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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봉순이 언니>의 화자는 1963년 서울,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뒤 제3공화국을 건설한 그 해에 태어났다. 그 해에는 각지에서 학생데모가 일어났고, 대한중석 등 3개 국영업체 광업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시위가 벌어졌으며, 미국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했다. 워커힐호텔이 건립되어 양공주들이 미군들로부터 화대를 받고 출입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화자의 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무력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고생 모르고 자라 가난이 끔찍하기만 해서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런 화자의 집에 13살의 봉순이 언니가 살았다.
그런데, 그 봉순이 언니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입장 차가 존재할 것 같다. 작가, 혹은 화자는 봉순이 언니가 숙식과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제공 받았고,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것 보다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더 나아가 봉순이 언니를 내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녀가 불쌍하고 갈 데 없었기 때문에 '거두어' 주었고, 이런 저런 말썽의 뒷처리까지 해야했다고 부언한다.
정말 그런가? 화자는, 혹은 작가는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다른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오늘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박근혜 대통령은 가장 청렴한 사람으로 탄핵은 당연히 기각되어야 한다' 라고 발언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여기서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소방관에게 '관등성명'을 요구하며 갑질을 하여 유명세를 탄 그 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의 사진을 <노동해방문학 창간호(89년 4월)>에서 처음 보았다. "노동자의 큰형 김문수 동지와 함께" 라는 제호의 기사에서 김문수는 "감옥은 노동자의 성장촉진제가 되기도 하며 정치학교가 되기도 하는 노동운동가의 필수코스입니다"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는 1986년 국군 보안사령부에 강제 불법 연행되어 지옥같은 고문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노동운동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30년 뒤 '박근혜 대통령이야말로 가장 청렴한 사람'이라고 부르짖는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가 아니다. 세상엔 별 희안한 주장들이 많으므로 그냥 그렇다고 넘어갈 수 있다. 내가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은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이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런 가정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의 진보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은 아닐까 하는...
가령 김문수 전 지사가 엘리트주의와 출세주의, 그리고 합리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불의를 보고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과, 합리성을 실현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그는 불의가 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있기에 변혁운동 쪽으로 자연스럽게 경도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성정을 특징짓는 또 다른 측면, 즉 엘리트주의와 출세주의는 기이하게도 '운동권 출세주의'라는 형태가 되어 노조의 리더가 되거나 조직의 수장이 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체포, 고문, 투옥의 과정을 거치고 난 뒤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 깨닫게 된다. 엘리트인 그는 출세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 체제 내에서 실현했어야 할 그 가치들을 엉뚱하게도 '언제 올지 모를 미래의 체제'에서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육체적 고통 속에서 아프게 깨달은 그는 걸리적 거리는 민중이니, 노동자계급이니 하는 따위 것들을 훌훌 털어낸다. 원래부터 별로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던 계몽의 대상이었을 뿐인 그들에게 별다른 미련도 없다. 이제 그는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다. 그리고 한 30년쯤 지나면, '박근혜 대통령이야 말로 자신이 아는 가장 청렴한 대통령' 이라고 외치게 된다.
다시 <봉순이 언니>로 돌아와서, 나는 공지영 작가도 진보진영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종종 들 때가 있다. 김문수 전 지사와 같은 변절을 하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작가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엘리트주의는 매우 불편하다. 작가의 소설 속에서 민중은 언제나 작가보다 못한 존재로 그려진다. 작가보다 못한 그 민중들에게, 작가는 '똑똑한 체'를 해대고 자신이 베풀어 줄 수 있는 수혜에 대해, 자신이 더 똑똑하기에 들려줄 수 있는 조언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봉순이 언니가 어떤 존재였는지 솔직히 이야기해 보면 '식모' 아닌가? 말을 돌리고 어쩌꼬 해도 봉순이 언니는 13살부터 화자의 집에 들어가 보육을 겸한 찬모 노릇을 하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에 합당한 댓가를 받지도 못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야기를 지어 봉순이 언니에 대해 '똑똑한 체'를 해댄다. 사실 '봉순이 언니는 어떻게 생각했을까'는 작가의 머리 속에 전혀 없을 것이다. 나는 작가의 소설에서 민중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똑똑한' 화자가 '아둔한' 민중을 대신해서 이야기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진보적 성향의 발언을 할 때마다 불편하다. 나는 작가가 진정 민중과 함께 아파하고 울어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런 것이 결여된 진보를 '입진보'라 하며 경계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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