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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 개정판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보고 당혹감을 느낀 기억이 난다. 당시 유행했기에 드라마에 나온 것이 분명한 책들이나 영화, 패션들이 같은 94학번인 나에게는 무척 낯설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동아리는 좋게 말하면 사회 문제 이외에는 큰 관심을 쏟지 않던 분위기가 잔존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곳이었다. 내가 드라마의 배경이 낯설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동아리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 위기철이 쓴 <노동자 이야기 주머니>였다. 서른 네개의 진보적인 꽁트와 '이런 부모를 갖게 하소서'라는 글로 구성된 이 책이 첫 세미나 교재로 쓰였기 때문이다. <노동자 이야기 주머니>는 <자본론>의 가장 핵심적인 아이디어, 참교육, 노동조합과 파업, 법의 속성, 통일, 위정자들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열거식으로 늘어놓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알기 쉽고 명쾌하게 쓰여진 책이었다. 다소 감상적인 '이런 부모를 갖게 하소서'라는 글도 지극히 정의로운 글이었기에 선배들은 이 책을 우리 학번의 의식화를 위해 새로 채택하는 모험을 감행했는지도 모른다. (그 전에는 <껍데기를 벗고서>라는 책이 쓰였다)
하여간 위기철은 소설가가 아니라 진보적인 성향의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아홉살 인생>이라는 소설책이 나왔을 때 같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아홉살 인생>은 산꼭대기 무허가 판자촌으로 이사 간 아홉살 여민의 눈으로 본 세상을 작가 위기철이 나직한 어투로 풀어낸 소설이다.
깡패 노릇을 하다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온 여민의 아버지와 잉크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그만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된 여민의 어머니, 그리고 여민이와 동생이 산꼭대기 동네로 이사를 가서 그곳 이웃들과 일년을 지내며 겪게되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자 교양소설이다.
매양 허풍을 떨지만 삶의 진실에 맞닿아 있는 직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신기종,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하고 고민하지만 이를 세상에 풀어내지 못해 끝내 자살하고 마는 골방철학자,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하다가 정작 아버지가 죽자 공장에 일하러 나가 삶의 고단함에 짓눌리고 마는 검은 제비, 가난함을 자존심으로 가리려다 도도한 외톨이가 되고 마는 우림이, 그리고 노란네모 여민이 등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사실 <노동자 이야기 주머니>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의 소설 버전이다. 소설적 형상화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지만, 위기철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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