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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시설에서 약을 받아 먹으며 매일 구타 당하던 시봉과 '나'. 처음에 약을 받아 먹었을 때는 매스껍고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약을 먹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불편하다. 자신들을 '시설의 기둥'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양말을 포장하고, 반장이기 때문에 다른 환자들을 대신해 사회복지사에게 사과하는 이들은 딱히 자신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때리면 맞고, 약을 받아 먹고, 사과를 대신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숙자 아저씨가 자신은 억울하게 시설에 끌려왔다며 매일 같이 종이 쪽지를 돌맹이에 밥풀로 붙여 바깥에 던져댄 덕분에 한달 뒤 경찰이 들이닥쳐 원장을 비롯한 시설 직원들이 잡혀간다. 졸지에 사회로 내팽개쳐진 둘은 딱히 갈데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시봉의 집으로 간다.
시봉의 집에는 몸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시봉의 여동생과, 여동생에게 빌붙어 사는 경마광 안경 쓴 남자가 살고 있었다. 무언가 돈벌이를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안경 쓴 남자' 말을 옳다고 여긴 시봉과 '나'는 대신 사과해주는 일을 하기로 한다.
사과를 대신해주고, 만약 사과할 일이 없다면 죄를 짓게라도 만들어 사과할 상황을 만들던 이들은 '대신 사과하려면 대신 죽을 수도 있느냐'는 사과 대상의 한 마디에 잠시 지체된다. 하지만 '안경 쓴 남자'가 자기들 대신 이미 사과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안 이들은 누군가 죽어야 계약 이행이라는 단순 논리에 의거해 '안경 쓴 남자'를 목메달아 죽이고 만다.
잡혀갔던 사회복지사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 과거 시설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시봉과 '나'를 납치한다. 원장이 남긴 일기장을 회수해 오라는 그들의 말에 '나'만 풀려난다. 되돌아가지 않으면 시봉이 죽을 걸 알면서도 '나'는 시봉에게 죄를 짓기로 마음 먹고 자살을 시도한 시봉의 여동생을 찾아 병원으로 간다. 병원비를 내지 않고 야반도주한 둘은 집을 향해 걷는다. 그 길이 집을 향한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가 창의적인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매력을 가졌던 이유는 정신병원에 대한 충실한 조사(혹은 경험)과 소설적 형상화 때문이었다. <사과는 잘해요>는 매우 조악한 소설이다.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연상시키는 초반 분위기에 푸코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카프카의 <심판>을 적당히 버무린 이 소설은 모든 것이 비평의 용이함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기계적인 소설이며, 소설적 형상화의 수준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약을 통해 순응을 내면화시키는 점, 의사 가운과 군화라는 뻔한 상징, 폭력의 명분 찾기용 사과 행위, 전도된 죄지음과 사과 등등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안경 쓴 남자'를 목메다는 섬뜩한 행위나, 시봉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두고 도망치지만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점 등은 어떤 알레고리로 읽기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놀랍게도 작가는 문예창작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