 주최한 백일장에 글을 내서 당선된다. 이를 보고 예전 제자가 찾아온다. 제자는 정신없이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주인공은 제자를 보면서 남편 생각을 하고, 생존경쟁에 휩쓸려 헉헉대는 그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런 내용인데, 다분히 고리타분한 공자님 말씀이 쓰여 있다.
최수철의 <어둠의 후광>은 어느 날 주인공이 사람들의 머리 뒤쪽에서 아우라를 보는 이야기이다. 이렇다할 줄거리는 없고, 마지막에 주인공이 태양을 보면서 인간 존재들 사이에 후광이란 무엇인지 깨닫는다. 작가는 우울하고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인간 존재가 느끼는 답답함을 장인의 솜씨로 빚어 내는데, 읽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다. 작가 역시 고통스럽게 글을 썼음이 느껴진다.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선뜻 손이 안가는 작가이다.
하성란의 <두 개의 다우징>은 신인다운 신선함은 느껴지는데 다소 산만한 것이 흠이다. 다우징은 수맥이나 광맥을 찾을 때 쓰는 막대기이다. 바람핀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만난 이복 언니, 있지도 않은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준다며 22층 창밖으로 밥풀과 고기조각을 던져대는 엄마, 치통을 앓는 주인공이 감각적 필치로 그려져 있다.
함정임의 <바다로>는 빠다냄새 물씬 풍기는 소설이다. 폴 발레리, 그가 묻힌 세트, 동성애자인데도 청혼을 했다가 도망가는 옛 남자친구. 이런 소설이 나는 싫다.
김형경의 <세상의 둥근 지붕>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사람들이 대체로 과거를 그리면서, 그 시절 그때를 이야기하면서 사는 이유를 승주는 이제 알 것 같다. 모든 과거에, 모든 인간들은 현재보다 조금 더 젊었던 것이다. 조금 더 힘이 있었고, 조금 더 많은 문 앞에 서 있었고, 조금 더 순수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그 시절의 '나'를 욕망하는 것이니, 김형경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96년에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보'에 불과했지만, 순수하긴 했던 것 같다. 대학교 3학년이던 그 해에 나는 <Pearl Jam>과 <일기예보>의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듣다가 영장이 나오자 군대에 갔고, 재검판정을 받는 바람에 시골집에 머물면서 기독병원을 주 1회 들락거렸다. 의대를 유급당한 친구가 있어서 매일 함께 오락실에 가서 <사무라이 쇼다운>을 했고, 밤까지 하릴없이 어슬렁 거리다 해가 뜰 때 쯤이면 우리집에 가서 낄낄대다 잠이 들곤 했다. 이야기 7.1 프로그램으로 통신도 했던 것 같고,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 청소부>에 보라색 형광펜을 칠해가며 읽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시기였다. 팀원이 한 명 빠져서 일이 많다. 그래서 96년이 떠올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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