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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ㅣ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샹탈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잃은 뒤 이혼하고, 현재는 애인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광고회사에 다녔는데 회사에서는 평상시와 달리 까탈스럽게 굴었다.
어느 날 노르망디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 머물기 위해 갔다가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남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샹탈은 그와 같은 깨달음을 장마르크에게 이야기한다. 장마르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상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남자들에게서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자에 집중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샹탈의 우편함에 익명의 편지가 배달된다. 우표가 붙어 있지 않은 편지에는 한 남자가 샹탈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닌다며 연정을 고백하는 내용이 씌여 있었다. 샹탈은 이 편지를 하나의 해프닝으로 취급할 수도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옷장의 브래지어 밑에 보관한다. 편지가 또다시 배달된다. 샹탈은 편지에 씌여 있는 내용에 자극 받아 붉은색 잠옷을 사고, 그날밤 장마르크는 다른때보다 성적으로 흥분된다. 샹탈은 집 주변의 몇몇 사람을 편지의 발신인으로 짐작하고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몇 번의 테스트로 전혀 오해였음이 밝혀진다.
그러다가 편지의 필체에서 문득 장마르크의 흔적을 발견한다. 필적 감정 결과는 의심을 사실로 확인해준다. 그날 뜬금 없이 시누이가 아이 셋을 데리고 샹탈의 집을 방문한다. 아이들은 샹탈의 개인적인 공간을 마구 헤집어댔고, 옷장 속에 넣어 놓은 편지도 끄집어낸다. 화가난 샹탈은 시누이를 쫓아내고, 시누이를 집안에 들인 장마르크에게도 자신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형편이 아니냐며 면박을 준다. 샹탈은 영국으로 가리라 말한다. 그리고 집을 나선다.
장마르크는 샹탈의 말이 사실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아파트 열쇠를 놓아둔 채 떠나기로 결심한다. 장마르크는 자신이 동네에서 구걸하는 거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라고 생각한다. 고민하던 장마르크가 충동적으로 샹탈을 다시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간다. 과거에 영국인이 샹탈을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샹탈은 그 노회한 바람둥이를 만나러 간지도 몰랐다.
샹탈은 영국에 도착한 뒤 바람둥이에게 전화를 걸어 난교에 참가한다. 왠일인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그곳에서 샹탈은 벌거벗은 채 집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문은 모조리 잠겨 있었고, 어디가 출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문은 계속 못질이 되고 있었다. 샹탈은 창을 열고 장마르크를 애타게 찾는다. 장마르크는 마침 그 집 앞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장마르크가 샹탈을 깨운다. 현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마르크의 말에 샹탈은 누가 꿈을 꾸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현실 속 삶이 이런 뻔뻔한 환상으로 변형되었을지,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이며 그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한다.
소설은 크게 샹탈이 아이를 잃은 과거의 사건과 장마르크가 익명으로 보낸 현재의 편지 사건을 축으로 진행된다.
아이를 잃은 샹탈이 아이를 회상하며 슬픔에 잠기리라는 독자의 상식과 달리 샹탈은 아이를 잃음으로 인해 자신이 세계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고 도리어 아이의 부재로 인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급기야 아이를 잃은 것이 역설적으로 선물이 되었다고까지 느낀다.
한편 편지의 발신인이 익명이었을 때 샹탈은 그 상황을 일견 즐기는 듯 보이나 사실은 장마르크가 보낸 편지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다. 편지의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발신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편지의 영향력이 달라진 것이다. 소설 초입에 장마르크는 샹탈의 외모를 매우 늙은 어떤 여자의 모습과 착각하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 말미에 샹탈과 장마르크가 다시 재회하도록 한 후 편지사건과 그 이후 영국행, 그리고 난교에 참석한 것 중 특정 부분부터는 꿈이라고 암시한다. 그리고 꿈이 어디서부터인지는 알 수 없도록 처리했다. 정체성 자체가 사실은 꿈과 환상, 그리고 현실의 경계 어디쯤인가에 존재하는 모호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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