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부터 '진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 단어는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프레임의 덫에 걸려 전혀 다른 뜻으로 변질되어 가는 듯 하다. 진보 내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수구보수진영은 '진보 = 친노 = 종북 = 빨갱이' 라는 단순 무식한 프레임을 무한반복하여 읊조리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국민들의 뇌리에 이와 같은 도식이 아로 세겨지는 날이 올 것 처럼.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무식한 바람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진보의 뜻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2.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 이 두 가지 뜻은 자의적으로 풀어 놓은 것이 아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진보를 입력하고 사전 검색 후 나온 결과를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갑자기 왜 '진보' 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진보를 자처하는' 진영 내부에서도 '진보'의 뜻에 대해 헤깔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진보를 곧 퇴폐적인 성향이나 건강하지 못한 정신상태와 동일시하는 부류가 생겨났다. '역사적 합법칙성'은 인식 불가능한 것이라는 패배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 피폐화된 인간군상들의 총합'이 '진보 세력'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망상을 낳게 한다.


<열외인종 잔혹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총 네 명인데 면면을 살펴보자. 장영달은 탑골공원이나 시골 읍내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군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다니며 꼰대짓을 하는 부류이다. 윤마리아는 다국적 제약회사 글로벌 유나이티드의 계약직으로 데이비드교라는 신흥종교를 믿고 있다. 김중혁은 노숙자이고, 기무는 게임방 무전취식을 일삼는 자퇴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 않다는 점이고(윤마리아도 사실상 무급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 둘째, 이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코엑스몰에서 벌어진 양머리들의 테러를 목격하고 휘말려 드는데 결론은 다소 생뚱 맞다. 김중혁이 양머리 보스로 오인 받아 기무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이다. 경찰과 언론은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하고, 사건에 휘말린 이들 역시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제 다시, '자본주의에 의해 피폐화된 인간군상들의 총합'이 '진보 세력'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망상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러한 망상의 가장 큰 폐해는 억압받는 자들끼리의 총질을 신나게 보여주고 새로운 '총체성'을 보여주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진보는 전혀 관련이 없다. 진보는 새로운 사회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위한 의식적인 노력의 총합을 일컫는다. 최하층계급인 노숙자로 전락한 뒤 어느 날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다? 밥 타러 가기도 귀찮아 하는 정신상태의 그들이? 이것은 기존 진보세력에 대한 대단한 모욕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소설의 외피를 뒤집어 쓴다한들, 그 이야기는 진보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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